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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떠나가는 배'에 관한 명상 / 황주리

cabin1212 2019. 1. 8. 05:48

'떠나가는 배'에 관한 명상 / 황주리

 

 

 

여행을 하다가 비행기나 배를 놓치는 경험을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 얼마나 떠나가는 배나 비행기가 마치 이 세상이 끝이라도 난 것처럼 허망한 마음을 남기는지를. 만일 전쟁같은 비상시라면 그 한번 놓친 배나 비행기로 인해 생사의 기로에 놓일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아무리 현대 문명이 발전했다 해도 안개 낀 섬에서 육지로 탈출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박 삼일 예정으로 덕적도를 향해 떠났던 나는 포구에 죽 늘어앉은 섬 아주머니들이 파는 자연산 도다리와 놀래미와 갑오징어를 구경하다가 너무나 싼 값에 홀려서 육지로 가는 배를 놓쳤다.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갑자기 눈물이 날 정도로 절실해지는 마음을 그 무엇이 비하랴. 저 떠나가는 배를 잡을 수만 있다면 아무 걱정이 없을 것만 같았다. 아마 많은 일이 그럴 것이다. 떠나가는 그 님을 잡을 수만 있다면, 떨어진 대학에 붙을 수만 있다면, 면접에서 떨어진 그 회사에 취직할 수만 있다면, 등등. 하지만 하루에 한 번 밖에 오지 않는 배가 떠났다 해도 사실 그리 나쁠 것도 없다. 섬에서의 아름다운 시간을 하루 더 연장 받은 것이다.

섬이란 고립의 의미뿐 아니라 감금의 의미를 지닌다. 날씨가 나쁘면 몇 날 며칠 발이 묶이는 곳이 바로 섬이다. 바로 내가 그랬다. 배를 놓친 다음 날은 일찌감치 포구에 도착했다.

'안개로 인해 금일 운항 중단'이라는 글씨를 보았을 때 정말 주저앉고 싶었다. 그 옛날 섬으로 귀향 간 선비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 선비들이 망망대해를 바라보던 기분으로 한참을 그렇게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아니 바다를 바라본 게 아니라 허공의 심연, 마음의 저 먼 자리 끝자락에 서 있는 자신의 무기력한 그림자와 만난 것이리라. 안개와 비와 폭풍과 수없는 자연재해 앞에서 아무런 힘도 행사할 수 없는 무력감으로 제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 해도 온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이다.

이쯤 되면 행복의 취향 쪽을 지닌 사람과 불행의 취향 쪽을 지닌 사람으로 판이하게 나뉜다. 말할 것도 없이 섬에 갇혔을 때 행복의 취향을 가진 사람 쪽이 훨씬 유리하다. 이미 볼 곳 다 본 지루하고 따분한 섬이 아니라, 시시각각 풍경이 변하는 아름다운 섬을 즐길 수 있는 아주 드문 기회로 삼는 사람들만이 휴식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들이다. 운명적인 휴식, 이것이 바로 섬에 갇히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동행한 친구와 그저 너 때문이니 나 때문이니 하면서 싸움을 그치지 않는 어리석음을 범하기 마련이다. 도시에서의 일정과 다음날의 약속들이 우리를 숨 가쁘게 기다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얼마나 중요한 일들이 있는 것일까? 섬이 좋아 도시를 버리고 직장을 버리고 섬에 눌러앉은 사람들도 있다. 어디 섬뿐이랴. 네팔에서 산이 좋아 민박을 경영하며 시간 날 때마다 히말라야에 오르는 한국인 젊은 부부네서 묵었던 생각이 난다.

덕적도에서 우리가 묵은 곳도 그랬다. 젊은 부부가 섬이 좋아 섬에서 터를 잡고 살고 있었다. 섬 병이 도져서 도시에서는 살 수 없었다는 '서랑 님박'의 부부는 한 마흔쯤 되었을까. 참 때 묻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서포리 바닷가를 마치 제 마당처럼 앞에 둔 그곳에서, 육지로 떠나지 못한 우리는 정말 바다를 원도 한도 없이 바라보았다. 배를 놓치기 전날은 덕적도에서 배를 타고 한두 시간 더 들어가는 백아도를 다녀왔다.

그야말로 배를 놓치면 일주일 아니 한 달도 묶일 수 있다는 그 고립의 섬들이 이 세상에는 몇 개나 되는 걸까? 백아도는 그 이름만큼이나 깨끗하고 맑고 아름다운 섬이다. 구멍가게 하나 없어서 맥주 한 병도 살 수 없는 곳, 우리는 그곳에서 유명한 이장 댁에서 묵었다. 그 집 아주머니가 끓여주는 매운탕 맛도, 매일 직접 잡아 상에 올리는 생선회의 달고 싱싱한 맛 또한 섬 여행의 진수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섬 여행의 매력은 그곳에서 우리가 철저히 혼자가 되어보는 것이 아닐까? 책 몇 권 들고 가서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 드러누워 세월아 네월아 시간을 죽여도 좋은 곳, 도시로 돌아가면 나 자신도 머지않아 섬 병이 도질 것만 같았다.

스무 살 시절엔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았다. 외로운 건 섬이 아니다. 섬에서 섬으로 가려면 배를 타고가면 된다. 몇날 며칠 안개가 자욱해서 배가 뜨지 않더라도, 그저 배만 기다리면 된다. 하지만 ''라는 섬에서 ''라는 섬으로 가려면 우리는 무엇을 타고 가야 할까? 우리들 모두는 다 하나의 작은 섬이다.

그때의 내게는 이 세상 그 어느 곳이나 다 고립된 섬이었다. 지독하게 외로웠던 젊은 날 우리 모두는 그저 외롭게 표류하는 섬이었다. 섬과 섬이 만나서 아무리 곁에 있어도 그저 따로따로 섬일 수밖에는 없는 인간 존재의 고독감을 그때처럼 절실하게 느낀 적이 또 있을까?

지금의 나는 일부러 고독을 찾아 섬으로 간다. 그 고독이 참으로 사람을 맑고 투명하게 청소해 준다는 걸아는 때문이다.

잊을 수 없는 섬, 덕적도에 가면 서포리나 밭지름 해변도 좋지만, 능동 자갈 마당에 꼭 가볼 일이다. 평범한 자갈돌들로 시작되는 그곳은 이쪽 편에서 저쪽 끝으로 걸어갈수록, 이 지구상의 돌들이 아닌 다른 낯선 혹성에 불시작한 듯한 신비한 돌들로 가득하다. 그곳이 화성일까? 달나라는 아닐까?

정말 산책하기 참 좋은 별 지구, 그 중에서도 덕적도, 그 무심하게 떠나가던 배를 어찌 잊을까? 우리들의 삶도 어느 날 저 떠나가는 배처럼 무심하게 떠나 가리리. 사랑하다. 무심하고 아쉬워서 더욱 아름다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지금 이 순간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