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6

[수필]참으로 인간적인 / 신현식

cabin1212 2025. 4. 16. 06:39

참으로 인간적인 / 신현식 -<늙은 소년> 중에서-

 

 

초겨울이었다. 강의를 마치고 지상철에 올랐다. 종점이어서 빈자리가 많았다. 전동차 안에는 승객 두 명이 한창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시간이 되자 전동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출발하면 그만둘 줄 알았던 그들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이야기는 대체로 한 명이 하고 동료는 대꾸를 하는 형태였다. 연세가 조금 있으신 그들은 약간의 취기가 보였다. 그래서인지 목소리의 톤이 사뭇 높았다. 보아하니 시제時祭에 참석했다가 음복을 하신 것이리라.

그들의 이야기는 시제에서 다투었던 내용이었다. 시제를 주관하는 집례執禮의 옳지 못함을 따졌다. 평소에 잘 참석하지도 않던 일족이 오랜만에 그럴듯한 옷차림에 고급 승용차를 타고 오자, 그에게 종헌終獻을 허락하여 자기가 술을 따라 올리는 기회를 잃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행색에 의해 차별을 받았으니 그도 화가 날만했다.

화가 난 그의 말투는 톤이 높은 것 외에도 특이한 점이 있었다. 이야기의 마디마다 같은 추임새가 반복해서 들어갔다. ‘인간적으로,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인간적으로, 그럴 수 있느냐’ ‘인간적으로,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인간적으로 화가 나지 않게 되었느냐!’라며 동료에게 계속 예의 그 ‘인간적으로….’를 반복적으로 되뇌었다.

전동차는 네온이 반짝이는 하늘길을 미끄러지듯 나아가고 있었다. 그 사이 정류장마다 손님들이 승차하여 이젠 맞은편 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꽉 들어찼다. 모두 일과를 끝내고 피곤한 몸으로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두 노인의 주고받는 대화로 인해 승객들의 표정은 차츰 굳어 갔다.

인간적이라는 말은 ‘사람답다’라는 뜻으로 우리가 자주 쓰는 말이다. 인간은 신과 같을 수는 없고, 짐승과 같아서도 안 된다. 우리는 당연히 인간다워야 할 것이다. 그래서 실수나 과오를 너그러이 인정할 때 ‘인간적이었다’라 하고, 신의 경지를 보일 때, 또는 실수나 과오가 용납되지 않을 때 ‘인간적이 아니었다’라고 한다.

그 노인은 집례가 잘못되었음을 항변했고, 자신이 무시당한 울분을 표출했다. 그 울분이 얼마나 감당하기 버거웠으면 그 ‘인간적으로…’를 수없이 내뱉었을까. 전동차는 온통 그의 목소리뿐이어서 조만간 불평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때 한 아주머니가 들고 나섰다.

“이제, 그만하시지요!” 날선 목소리였다.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나고 말았다. 이제 황산벌 전투 같은 싸움이 벌어질 터였다.

“듣기 싫으면 안 들으면 될 것 아니오!” 역시나 센 대응이었다.

그에 맞서는 아주머니의 대꾸 또한 대단했다.

“혼자 계시는 것 아니잖습니까!”

이제 남은 것은 벌떡 일어나 멱살잡이 활극만 있을 뿐이다.

“뭣이 어째요?” 예상대로 그 노인이 맞받아쳤다.

일순 조용해지는 듯하더니 맞은편 좌석에서 굵직하면서도 차분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인간적으로 시끄럽기는 좀 시끄러웠습니다!”

그 소리에 전동차 안은 삽시간에 웃음바다가 되었다. 승객 모두가 그의 ‘인간적으로’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 웃음 때문인지 그 노인의 즉각적인 반응은 없었다. 웃음이 잦아들고 조금 있으려니 의외의 반응이 나왔다.

“인간적으로 미안하오….”

그 소리에 전동차 안의 승객들은 또 한바탕 크게 웃으며 막을 내렸다.

누구나 시비에 휘말리게 되면 상대에게 지지 않으려고 우기기 마련이다. 자신의 과오는 돌아보지 않고 날을 세워 우격다짐하는 것이 통례다. 특히 시선이 많은 곳에서는 사생결단하듯 대응한다. 그런데 집례를 따질 정도의 가부장적인 그 노인은 의외로 깨끗하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를 했다.

잘못인 줄 모르고 저지르는 잘못은 인간적이다. 잘못인 줄 알면서도 저지르는 잘못은 인간적이지 않지만,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하면 그래도 인간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잘못인 줄 알면서 잘못을 저지르고, 그것도 모자라 온갖 명분을 내걸며 우기고 버티는 것은 비인간적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는 그런 꼴을 너무도 많이 보아왔다. 저 잘나고도 높으신 어른들의 인간적이지 않은 모습을…. 그에 비하면 그 노인은 참으로 인간적이었다.

 

 

수필집 <늙은 소년> 정가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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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 나무향 02-458-2815, 010-2337-2825

지은지 ; 신현식 010-3909-79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