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무명용사 묘지 앞에서 / 박시윤
무명용사 묘지 앞에서 / 박시윤
숨이 막히도록 슬픈 계절이다. 반세기를 넘어 상흔으로 남은 그날의 이야기는, 누군가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이제 이 골짜기에 전설처럼 남았다. 유학산은 지금 짙푸른 계절을 맞아 한없이 눈이 부시다. 전차와 군화 소리가 가득했던 골마다 길이 나고, 민가가 자리를 잡고, 전우의 주검이 널브러진 된비알마다 아무렇지도 않게 나무와 민초들이 터를 다졌다.
누가 지금, 이 아름다운 산을 죽음의 산이라 말하겠는가. 다리를 절며 이산, 저산 가리키는 노인의 목이 메는 이야기 앞에 그 해,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눈물만 흘렸다. 누군지도 모르는 그 노인이 쏟아놓던 이야기들은 오래도록 가슴에 아프게 똬리를 틀었다. 이 산꼭대기는 아군이, 저 산꼭대기는 적군이, 하룻밤에도 수없이 주인이 바뀌었다던 고지를 올려다보며 나는 노인의 눈물을 따라 형언할 수 없는 통증에 사로잡혔다.
지금쯤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 노인.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니 주먹밥 나눠먹던 동갑내기는 흔적도 없고, 이웃집 형님도, 건넛마을 아우도 기척이 없더란다. 같이 내려가자고 아무리 흔들어도 일어나지 않더란다. 혼자서만 살아 내려와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다. 살아 숨 쉬는 것조차 미안하여, 어금니 물고 몰래 찾아가 무릎 꿇고 빌고 간다는 그 노인 아직도 살아계실까.
해마다 이맘때면 나는 조용히 이 골짜기를 찾는다. 딱히 약속을 정해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어느 날에선가 노인을 숙명처럼 또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그리움 때문이리라.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 이야기를 노인은 주저리주저리 끄집어냈다. 아프고도 슬픈 이야기들을. 그리고 오래오래 울었다.
서녘으로 해가 넘어갈 무렵, 잘 다듬어진 잔디와 정원수를 따라 구국용사들의 이름이 새겨진 충혼탑을 만난다. 하늘을 찌를 듯 드높은 탑의 그림자가 내가 오는 곳을 향해 길게 늘어진다. 홀로선 탑과 홀로 찾은 나 사이에 올해도 노인은 삭제된 듯 나타나지 않는다.
어둠이 서리고, 나는 조용히 무명용사 묘지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인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얼굴을 맞댄 적 없고, 단 한 번도 대화를 나눈 적 없지만, 마치 오래된 피붙이처럼 그렇게 서로 묵언의 인사를 나눈다.
"오라버니, 제가 왔어요.'이름도 없이 산산이 부서진 259점의 유해는 그렇게 조용히 잠이 들었다. 목숨을 걸고 이 땅을 지켜낸 젊음이, 이제 두어 평 남짓한 이 무덤에서 안식을 취한다. 눈이 부시도록 잘 번진 잔디가 다소 위안이 되지만, 오랜 세월 뒤, 우리들의 기억은 이 젊음의 죽음을 얼마나 값지게 기억해 줄까. 수 억만 개의 잎사귀가 어둠과 뒤섞인다. 바람이 불자 산은 온통 검푸른 실루엣으로 서걱댄다. 끊어질 듯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이어진 저 산맥은 아직도 무엇을 호휘하려는 듯 굳건히 서서 세상을 내려다본다.
나는 이 땅을 사수한 저 방패 같은 능선의 꼭짓점을 바라본다. 839고지, 837고지, 820고지, 674고지…. 유해발굴을 시작한 지 십수 년이 흘렀건만, 어느 기슭에서 찾아오는 이 없이, 그저 홀로 산화하고 있을 이거 대한 무명용사들의 묘지를 어이할꼬. 나는 조용히 산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아들아, 숨이 막히도록 슬픈 계절을 아느냐. 가시덤불 사이사이로 붉은 찔레꽃 무더기무더기 피어나는 이 처절한 계절을 말이다. 반세기를 거슬러 피비린내 진동하던 쓰라린 날들을 배웠느냐. 네가 지금 해맑게 자라는 이 땅은, 포화 속에 쓰러져간 님들의 살아있는 충혼의 땅이니, 오늘은 너의 가장 반듯한 모습으로 예를 갖추어 태극기를 달려무나, 폭포처럼 쏟아지는 뭉클함이 있거든, 너는 가장 먼저 조기弔旗를 달아라. 아들아, 평생 포화 속에 산화한 주검을 기억하거라. 그리고 못다 핀 그들의 삶의 몫을 너는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
아들아, 오늘은, 너의 방 창문 앞에 거룩하게 조기를 달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