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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매화, 육백 년을 살다 / 정혜옥

cabin1212 2025. 6. 20. 06:03

매화, 육백 년을 살다 / 정혜옥

 

 

그 매화나무에 대한 소문은 오래전부터 귀에 들려왔다. 지리산 밑 깊은 산골,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는 빈 절터, 육백 살이나 나이를 먹은 나무, 이런 말들이 복합되어 그 매화나무에 대한 소문은 언제나 신비롭고 아득한 느낌을 갖게 하였다.

매화 이야기를 최초로 들려준 사람은 어떤 골동품 가게의 주인이다. 그림 한 폭을 보게 되었다. 매화도였다. 굵은 등걸에 꽃이 듬성듬성 피어있는 수묵화였다. 낙관조차 희미한 매화 그림은 먹물의 흔적이 강약을 이루며 번져 있었다. 주인은 매화도의 가치와 격조를 설명하며 지리산 밑 절터에 수령이 육백 년이 넘는 매화 한 그루가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매화도와 그 매화나무는 서로 닮아 있다고 하였다. 그날, 나는 파초가 그려져 있는 사기대접 한 점을 사 오며 파초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만 떠올렸을 뿐 매화 그림도, 매화나무 이야기도 이내 잊어버렸다.

두 번째는 십삼 년 전, 청매 한 그루를 뜰에 심을 때였다. 나무를 땅에 묻던 식물원 노인이 운치 있는 매화목이 되기까지는 긴 세월이 필요하다고 하며 지리산 근방에 있다는 오래된 매화나무의 소문을 또 알려 주었다.

우리는 그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 매화나무를 두고 많은 말을 하였다. 노인은 깊은 연륜 때문에 나무의 모습은 노쇠에 보이겠지만 그러나 당당하고 기품 있게 서 있을 것이라 했고 나는 반대로 더욱 웅장하게 자라나서 향기를 백리 밖까지도 뿜어대고 있을 것이라 하였다. 노인은 매화나무의 의지를, 나는 매화나무의 화려한 감성을 이야기했던 것 같다.

그 후, 어떤 분의 분의 분재 전시회에 갔다. 여러 종류의 수목들이 좁은 공간에서 곡예를 하듯 성장하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솟아오르는 것이 나무의 이치라고 알고 있는 나는 분재의 모습이 매우 답답하게 느껴졌다.

나의 이런 기분을 짐작한 듯 옆에 있던 사람이 분재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제멋대로 뻗어나는 분방한 성장력을 좁은 공간에서 격조 있게 다스리는 것이 분재의 참뜻이라고 하며 분재에는 절제된 아름다움과 나무의 겸손한 정신이 함축되어 있다고 했다. 그분은 또 단속사 옛 절터에 거대한 분재와도 같은 오래된 매화나무가 있다고 하였다. 육백 년이나 나이를 먹은 매화나무를 일컫는 것 같았다.

지난겨울 몇 차례 독한 감기를 앓았다. 그때 무병장수하며 오래 살고 있는 매화나무가 갑자기 보고 싶었다. 매화가 필 때쯤, 길을 떠났다. 나는 장엄한 매화나무와의 만남, 그 인연을 생각하며 어린 날, 마당가에 서 있던 꾸부정한 매화도 떠올리고 산비탈에 초연하게 서 있는 외로운 매화도 떠올렸다.

단속사의 위치를 물어가며 실상사 옆도 지나고 높고 험한 밤 머리재도 넘었다. 덕천강 어귀에서 소떼들과 길을 가고 있는 노인을 만났다. 그는 "아, 운리에 있는 절터 말이군, 거기 한없이 늙은 매화나무가 살고 있지." 하며 가는 길을 일러 주었다.

절터에 닿았다. 솔밭 사이로 당간 지주 두 개가 처음 나타나더니 곧 삼층 석탑 한 쌍이 눈에 들어왔다. 솔거의 유마상이 있었다는 절의 모습은 간 곳이 없고 매화나무도 보이지 않았다. 쏴쏴 불어대는 댓잎 소리와 봄날의 적요만이 절터를 지배하고 있었다.

어디서 꽃향기가 풍겨 왔다. 매화 향기였다. 향기를 따라갔다. 향기가 머무는 곳, 아, 거기, 우리가 찾아 헤매던 매화나무가 있었다. 골목 안에 숨어 향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육백 년의 세월 동안 더욱 높고 웅장하게 서 있을 나무, 그러나 매화나무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굵은 등걸에 비해 키는 낮아지고 먼 시공의 풍화 속을 견디어 온 듯 매화나무는 혼자 소슬하게 서 있었다. 다문다문 꽃을 달고 있는 나무는 한 그루 거대한 분재처럼 그렇게 절제되어 있었다. 정당매라는 칭호를 받은 매화나무는 지리산의 정기를 받으며 오랜 장수를 누리고 있었다.

우리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그 막막한 세월, 매화나무가 바라보았을 이 세상 모든 것, 그가 본 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름다운 것이었을까. 슬픈 것이었을까.

매화나무와 나란히 서서 나도 세상을 건너다본다. 영원불변하는 지리산도 보이고 산자락에 붙어 있는 밭이며 길도 보인다. 모든 길은 산에서 끝이 나 있다. 사람이 살다가 떠난 빈집도 보인다. 마당에는 풀이 우묵 장승처럼 솟아 있다. 흥망과 성쇠 속에서 영원히 남아 있는 것과 또 남아 있지 못하는 것, 그 구분이 확실해진다.

쓸쓸한 기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나는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매화나무는 서서, 나는 잠시 쉬었다가 가는 길손의 모습으로 돌 위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 꽃잎 몇 개가 어깨 위로 떨어진다. 나의 몸에 붙어 잠시 머물던 꽃 이파리들은 다시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 버린다.

지리산 산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은 매화나무와 사람을 갈라놓으려는 듯 소리를 내며 우리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