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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인식표와 호루라기 / 최장순

cabin1212 2024. 4. 27. 05:28

인식표와 호루라기 / 최장순

 

 

햇살이 유골을 적나라하게 발설하고 있었다. 수줍게 움츠린 유골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잠시 고개를 돌렸다. 분명 앳된 병사의 유골임이 틀림없어서, 가슴 한켠이 싸해지는 걸 느낄 때, 함께 발굴된 녹슨 인식표를 누군가 소중히 들어 올렸다. 강산이 여섯 번 변하는 동안 '피의 능선'에 쓸쓸히 묻혀있던 이름이었다.

동구 밖까지 따라온 어머니의 배웅을 뒤로한 채, 그는 기꺼이 조국의 부름을 따라나섰을 것이다. '꼭 살아 돌아오라'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부둥켜안고, 곱이 곱이마다 버텼을 전장, 휴전회담 무렵,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겠다는 양측의 치열한 전투에 후퇴는 없었다. 서슬 퍼런 명령이 그를 앞으로 앞으로 밀어냈을 것이다. 오랜 기다림의 시간, 끝내 아들은 전사통지서로 돌아오고, 마지막 말도, 유품도 받아들지 못한 채 어머니는 피눈물을 쏟았을 것이다. 먼 날의 그 어머니를 대신해 태극기가 유골을 포근히 감싸 안고 있었다. ​

나는 6.25둥이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수없이 들었을 총소리는 막 걸음을 내디딜 첫돌 무렵에야 멈추었다. 태중에 듣던 전장의 소음은 이미 귀에 익숙해져서일까. 육군의 길ㅇ르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30년간의 군 생활이지만 나는 전투를 체험하지 못했다. 전쟁을 예측하고 훈련은 했지만 그것은 지도상의 전쟁이었다. 불안한 평화였지만, 전쟁 없는 군인의 길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러나 격전지였던 고향땅 강릉 해안가에서 흙벽을 뚫고 날아드는 총탄을 피해 뱃속의 나를 지켜낸 어머니를 생각하면, 무훈武勳없는 오랜 군 생활이 죄송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반닫이를 열고 한동안 갇혀있던 흔적들에게 눈을 맞춘다. 군번줄에 매달린 인식표가 나를 불러주는 것 같았다. 호루라기, 계급장과 견장, 버클, 부대 마크 같은 것들이 이미 민간인의 습성에 흠뻑 젖어있는 나를 빤히 올려다본다. 오랜 시간 내 땀내와 친근했던 나의 분신들이다. ​

그중 유독 내 맘을 흔들어놓은 것은 국방색 호루라기다. 40여 년 전, 군복 오른쪽 어깨에 끈으로 묶어 주머니에 간직했던 것, 이 보잘것없는 호루라기를 인식표와 함께 애장품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ㅇ느 초급장교 시절을 회상하게 하는 정든 물건이기 때문이다.

호루라기는 지휘의 도구였다. 그 소리의 위력은 대단해서 내 눈빛과 몸짓에 따라 소대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대대 첨병 소대장 임무를 수행할 때는 호각도 한몫을 했다. 독도법도 소용없는 악천후 속에서 본대와 연결해 주는 신호용으로 제격이었다. 유격훈련장에선 방전된 병사들의 체력도 재충전시켰고, 무장 구보를 할 때에는 거뜬히 반환점을 돌게 했으며, 호각 신호에 맞춰 돌격할 때는 천지가 진동했다. 호각은 힘을 돋우는 데만 필요했던 건 아니었다. 심신이 지쳐 있을 때 달콤한 휴식을 알리는 것도 호각소리였다.

죽은 자의 유품과 살아있는 자의 소지품을 생각해 본다. 유해 발굴 현장에서 보았던 인식표는 전쟁의 상처와 회한이 담긴 죽은 병사의 유품, 눈물로 지새던 어머니를 뒤로하고 먼저 간, 피 끓던 스무 살의 체온이다. 우리들의 형이고, 삼촌이었던.​

전장의 급박한 상황에서 시신을 수습하기 어려운 경우, 인식표만 챙겨 사상자를 보고報告하는데, 유골과 인식표가 함께 발굴된 것은 그나마 위안일까. 내게는 여전히 전쟁의 슬픔이 전해지는 물건이다. 호루라기는, 실전을 체험하지 못한 나의 분신, 전쟁을 대비하는 훈련에 제 소리를 바친 물건이었다. 손자 손녀에게 준다한들 좋아할 장난감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내게 어떤 경각심을 주고 싶거나 야전이 그리어질 때면 그것을 꺼내 후루루 불어보곤 한다.

오래전의 한때가 후루루, 내게 말을 걸어온다.

"어때, 지난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물론."

그러나 안다. 다시는 갈 수 없는 그 시절이라는 것을. 하지만, 내 호흡을 묻힌 그 호루라기가 전쟁을 겪은 그 녹슨 인식표처럼 나를 확인시키며 일상을 진두지휘하리라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