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유하백마도(柳下白馬圖) / 이인주
유하백마도(柳下白馬圖) / 이인주
종일 그림 한 장을 들여다보고 있다.
빛바랜 고풍의 비단이 오래 머금었다 내뿜는 잔광처럼 은은히 살아오는 한 폭의 풍경. 고즈넉한 그 풍경 속으로 나는 어느덧 먼 고대의 땅을 들어선 삿갓 쓴 방랑자처럼 몰아의 한 초점이 되어 빨려 들어간다.
하늘하늘 미풍에 흩날리는 버들가지 아래 백마가 놓여 있다. 기실 버드나무에 매여 있지만 그냥 놓여 있다고 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그만큼 백마는 기품 있고 당당하게 서 있기 때문이다. 먼 허공을 보는 것도 같고 생각에 깊이 잠긴 것도 같다. 짐승에게서 품격을 발견하는 눈을 가진 한 선비의 고고한 인품이 말없이 스며오는 순간이다. 이때 말(馬)은 이미 말이 아니며 만 가지 상징이 담긴 무언의 말이기도 하다.
버들가지는 바람에 나부끼는 그대로 허허실실 공중에 제 갈 길을 수놓는다. 말은 그에 조응하듯 버들잎으로 제 잔등을 간지럼 먹이며 그들만의 언어로 보이지 않는 수작을 부리는 듯하다. 경박하지도 않고 천연덕스럽지도 않은 품새, 인위나 꼼수가 끼어들 수 없는 대자연적 경지다. 보는 이를 은근히 압도하는 정중동의 기운이 느껴진다.
저 말의 주인은 어떤 사람들일까? 상상력이 말의 고삐를 수 갈래 길로 몰고 가지만 그러나,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하나의 맥이 잘 잡힌다. 아마 그는 말을 가혹하게 부리거나 말 위에 군림하지 않았을 것이다. 재갈도 안장도 없는 것이 그것을 말해 준다. 그는 말을 타기보다 보는 것을 즐겼을 것이며 묶어 두기보다 놓아두기를 좋아했을 것이다. 말과 눈높이를 같이한 그는 자주 말의 눈동자에서 자신을 보았을 것이고 가끔은 말을 타고 광대무변한 세계로 달려가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어떤 대상을 절실히 좋아해 본 사람은 안다. 종일 그를 바라보며 그의 몸짓 하나하나를 통해 새롭게 발견하는 어떤 의미를, 그때 그 몸짓들은 얼마나 사랑스럽고 경이로운 세계인가! 의도이든 비의도이든 그의 몸짓들은 내게로 와서 마음의 파장을 흔들고 생각의 파장을 흔들고 마침내 존재와 세계를 흔드는 폭풍이 되지 않는가. 어떤 대상을 절실히 좋아해 본 사람은 안다. 종일 그를 바라보며 그의 몸짓 하나하나를 통해 새롭게 발견하는 어떤 의미를, 그때 그 몸짓들은 얼마나 사랑스럽고 경이로운 세계인가! 의도이든 비의도이든 그의 몸짓들은 내게로 와서 마음의 파장을 흔들고 생각의 파장을 흔들고 마침내 존재와 세계를 흔드는 폭풍이 되지 않는가. 무릇 한세상을 건너가는 보폭이 저와 같기를 꿈꾸어 본 적이 있다. 잘 조화된 한 폭의 그림처럼 세상과 나의 아귀가 벌어지지도 않고 어긋나지도 않게 어우러지는 삶을. 버들가지처럼 유연하게 흘러내리고 백마처럼 의연하게 직립하며 나 자신과 내가 가야 할 길에 대한 오랜 응시 뒤에 오는 어떤 깨달음을 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주 세상은 내게 불화로 다가오고 나 지신마저도 나와 불화 중임을 깨닫는다. 어쩌면 소통을 향한 나의 구애가 영원한 짝사랑으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그것은 다만 기술이나 기회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오랜 경륜과 수양의 깊이가 가져오는, 세상을 바라보는 혜안에 달린 문제일 것이다. 피할 수 없는 불화의 한가운데서 피워 올려야 할 초연한 기개가 내게는 감히 흉내 내지 못할 저 백마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말이 자연스레 겹쳐진다. ‘군자란 일정한 크기와 모양으로 국한되어 있는 그릇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고정되고 독단적인 처신만 일삼는 융통성 없는 이가 아니라 이를 초월한 기(器)로 나타나는 존재자라는 말이다. 아마도 이 그림을 그린 작가가 지향했던 인간상이 아니었을까? 평생을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오로지 학문과 예술에 전념한 선비의 삶 또는 언제나 평정심을 잃지 않는 의연한 군자의 풍모를 투영시킨 그림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라 안팎이 어수선하고 침울한 즈음이다. 위정(爲政)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무수한 위정을 본다. 제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한 소인배들의 아수라장 속에서 나라의 앞날을 비추어 줄 시대의 거울은 있는 것인가 하는 자괴감을 피할 수 없다. 무릇 한세상을 건너는 보폭은 강호에 숨은 고수들의 눈에 가감 없이 읽히는 법. 진짜와 가짜, 그 경계선에서 탄생되고 사라지는 수많은 사람과 역사를 거울처럼 생각해야 될 때이다. 무언을 만 가지 의미로 담은 진기(眞器)이면서 명기(名器)인, 백마도가 그려낸 숨은 주인은 바로 그런 군자상이 아닐 것인가.
이제, 불혹의 나이라는 사십 대에 들어서니 세상을 보는 눈이 제법 지혜와 여유로 열리는 것 같다. 살아가는 일이 발등의 불 끄기 같아서도 안 되고 제 코가 석 자여서도 안 되는 것임을 깨닫는다. 세월과 더불어 쌓여 가는 내공이 허공을 타고 오르는 한 그루 버드나무처럼 보기 좋은 모양새를 드리우길 소망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뿌리 깊숙이 박힌 한 그루의 지병조차 어쩌지 못하는 우수마발에 지나지 않으니 언제쯤 저 그림 속 백마처럼 교감의 버들가지를 희롱하는 경지에 이를 것이며 보이지 않는 고수의 주인이 될 것인가!
한 폭의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온 일이 아홉 가지 현묘를 깨친 노을처럼 아름답게 풀리는 어스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