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마지막 외출 /심찬용
마지막 외출 /심찬용
장모님을 모신 차가 도로를 달리고 있다. 처가집이 가까워지자 장모님의 얼굴은 해맑은 박꽃처럼 환해졌다. 평생 살아온 집을 떠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홀로 고향을 찾아가는 중이다. 먼저 마을 경로당부터 들렸다.
장모님은 경로당에 들어서면서 잘 있었는가 하며 인사를 했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안노들은 웬 낯선 사람인가 싶어 멀뚱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이 사람아 나를 모르는가 하고 소리쳤으나 그래도 알아보지 못했다. 내 정미소집 아닌가, 그제야 알았다는 듯이 어찌 이렇게 몰라보게 변해서 다른 사람이 되었는가 하며 깜짝 놀랐다. 파리하게 여윈 장모님의 손을 잡고 부둥켜안으며 눈물바다가 되었다. 나는 잠시 지나간 시간을 영사기 돌리 듯 회상해 본다.
지난 해 가을걷이를 끝낼 무렵이었다. 이른 새벽 시골에 사시는 장모님이 어지럼증이 심하다고 연락이 와서 병원으로 달려갔다. 혈액검사며, CT촬영을 하고 난 뒤 의사의 진단 결과는 별 이상이 없으며 잘 드시지 않아서 생긴 빈혈 증세가 있다고 했다.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다음날 어지럼증은 더 심해졌다. 당장 두 노인의 시골생활이 문제였다. 맏딸인 아내는 급한 마음에 서울 사는 남동생에게 연락했다. 막내아들은 선걸음으로 달려왔다. 비에 젖은 배꽃처럼 해쓱해진 부모님을 보자 안타까워하며 서울로 가자고 하였다. 아들을 만난 장모님은 반가움에 어지럼증도 날아가 버렸는지 괜찮다고만 하셨다. 아내는 이참에 아들이 모시는 게 상책이라 생각하고 부모님을 설득했다. 마지못해 장모님은 자식들 판단에 따랐다.
잘 다녀오라는 일가친척의 배웅을 받자 장모님의 눈가에는 눈물이 촉촉이 젖었다. 아이 같은 장인어른은 자기를 두고 떠날까봐 조급한 마음에 옷도 입은 채 슬리퍼를 끌면서 급히 차에 올랐다. 장모님은 집을 비우고 떠나가는 서운함과 다시는 오지 못할 고향땅이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인지 연신 차창 밖으로 뒤돌아보았다.
서울에 도착한 장인‧장모님은 새 옷으로 갈아입고 행복해하셨다. 그 모습을 지켜본 아들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카톡에 올렸다. 멀리 있는 자식들은 저녁식사를 하는 웃음 띤 사진이 전송되자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이렇게 시골노인들은 서울 사람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자 막내아들 집에 살고 있는 노인들은 가까이 살고 있는 큰아들 집으로 가고 싶어 했다. 노인들에게 큰아들은 태산 같은 존재였다. 몇 달 후 그렇게도 가고 싶은 큰아들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두 노인이 집을 옮긴 후 명절을 보내기 위해 아들 삼형제가 모였다. 큰아들 집에서 처음으로 든든한 아들 셋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두 노인은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 했었다.
어느 날, 나는 고속버스를 타고 장인‧장모님이 계시는 곳을 찾아갔다. 장인어른은 거동이 어려워 누워만 계셨는데 내 손을 잡고서야 겨우 거실로 나왔다. 두 분께 큰절을 올리니 기분이 좋아서 싱글벙글하셨다. 지난날 여행을 다닐 때마다 부르시던 장인어른의 애창곡 ‘나그네 설움’을 불러보라고 여쭈어도 묵묵부답이다. 내가 ‘오늘도 걷는다 만은 정처 없는 이발길……’ 하고 그 다음 가사를 모른다고 하자, 대뜸 가사를 이어서 끝까지 부르셨다. 자식도 알아보지 못하면서 노래는 잘 부른다고 모두들 깜짝 놀라며 손뼉을 쳤었다.
그렇게 큰아들 집에 사는 즐거움도 오래 가지 못했다. 장인어른의 병환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아들 내외가 직장에 나가기 때문에 돌볼 사람 없는 집에 두 노인만 남았다. 어쩔 수 없이 장인어른의 병간호를 장모님이 할 수밖에 없었다. 어지럼증이 심한 장모님으로서는 소‧대변을 받아내야 하는 병간호를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낮에 복지사가 오는 몇 시간은 그럭저럭 견디지만 그 이후 시간은 불안했다. 어쩔 수 없이 자식들은 큰아들 집 가까운 곳에 있는 요양원으로 모시기로 하였다.
두 노인은 요양원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자식들은 수시로 부모님을 모시고 식당에 가서 좋아하는 음식도 사드리며 집으로 모시지 못하는 불효를 대신하였다. 그래서인지 차츰 요양원 생활에 적응이 되는 줄 알았는다. 그럼데 두어 달이 지난 어느 날 급한 전화가 자식들에게 날아왔다.
큰아들이 응급실로 달려갔다. 그때 본 장인어른은 산소호흡기를 달고 정신도 오락가락 하며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멀리 있는 자식들도 달려와 밤을 세우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응급실에 간지 이틀 만에 운명하셨다.
장례식장에는 많은 일가친척들과 지인들이 조의를 표했다. 조화는 들어설 자리조차 없을 정도로 늘어서서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사람이 죽으면 사흘이면 가야하는 길이 정해져 있다. 자식들의 통곡 속에 발인을 마치고 장지로 떠났다. 6.25 참전용사인 장인어른은 국립이천호국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국립이천호국원에서 참전용사들의 예우를 기리는 안장식이 거행되었다. 식이 끝나자 장인어른의 봉안함은 묘역 23구역에 안장되었다. 이렇게 장인어른은 이곳에서 영원히 잠드셨다.
이렇게 생각지도 못했던 두 노인의 우연한 외출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일 년도 되지 않아 옆에서 노거수처럼 든든하게 지켜주던 장인어른을 보내고 외기러기 신세가 되어 돌아온 초췌한 장모님의 삶 자체가 허무하기만 했다. 그래도 고향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지난 날들이 행복했었다는 것을. 자식들 집에서 아무리 잘 해 주어도 내 집 같지 않다는 것을 이제야 장모님은 실감하는 눈치였다. 오히려 경로당에서 외롭게 고향을 지키며 살아가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과연 늙고 병들면 어떻게 사는 길이 정답일까? 백발의 노인는 오늘도 멀리 떠난 장인어른이 보고 싶은지 자꾸 눈가를 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