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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내가 선호하는 뒤처리 방식 / 송혜영

cabin1212 2025. 4. 13. 06:13

 

내가 선호하는 뒤처리 방식 / 송혜영

 

 

나온 순서도, 업적과 죄질에도 상관없이 황망히 하늘로 불려 올라가는 일들이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게다가 이미 인간에게 허락된 시간을 반 넘어 소비하지 않았는가. 요즘 들어 부쩍 죽음의 뒤처리 방식을 두고 생각이 많아진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한때 내가 묻힐 서너 평의 땅을 탐낸 적이 있다. 햇살 가득한 숲길에서 은초롱꽃 화관을 쓰고 어린 고사리를 품은 봉분과 만났다. 세월이 쌓이고 쌓여 푹신해진 꽃 무덤의 발치에 앉아 다리쉼을 했다. 찬기가 가신 따끈한 햇볕을 쓰고 앉아 있으려니 마음이 편안하고 졸음이 왔다. 나중에 이런 자리에 눕고 싶다. 두툼한 땟장을 덮고, 산새 소리를 들으며, 철 따라 정수리에 꽃을 피우고,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긴 길을 시름없이 내려다보았으면…. 철없던 시절이었다. ​

내게는 이제 반들반들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가족 납골묘가 예정되어 있다. 하지만 볼 때마다 그 형식이 영 탐탁치 않다. 우선 견고하고 무거운 돌로 둘러친 공간이 많이 갑갑해 보여서다. 영혼의 드나듬도​ 원천봉쇄할 것 같은 거기에 들어간다는 상상만으로도 지레 숨길이 가빠진다. 그뿐인가. 삼대를 넉넉하게 수용할 그 돌상자 속에서 또다시 이승에서 맺은 인연들과 부대껴야 할 것 같아 절로 손사래가 쳐진다. 그보다 돌무덤을 꺼리는 좀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다. 흙무덤처럼 풍화되어 흙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집중포화를 맞지 않는 한 몇 백 년, 아니 천 년쯤은 족히 버틸 것 같은 대리석 무덤 속의 돌 항아리에 길이길이 남길 만큼 내 '가루'가 대단치 않아서이다.

평소에 입맛이 당기는 건 풍장風葬이나 조장鳥葬처럼 자연의 호흡에 온전히 몸을 맡기는 것이다. 거칠 것 없는 너른 벌판이나 산정에서, 바람에 말라가는 나를 떠올려보면 생의 체증이 가라앉는 듯 가슴이 시원해진다. 여기에 황동규의 <풍장>의 권위를 빌려보자. "바람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 작정을 하면 죽음이 더할 수 없이 근사하게 다가온다. 이 방식이 끌리기는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덮어놓고 고집할 수가 없다. 내 시신을 처리하도록 운명 지어진 사람을 많이 번거롭게 할 것 같아서다. 우선 시체를 버려도 누가 되지 않는 곳을 찾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비용도 그렇고 시간도 많이 할애해야 하니 경제적 측면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는 방식이다.

경제를 따지자면 시베리아 유목민처럼 마지막 살점 하나까지 가까운 사람에게 나눠주고 가는 합리적인 방식이 있다. 그런데 내 주위에는 시신의 살점을 기꺼이 받아먹을 만큼 굶주리거나 비위 좋은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점이다.

존경하는 어떤 유명 인사는 그냥 거적에 둘둘 말아 해부용으로 병원에 넘기라고 했다. 이 방식은 의학 발전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고려해 볼만하다. 하필 이때 렘브란트의 '니콜라스 툴즈 박사의 해부학 강의'가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질 게 뭐람, 젊은 의학도들이 빙 둘러서서 벌거벗겨진 나를 이리저리 헤쳐본다고 생각하니 어째 좀 부끄럽고 민망하다. 아직 어쭙잖은 여성성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겠지.

수장에 무게를 둔 적도 있다. 그냥 물에 '휙' 던져 수질을 오염시키라는 의미로 오해하지 마시길, 부언하자면 수목장樹木葬, 산림장山林葬이라고 풀 수 있다. 따지고 보지 않더라도 태어나서 세상에 별로 이롭지 못했으니 가면서 나무의 거름이라도 되는 게 그래도 생산적인 일이지 싶었다. 남쪽 지방에 사는 어떤 이는 자기를 묻고 은행나무를 심으라고 했다. 오래 살고 수형이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데다 낙엽 질 때 찬란하고 열매까지 열려서란다. 그는 꽤 알아주는, 경지에 오른 예술가이니 좋은 수종樹種을 선택할 자격이 있다. 내 처지로는 취향을 입에 올리기도 면구스럽다. 길가의 복숭아나무 밑이건 깊은 산속의 참나무 밑이건 상관없다. 아주 푹 잘 썩어 실한 과실을 맺게 해 지나가는 길손에게 보시할 수 있거나, 다람쥐 배를 채워줄 수 있다면 아마 내가 한 일 중 제일 잘한 일이지 싶은데…. 그도 여의치 않다. 아무 나무 밑에나 묻어버리는 건 명백하게 국법을 어기는 범죄행위가 아닌가.

그래 마지막으로 생각해 낸 것이 '밥풀장'이다. 따뜻한 밥 한 그릇에 곱게 빻은 내 가루를 묻혀 숲속에 뿌리는 거다. 출출한 새가 포르릉 내려앉아 고물 묻은 밥풀을 물고 가는 걸 상상하니 흐뭇하다.

장황한 사색의 과정을 거쳐 결론에 도달해도 내가 선호하는 방식으로 뒤처리가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평생 부부가 불화하던 친척 아저씨는 죽으면 절대 선산에 묻지 말라고 당부했다. 죽어서까지 또 아내와 나란히 자리하고 싶지 않다며 반드시 화장해서 산에 뿌리라고 자식들에게 오금을 박곤 했다. 만약 명을 어기면, 귀신이 되어 찾아와 해코지하겠다는 무시무시한 협박까지 곁들였다.​ 아저씨가 먼저 죽자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믿지 않는 자식들은 아비를 선산에 '땅, 땅' 묻어버렸다. 남편 옆에 미리 마련한 자기 자리에 흡족해하며 아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나.

아마 나도 도리와 편의에 따라, 인연이 지은 돌무덤에 길이길이 뼛가루로 남기기 십상이다. 이미 내가 없으니, 그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