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산길 / 이성복

cabin1212 2019. 6. 6. 05:43

산길 / 이성복

 

 

 

우리 동네는 십여 동의 고층건물이 늘어선 아파트 단지다. 단지 양쪽 옆으로는 그리 높지 않은 언덕들이 솟아 있다. 그 언덕들은 더 높은 산들과 이어져 우렁찬 산맥을 이루는 것이었을 테지만, 지금은 이리저리 뻗은 차도에 가로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섬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모처럼 울적한 심사가 들 때면 혼자서거나, 아니면 집의 아이들을 데리고 언덕을 올라간다. 돌자갈이 굴러 내리는 가파른 길을 벗어나면 연신 뿡뿡거리는 차 소리와 동네 이이들의 고함 소리는 까마득하게 잊혀진다. 말이 언덕이지 숲속으로 들어서면 첩첩산중이다. 소잔등 같은 능선을 따라 울창한 아카시아 숲속으로 들어서면 길은 문득 끊어진다. 아니다. 모퉁이를 돌면서 길은 다시 이어진다. 그렇게 몇 번이나 못미더워하며, 조용히 놀라며 어느새 나는 산길과 하나가 된다. 나의 살갗은 자욱한 수풀 속에 가린 길바닥처럼 축축하고, 나의 생각은 짙은 아카시아 잎새에 묻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다.

흔히 하는 이야기지만, 나날이 우리가 드는 잠이 어느 날 우리를 찾아올 낯선 죽음이듯이 인적이 드문 산길은 잊혀진 삶의 흔적이다. 아무런 의식도 소망도 없이 살아버린 삶, 나날이 잃어가면서도 속절없이 기다리기만 한 삶,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삶이 거기에 있다. 내가 걷는 길이 나의 것이 아니듯이, 삶은 나의 것이 아니다. 몇 번이나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는 길처럼 삶은 내 앞에 있다. 때로 짙은 안개에 가려 모습을 감추었다가도, ‘, 이젠 끝이 났구나……하고 중얼거리는 순간, 소리 없이 우리 곁에 다가서는 삶! 삶은 우리를 버린 적이 없다.

산길을 걷다보면 나는 축축한 흙바닥에 길게 드러눕고 싶다. 내가 삶에 바치고 싶은 기도의 모습은 아마도 그런 것일 게다. 내 입 속에 고이는 침과 나무들의 잎새에 모이는 수액이 다를 게 무엇인가. 눈짓하는 나무들을 따라 나도 산의 품속으로 내려가고 싶다. 그 속에서 내 어깨쯤에 아물거리는 풀잎들을 쓰다듬어주고 싶다. 그때 산은 아련히 휘파람을 불고 싶을지 모른다.

산길을 가면서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 중의 하나는 원천적으로 우리의 삶은 대화라는 것이다. 사람 하나 빠져나갈까 말까 한 오솔길로부터 고봉준령의 등덜미로 난 척박한 고갯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산길은 인간과 산의 대화다. 산길은 인간이 만든 것도, 산이 만든 것도 아니다. 산은 길을 내고 인간은 그 길을 밟고 간다. 산길은 인간과 산의 대화가 이어진 자리이다. 대화가 끊어지면 길은 끝난다.

대화에는 결론이 없다. 어떤 준엄한 결론이라도, 설사 죽음이라 하더라도, 대화를 멈출 수는 없다. 대화의 속성이 바로 열림이기 때문이다. 대화는 =완성되지 않음으로써만 대화일 수 있다. 미완성은 대화의 상대에로 향한 간단없는 사랑과 외경의 표현이다.

흔히들 우리는 자신의 삶(그것이 과연 우리의 것일까)에 어떤 종류든 확정적인 꼴을 부여하려고 애쓴다. 그러고서야 마음이 편해지고 안도할 수 있다. 하지만, 말이다. 바로 그때 세상과 우리의 개화는 끊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때부터 우리는 세상이 우리에게 내는 길을 벗어나 가파른 낭떠러지나 헤어날 수 없는 구릉을 헤매는 것이 아닐까. 그와는 달리 삶이 우리의 것이라는 완강한 믿음을 포기하는 순간, 놀랍게도 삶은 우리 곁에 다가서는 것이 아닐까. 어느 날 지치고 힘겨운 우리 앞에 고요한 산길이 놓이듯이……

그러므로 가까스로 삼십 분이나 될까? 인적 드문 산길을 걷다가 진흙 묻은 신발로 언덕을 내려오는 순간은 캄캄한 하늘에 박힌 별처럼 몇 안 되는 축복 같은 순간이 된다. 그 순간부터 삶은 내가 강제로 씌운 질곡에서 벗어난다. 귀를 째는 듯한 행상인의 마이크 소리와, 팬티도 걸치지 않고 악을 쓰는 아이들의 울음소리에서 비로소 나는 삶의 선혈한 목소리를 듣기 시작한다. 끊임없이 나의 의식으로부터 지워버리려 애써왔던 그 소리들은 바로 상처받은 삶의 서러운 목소리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과 나의 대화는 산길이 끝나는 자리에서 다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