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참 잘했다 / 최춘

cabin1212 2019. 5. 31. 06:06

참 잘했다 / 최춘

 

 

 

이른 아침. 졸린 내 눈에 간지럼을 태우는 사람은 새벽 운동을 나가려다 마루 문을 열어 놓고, 눈 쌓이는 것 좀 보라는 남편이었다. 난 그만 그 성화에 져주기로 했다. 베란다 문을 통하여 함박눈이 내게 쏟아져 내렸다.

골짜기 바람 만나서 속살대는 마을에 한겨울의 아침이 오면, 어린 우리들의 허벅지까지 차게 눈이 쌓여 있었다.

나무 울타리 쪽에 모아둔 눈을 토닥토닥 삽으로 다진 뒤, 샘물을 뿌려 얼리고, 우리만이 오를 수 있는 얼음 재단을 만들고 미끄럼틀을 만들었지. 그 미끄럼틀 부서질까 봐 차마 계단을 오르지 못했지.

개울 건너 작은 언덕을 끼고 있는 얼음 골짜기에서, 소나무 가지 위에 마른 짚단을 놓고 올라앉아 하나 두울 세엣, 하면 골짜기 아래까지 순식간에 미끄러져 내렸지.

골짜기 타는 웃음소리에 놀라, 나무에서 무더기로 떨어지는 눈덩이에 얻어맞고, 상처투성이 얼음 바닥에 곤두박질치며 솔가지 썰매놀이에 빠지고 얼어붙어, 아무런 감각 없는 소녀의 몸.

앵두 같은 입술, 복숭아 같은 볼, 갈색의 두 눈을 성에 낀 작은 유리에 들이댄 채, 고사리 같은 손으로 화로를 끌어안고 마당을 내다보았지.

솔잎 눈썹, 숯덩어리 눈과 긴 코, 빨간 고추 입을 내밀고 있는, 우리 키만 한 눈사람을 보면서 하얀 꿈 가득했지.

한동안 눈 속 하얀 내 어린 나라에 푹 빠졌다가 나왔다.

창밖으로 보이는 아름답고 포근한 하얀 세상.

아직도 하얀 꿈이 있을 것만 같다.

난 오늘 남편의 성화에 져 주기를 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