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직립 / 박동조

cabin1212 2018. 10. 28. 06:24

직립박동조


 

 

식물마다 저 자라는 방식이 있다. 옆으로 기어가듯 자라는 식물이 있는가 하면 위로만 곧게 자라는 식물도 있다. 야자나무는 위로만 곧게 자라는 귀화식물이다. 잎까지 사철 푸르러 옛날부터 우리나라에서 살았더라면 꼿꼿한 절개를 지녔다고 대나무 못잖은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거실에 들여놓은 야자나무 이파리가 천장에 닿았다. 야자에겐 더 갈 곳이 없다는 건 비극이다. 아파트는 야자나무가 있을 곳이 못된다. 하늘을 지붕 삼지 못하는 저도 딱하지만 바라보아야 하는 마음도 편치가 않다.

 

하늘에 닿을 것처럼 곧추서 본들 단단한 천장이 뚫릴 리 없다. 천장을 뚫을 것 같은 줄기의 기세가 나아갈 곳이 없으니 주춤주춤 생기를 잃어간다. 오로지 직립만을 알고 있는 야자는 천장에서 몸을 조금만 굽히면 자신이 뻗어갈 세상이 있다는 걸 알지 못한다.

 

처음 야자 줄기가 천장에 닿았을 때 갈 곳이 없으면 휘어지려니 여겼다. 내가 알고 있는 식물은 대개가 앞이 막히면 옆으로 휘우둠히 뻗어서 성장을 계속했다. 그러나 야자는 옆으로 휘지를 못하고 온 힘을 다하여 곧추서려고만 했다. 곧추서려고 애를 쓸수록 줄기는 점점 더 오그라지고 잎은 초록색을 잃어갔다. 보다 못해 작은 돌멩이를 매달아 아래로 처지게 해봤다. 천장에 닿지만 않으면 제대로 이파리를 펼치리라 믿었다. 그러나 며칠이 못가서 줄기가 부러지고 말았다.

 

야자나무는 가지가 없는 대신 줄기가 자라나오면서 깃털로 만든 부챗살처럼 서서히 초록색 이파리를 펼쳤다. 이파리를 펼칠 때의 모습은 무희가 춤을 추는 동작처럼 우아했다. 이젠 그 우아한 모습은 볼 수 없다. 천장에 닿는 줄기마다 이파리를 펼치지 못하고 오그라들었다. 벌써 세 번째 줄기여서 보지 않아도 어떻게 될지 모습이 훤하다.

 

화초를 파는 노점을 지나다 야자나무에 눈길이 머문 것은 멀쑥한 키에 기다란 이파리가 멋스러워서였다. 집에 들이고서도 긴 이파리를 늘어뜨리고 쭉쭉 키를 돋우는 늠름한 모습에 애착이 갔다. 아열대 지방이 고향이라고 해서 행여나 볕이 모자랄까 춥지나 않을까 마음을 기울였다. 겨울에 오랜 시간 집을 비울 때는 보일러를 끄지 않았다. 정성을 기울인 만큼 야자나무도 보답을 했다.

 

창을 열 때면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검푸른 이파리를 살랑거리며 커다란 키를 우쭐거렸다. 어느 때부턴가 의기양양 자라는 키가 천장에 닿을까봐 조마조마했는데 결국 천장에 닿고 말았다. 오그라진 줄기를 보면서 내 마음은 자꾸만 흔들렸다.

 

남편은 특별히 가진 건 없어도 꼿꼿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다. 꼿꼿한 성품에 끌려 사랑을 하고 결혼을 했다. 연애는 이상이고 결혼은 현실이라더니 우리 부부가 그랬다.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 이상은 현실에 밀려났다.

 

성품이 마음에 들어 결혼을 하였지만 곧은 성격은 차츰 결점으로 다가왔다. 살아가면서 다툼이 잦았다. 처음에는 마음이 황폐해진 내 탓이려니 하고 스스로를 탓했다. 남편이 지장에 다닐 동안은 티격태격 다투기는 했어도 꼿꼿한 성격이 살아가는데 걸림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월급을 받는 생활을 접고 사업을 하고부터 문제가 생겼다.

 

사업은 혼자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니었다. 시대와 얽히고 관공서와 얽히고 업체끼리의 이해관계에 얽혔다. 심지어 계절과 날씨에도 얽혔다. 얽힌 걸 잘 풀어내지 못하면 사업의 결과는 뻔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윤이 이라는 절대의식을 갖고 있었다.

 

애초부터 그에게는 그런 절대의식이 없었다. 2년 간 납품을 보장해 준다는 확약을 받고 시작한 사업이어서 그동안 자리를 잡는다는 나름대로의 복안이 있었다. 자리만 잡으면 사업체는 저절로 굴러갈 거라고 믿었다.

 

사업의 세계는 생각처럼 만만치가 않았다. 맡은 일만 열심히 하면 꼬박꼬박 월급을 받는 생활에 젖은 그에게 모색하고 판단하고 추진해야하는 사업의 세계는 낯설고 물설었다. 월급을 받는 처지에서 어김없이 월급을 줘야하는 처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듯 사업체에 돈을 넣었지만 한 번 들어간 돈은 되돌아 나올 기미가 없었다.

 

남편은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라면 세수도 꼿꼿이 할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자존심이 또 하나의 밑천이자 동반자였다. 가끔씩 사무실로 이권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개인적인 이익을 오는 사람이 대부분이어서 잘 다독여 보내야 후환이 없는데 찾아온 의중을 알면서도 한 잔 차만 대접하고 돌려보냈다.

 

그는 소위 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밥을 사고 촌지를 건네고 굽실거리는 건 치욕이라고 생각했다. 거래처와 계약이 만료되었을 때도 연장을 위하여 담당직원과 술자리 한번 같이하지 않았다.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융통성 없고 답답하다는 충고를 밥 먹듯 들었지만 오히려 말을 하는 사람더러 이해가 안 간다고 큰소리쳤다.

 

자존심이야말로 사람이 살아가는 마지막 보루라 여겼기에 돈이 된다고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내 눈에 남편이 하는 행동은 자존심과는 거리가 먼 고집일 뿐이었다. 굽힐 줄 모르는 옹고집 때문에 오그랑장사를 일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적당히 타협도 하고 휘기도 하는 사람이 잘 사는 세상에 혼자만 고고한 척하는 남편이 미웠다.

 

가난이 대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은 창문으로 도망간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마음을 합해 위기에 맞서기보다는 원망하고 탓하느라 걸핏하면 큰 소리가 창문을 넘었다. 고빗사위 길을 넘고 또 넘었건만 남편은 여전히 홀로 꼿꼿했다.

 

새로 돋은 줄기가 주춤주춤 오그라져 생기를 잃어도 야자는 변함없이 당당하다. ‘천장아! 너는 막아서라. 나는 나의 길을 가련다.’고 말하는 것 같다. 어쩌면 야자나무는 벌써 네 번째 줄기를 내어 보낼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식물일지언정 직립하려는 의지가 가상하지 아니한가.

 

내일은 천장 높은 곳을 알아봐야겠다. 마냥 줄기가 오그라드는 걸 두고 보는 것은 가족으로 살아온 도리가 아니다. 드높은 천장을 향하여 쭉쭉 가지를 뻗어가노라면 주렁주렁 열매를 다는 날이 오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