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동침(同寢) / 류연택

cabin1212 2018. 12. 4. 06:27

동침(同寢) / 류영택



 

문살은 꽃문양을 하고 있었다. 같은 모양의 꽃이 칸칸이 새겨진 문에는 하얀 창호지가 발려져 있었다. 창살이 선명하게 드러난 창호지는 씨실과 날실이 일정한 공간을 이룬 하얀 망사 천 같았다.

얼마 전, 감포에 가는 길에 근처 사찰을 잠시 들린 적이 있었다. 사찰의 대웅전은 단청(丹靑)을 하지 않은 목재건물이었다. 나는 대적광전(大寂光殿)이란 현판이 붙은 본전건물을 보는 순간 ''하고 숨이 막혀왔다. 맨살을 드러내고 있는 건물모습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망사드레스를 걸쳐 입은 그녀의 모습처럼 보였다.

그녀와 나는 같은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김양은 나와 동갑이었지만 입사는 몇 년 빨랐다. 나는 김양에게서 업무를 배웠다. 사무실일이 적성에 맡지 않았던 나룬 직장을 그만두고 싶었다. 내가 힘들어 하자 경리일을 맡고 있던 그녀가 일머리를 가르쳐주었다. 그녀는 그렁그렁한 눈매만큼이나 업무처리도 빨랐다. 업무상 내가 해결해야할 일을 결정짓지 못해 끙끙대고 있으면, 자신 같으면 이렇게 했을 것이다. 조언도 서슴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런 그녀에게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 그녀는 남자친구가 없었다. 여자나이 스물넷이면 당시 나이로서는 꽉 찬 나이였다. 나는 김양이 애인이 없는 것은 큰 키 때문이라 생각했다. 물론 내 키가 작아 그러했겠지만 나는 그녀의 어깨까지 밖에 닿지 않았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김양은 평소와 다르게 짙은 화장을 하고 출근을 하는 날이 있었다. 그 날은 어김없이 몇 시간 자리를 비웠다. 나는 김양이 맞선을 보러 가는 줄도 모르고 웬일이냐며 농을 했었다. 하지만 머쓱할 수밖에 없었다. 자리에 앉은 그녀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손끝만 닿아도 책상을 뒤집어엎어버릴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부모님의 성화에 어쩔 수 없어 나가긴 했지만 인연을 만나지 못했다. 퇴짜 놓는 것보다 당하는 일이 많다보니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 그랬던 것 같았다. 이젠 그마저도 포기를 했는지. 짙은 화장을 한 그 모습을 한동안 볼 수가 없었다.

얼마 전부터 나를 바라보는 김양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았다. 왜 저러지? 내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내 눈과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무슨 일 있어요?"

"아뇨!" 그녀는 당황해하며 장부를 들여다보는 척 했다. '그게 아닌 것 같은데' 나는 퇴근준비를 했다. 사무실문을 나서려고 하자 그녀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토요일저녁 시간 있어요?" 애절한 한 그녀의 눈빛을 보니 없는 시간도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영화를 보러가자던 김양은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시내회관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사전에 약속을 했던지 그곳에는 그녀의 친구들이 먼저 나와 있었다. 유유상종이라고 김양의 친구들도 멀대 같이 키가 컸다. 김양친구이면 나와 동갑인데. 나이도 나보다 더 들어보였다. 친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중 한 사람을 소개시켜주려고 그러나보다 잠시 들떠있었는데. 김양만 아니면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자 자기들끼리 쑥덕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작지 않니……." 내가 김양 애인이 돼있었다.

나는 김양이 싫지는 않았다. 큰 키에 얼굴도 그만하고 다음세대를 생각하면 그 이상 이상형도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 버거웠다. 내가 아무리 어른 행세를 하려고 해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평생 우러러보고 살 자신이 없었다.

싫어도 싫다는 말을 잘 못하는 나는 김양을 또 따라나섰다. 평소에도 치마를 즐겨 입었지만 그날따라 그녀는 기다란 다리에 허벅지가 다 드러난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공원을 걷다 나는 그녀의 다리를 봤다. 정강이 뒤쪽에 벌레가 붙어있었다. 함부로 여자 몸을 만질 수도 없고 잠시 망설이다 그녀에게 일러주었다.

김양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벌레가 붙은 게 아니라 스타킹 고가 나간 것이었다. 살색이라 나는 그때까지 그녀가 스타킹을 신었는지 모르고 있었다.

"누가 오는지 잘 보세요."

뒤돌아 가만히 서 있었지만 내 신경은 온통 그녀의 다리에 가있었다. 눈으로 볼 수 없으니 가슴이 더 두근거려왔다. 귀로도 들리지 않았다. 귀에서는 윙 소리만 났다. 나는 마음으로 듣고 있었다. 마음으로 듣는 소리는 더 크게 들려왔다. 다리가 길어 그런지 '자르르' 스타킹에 붙은 작은 솜털들이 일으키는 정전기 소리가 샤워물소리처럼 들려왔다. 어느새 그녀의 목욕 하는 모습이 그림으로 다가왔다. '나를 홀리려고 날을 잡았나!' 기분이 요상해져왔다.

사람이 어찌 실수를 하지 않을까. 원체 그 소리에 마음이 동하다보니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소리가 첫날밤 사랑을 나누는 소리처럼 들렸다.

김양은 씽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헌 스타킹이 내 손에 와 닿았다. 순간 기분이 묘해왔다. 그녀의 몸을 만지는 것처럼 찌릿해왔다. 나는 얼른 손을 뺐다. 뚝 떨어지던 핸드백이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출렁 그네를 탔다. , 우리는 마주보며 쑥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오래전 일이지만, 그때 그 일이 얼마나 머리에 깊이 각인 되었는지. 나는 발바닥을 하늘로 향한 채 스타킹이 신겨져 있는 마네킹발만 봐도 그때 일이 머리를 스쳐갔다. 김양과 스타킹, 동일인물처럼 느껴졌던 그녀가 꽃무늬가 수놓아진 망사드레스를 입고 내게 손짓을 하는 것 같았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다시 건물을 바라봤다. '정말 돈이 없어 단청을 못한 건가.' 평소 접해보지 못한 모습이라 낯설기는 해도 요란스럽지 않은 지금의 모습이 더 우아해보였다.

꽃문양이 새겨진 창살문 앞으로 바싹 다가섰다. 떨어져서 바라볼 때보다 창살이 더 정교해보였다. 금형으로 찍어낸 듯 두 창살이 맞닿은 홈에는 빈틈이 없었다, 색이바랜 쇠시리도 결이 선명했다. 긴긴 세월 온갖 풍파를 어찌 견뎌낼 수 있었을까. 만져보고 싶은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만질 수가 없었다. 그날 내 손에 스타킹이 닿았던 것처럼, 그녀의 손이 와 닿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냥 가려고!'

나는 뒤를 걷어봤다.

'우야라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걷다보니 왠지 뒤통수가 가려워왔다.

다리가 짧았던 나는 그녀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살색스타킹을 신은 그녀의 긴 다리를 보고 있으면 숨이 막혀왔었다.

차라리 울긋불긋 칼라스타킹을 신고 있었더라면 화려해 보이긴 했어도 우아해 보이지는 않았을 텐데. 그랬었다면 손을 내밀 수 있지 않았을까. 독백처럼 궁색한 변명만 늘어놓았다.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려고 그동안 수없이 발버둥을 쳤지만 여전히 손을 움츠리는 것을 보면, 스타킹은 내 스스로를 가둬놓은 그물망 일지도 모르겠다.

'바보' 그녀의 애틋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