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금당산 산책길에서 빚어진 일 / 조성국
금당산 산책길에서 빚어진 일 / 조성국
오르지 못한 산 하나를 가슴에 품고 살았다. 오르지 못해서 늘 우러러만 보았다. 만날 여명이 비치면 쳐다보고 월광이 슬면 또 쳐다보고 그랬다. 먼 산 바라기 하듯 바라만 보던, 가깝고도 먼, 멀고도 가까운 산을 오르락내리락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빚보증 서 집 잃고, 그 등등했던 노기를 삭이고자, 밤낮없이 쏘다니며 버럭버럭 악을 써댔던 일이 벌써 수십 년 전의 옛일처럼 아득하다.
오늘도 나는 어김없이 한 덩어리의 밤을 찬물에 말아 먹고는 산등성이에 올라 어느 절 아니 옥천이란 절에서 보내는 저녁 종소리를 듣고 있으면 밤하늘의 별도 생계를 잇는 일로 나온 듯 거룩해지고, 산등성이의 응달 언덕에 샛노란 생강나무 꽃들이 핀 까닭의 하나쯤은 알 듯도 하다. 또 종소리 그치면 달빛 같은 발자국을 내며 약수터에 나가 손을 씻고 낯을 씻고 내가 저지른 죄를 펼치고, 가슴 아픈 일들을 펼치고 분노를 펼치고 또 사랑을 펼치곤 하여 생강나무 꽃들이 샛노랗게 뭉쳐 핀 까닭의 다른 하나를 알아내곤 하였다.
더불어 소나무가 늘 푸른 까닭도 알게 되었다. 외형적으론 소나무가 푸른 까닭은 작년에 자란 솔잎이 그대로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지만 무엇보다도 송홧가루 피워 날리며 비릿한 새 이파리가 새록새록 돋아날 때까지, 그러니까 몸피는 하나인데 결이 여럿인 해묵은 진진초록의 솔잎파리가 누렇게 익듯이 저물어서, 소나무가 열어놓은 구멍으로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에 다 익은 솔잎이 조락할 때까지, 새로 자란 솔잎파리가 늘 푸른 바늘잎으로 다 클 때까지, 곁에 있어주기 때문이란 걸 알게 되었다.
무릎뼈가 빽빽하게 삭이도록 금당산을 오르고 내렸더니 어느 것 하나 벋대고 낯설지가 않았다. 내가 걷는 산책길에는 금빛 꼬랑지를 말아 올린 다람쥐가 도토리를 갉아먹다 말고 쫑긋 쳐다보았다. 하얗게 말라죽은 나무를 목관의 악기인 양 두들기는 딱따구리도 그랬고, 육추의 앳된 새끼 몇 마리를 이끌던 까투리도 날아가지를 않았다. 그렇게 겁이 많던 산토끼까지도 나를 한 식구나 다를 바 없이 여겼는지,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되레 내가 유혈목이에 질겁해 꺼리는 금당산 속의 숲길, 간밤에 퍼붓던 폭풍우를 어떻게 피했는지 물 한 방울 젖지 않은 나비가 어깨 살포시 내려앉아 함께 걸었다. 연전이나 올해에도 큰 눈을 맞이하여 그득그득 견디다가, 생가지 찢어진 붉은 소나무같이 팔 한쪽을 내주지 못했어도, 도무지 손쓸 수 없어서 머쓱히 바라보기만 하였어도 싫은 내색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밤저녁에는 어떠했던가. 어두워서 길이 막히고 날개로 가지 못한 길을 울음으로 가는 소쩍새하며, 이슥히 꽉 찬 달이 떠오르기라도 할라치면 그 명월과 가장 근접한 봉우리에 서서 쬐곤 하던 달빛이며, 그 달빛을 향한 욕심 또한 충만해져 웃통을 벗어젖히고 심지어 아랫도리까지 활딱 벗고 빛을 받는 너럭바위의 월광욕이며, 그 월광욕을 하고 나면, 오래도록 맥 빠진 생리를 앓고 난 여자는 금세 제 남자가 달 기운을 받아왔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살포시 품 안에 파고들던 새벽은 어떠했던가. 안방 창문에까지 바투 따라와서 힐끔거리며 기우는 달그림자는 또한 어떠했던가.
또 이맘때쯤의 금당산 떡갈나무 숲길에는 왜 그렇게 자벌레가 많은지, 몇 발짝 뗄 때마다 어김없이 달라붙었다. 눈에 띄지 않게 투명한 실오라기를 타고 내려와 잣대를 들이밀었다. 가무잡답한 온몸을 굳혔다 냅다 뻗으며 멧부리 지름길이나 기웃대는 나의 꿍꿍이 속을 재댔다. 한 눈금 두 눈금 곱자를 내밀고 배낭을 짊어진 어깨 등짝의 크기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재보기도 하고, 또 씰룩씰룩 앞서 걷는 매끈한 여자 엉덩이를 얄궂게 더듬거나, 은근슬쩍 젖가슴 크기를 가늠해 보다가 들켜 얻어맞기도 하였다. 어디 그뿐이던가. 불끈 선 아랫도리조차 보이지 않는 배불뚝이 사내가 부도방 찍힌 약속어음을 찢어발기며 떡갈나무에다 밧줄을 내걸고 목을 맺다가 염치없는 양 도망치듯 숲길을 벗어나게 했던 자질이, 자질하며 귀엣말처럼 무슨 말을 했는지, 자못 궁금하기도 했지만 가파른 산책의 발걸음에 무심코 짓밟힌 앳된 산자고 꽃대가 안간힘 써 허리를 곧추세우는 걸 언뜻 지켜보며 괜한 궁금증을 자아냈다고 스스로 통박을 놓기도 했다.
또, 흉한 고사목의 참나무에 깃든 오색딱따구리가 해충을 파먹고는 숨통처럼 구멍을 내놓자, 표고버섯이 부풀어 오르며 보랏빛 칡꽃이 얼크러진 것과, 그 나무 밑에 감춰둔 상수리 한 알을 입에 문 채 죽은 다람쥐의 육탈된 흰 머리뼈의 틈새로 참나무 움이 여릿한 것을 보며, 어떤 죽음이 어떤 삶이든 유목의 먼 북방 대륙에서나 보았던 생몰의 조화가 예서 몇 발자국 안 떨어진, 내가 사는 집 근경의 산발치에서 번번이 목격된 것은 다 금당산 산책길에서 빚어진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