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어떤 사형수 / 이범선

cabin1212 2018. 9. 8. 07:26

어떤 사형수 / 이범선


 

 

일정 시대에 도쿄까지 가서 미술을 공부하고 돌아온 그 젊은 화가는 해방과 더불어 남한으로 넘어오려 했지만, 공교롭게도 늙은 어머니가 중풍으로 앓아누웠기 때문에 그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38선은 차츰 굳어져갔다. 그는 끝내 자유를 찾아 넘어오지 못한 채 북한 공산당 치하에서 지내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는 그림그리기를 포기하고 그대로 시골서 서투른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다. 그래도 그의 생각은 언제나 자유를 찾아 남쪽 하늘을 헤매고 있었다.

6·25사변이 일어났다. 공산군이 한때 마구 남쪽으로 밀고 내려갔다. 그는 실망하였다. 그러나 곧 국군이 반격을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그는 밤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어서 방송을 듣곤 하였다. 그렇게 하기 몇 날, 마침내 국군 진격이 38선을 넘어 황해도에 있는 그의 고을 부근까지 다다랐다.

이제 며칠만 더 참고 기다리면 정말 자유로운 하늘 아래 해방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기쁨을 감추고 초조하게 기다렸다. 이제는 그의 마을에까지 포성이 들려왔다. 공산군들이 후퇴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앞으로 하루쯤만 더 기다리면 국군이 그의 마을까지 해방시키리라는 것은 틀림없었다. 그는 정말 초조했다. 그렇게 포 소리가 점점 가까워 오던 날 새벽이었다.

그의 마을에서 같이 자라난 농민 위원장이 그의 집으로 느닷없이 달려들었다. 아니, 농민 위원장을 앞세우고 공산군 네 명이 따발총을 들고 들어 왔다.

"동무 같이 갑시다."

그 중 한 공산군이 그의 가슴에 따발총을 들이대며 말했다.

"무슨 일이오?"

그 화가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일찍이 그 누구한테도 원한을 산 일이 없었던 그였다. 그저 해방 후 몇년 동안을 공산당 밑에서 말 한 마디 없이 참고 살아온 그였다.

"가보면 알 게 아니오?"

"내가 무슨 죄가 있소?"

그러나 그런 항변을 해봤자 그게 통할 까닭이 없다. 그러니까 그동안 그는 조금도 공산당에 협력한 일이 없다는 것이 바로 그의 죄목이었다. 그런 소위 반동분자들은 후퇴하기 전에 모두 처치하라는 공산당의 지령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 길로 뒷산으로 끌려 올라갔다. 이제 마악 해가 솟아오른 산길에는 이슬이 함초롬히 내려 있었다. 북한의 시월 달 새벽은 제법 바람이 찼다.

그는 옥양목 바지저고리에 흰 고무신을 신고 손은 뒤로 묶여 있었다. 수그리고 묵묵히 걷는 그의 머리에서는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새벽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멀리 남쪽 하늘에서는 계속해 포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한 번 남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새끼야, 빨리 걸어! 뭐 포 소리가 들리니까 살 것 같으냐? 어림도 없다!"

뒤따르던 공산군이 총대로 그의 등을 쿡 찔렀다.

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맨발에 고무신을 걸친 그의 발에 이슬이 차가웠다. 그렇게 산중턱에까지 올라와서 였다. 그는 두 손을 꽁꽁 뒤로 묶인 채 거기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물끄러미 발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기 조그마한 송아지한 마리가 코를 땅에다 대고 꼼짝 못 하고 있는 것이었다. 목에 매인 밧줄이 말뚝에 뱅뱅 감겨서 송아지는 말뚝에 코를 가져다대고 꼼짝도 못 하는 것이었다. 말뚝에 매어 놓은 소가 풀을 뜯어먹으며 말뚝 둘레를 몇 바퀴고 돌다보면 그렇게 되는 수가 간간이 있다. 바로 그 송아지도 그렇게 된 것이었다.

"야 이 새끼야, 빨리 걸어라!"

그의 뒤에서 따라오는 공산군이 또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는 그대로 거기 서서 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그저 그렇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슬에 젖은 흰 고무신 코로 거기 말뚝에 감긴 송아지의 밧줄을 열심히 밀어 올려 풀어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그 모양을 본 공산군은 잠시 머뭇거렸다. 차마 그런 그의 등을 총부리로 밀어 세울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마침내, 말뚝에서 송아지의 고삐가 풀렸다. 송아지가 머리를 들 수 있었다.

"새끼야, 빨리 걸어라."

공산군이 그의 등을 밀었다. 그는 비틀비틀 앞으로 고꾸라질 듯 다시 걷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그와 공산군의 모습이 뒷산 잔솔밭 뒤로 사라졌다.

그로부터 5분 쯤 지나서였다. 솔밭 뒤에서 총소리가 몇 방 요란스레 새벽하늘을 흔들었다. 총소리에 놀란 송아지는 으쓱 머리를 쳐들었다. 귀를 쫑긋쫑긋 움직였다. 커다란 송아지의 두 눈에는 겁이 잔뜩 서렸다. 그러나 한참이나 그러고 서 있던 송아지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풀을 뜯으며 말뚝 둘레를 천천히 돌고 있었다.

 

 

* 이범선(1929~1982) : 소설가. 평남 신안주 출생. 동국대학 국문과 졸업. 1955<현대문학>에 단편 '암표''일요일'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 현실과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로 주목을 끌었다. 소설집 <오발탄><피해자>외에 수편의 장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