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석양에 물들다 / 조원석
석양에 물들다 / 조원석
산행을 떠난다. 한 해를 치열하게 살아온 잎사귀들이 생을 마감하고 낙엽 되어 빈손으로 돌아가는 숲으로 가야 무소유란 의미를 느끼지 않을까. 사람은 언젠가 때가 되어 이 세상과 작별하면 대체로 산에 묻힌다.
고운 빛으로 물든 단풍들이 모두가 떠날 채비로 분주하다. 산 중턱의 산사는 가을 향기로 그윽하고 티 없이 맑은 하늘에는 수척한 바람만 맴돈다. 절 한구석에 노란 미소 머금고 외따로 소담스럽게 피어난 들국화 몇 송이와 이따금 고즈넉한 침묵을 깨는 풍경 소리가 힘겹게 사찰을 올라온 나는 반겨준다.
법당 중앙에 좌선 수행하는 스님이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도를 깨우치려 목탁을 치고 있다. 스님 주변에는 불자 몇 사람이 무거운 속세 업보를 가져와 내려놓고 마음에 업까지 비우려고 참선하고 있다. 스님의 청아한 독경 소리가 깊고 맑은 계곡의 물소리 따라 탐욕으로 얼룩진 사바 세상으로 흘러간다. 한편 물질문명에 시달려 영혼이 메마른 사람들이 참 종교의 진리를 찾아 위로와 안식을 얻고자 하나 요즘 세속화된 어떤 종교 모습에서도 어려울 성싶다. 또한 포교나 전도를 해도 먹혀들지 않는다. 구원의 손길마저 찾기가 쉽지 않다. 양심이 마비되어 초점 잃은 인간의 영혼과 육신이 어디에 기대어 해탈하고 거듭날 수 있으랴.
산사에 가을 햇살이 명경 같고 부드럽다. 눈부시게 햇볕 맑은 날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며 살아온 탓일까. 내 인생 젊은 날 초목처럼 푸르렀던 날들이 있었건만 순리에 따라 가을의 주인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자연처럼 이제는 내 삶이 현장에서 한발 물러서 있는 처지다. 열정적으로 치열하게 불탔던 삶을 마감하고 붉디붉은 핏빛으로 떨어지는 단풍잎들은 마지막 생명의 절규인가. 원망 없이 떠나는 낙엽을 보는 마음은 왠지 내 생명의 종말로 느껴진다. 최선을 다해 살아내지 못한 회한들만이 허공을 스치는 가을바람 따라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생의 끝남이 언제가 될지 모르나 남아 있는 삶이 야위어만 간다. 풍성한 물질문명 속에 살아가건만 정신은 왜 이토록 빈곤한가. 훗날 값지게 살지 못한 삶을 생각하며 청춘을 앗아간 세월에 비겁하게 책임을 떠넘겨본다.
가을바람이 추억을 깨운다. 운명의 깊은 사연의 그리움과 아쉬움들이 물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아슴아슴한 추억 속에 단풍이 서리 맞아 낙엽 지듯이 주어진 삶을 다 살지 못하고 애절하게 떠난 두 친구의 시린 아픔이 명치끝에 아리게 사무쳐온다. 불의의 사고로 떠나면서도 형편이 어려워질 가족들의 걱정에 눈을 감지 못하고 떠난 친구를 도와주지 못했다. 서예, 음악 등 예술에 다재다능했던 친구와 좀 더 많은 대화를 하지 못하고 아쉽게 떠나보낸 그들의 얼굴이 떠올라 생인손처럼 아려온다.
벌레 우는 가을은 눈물로 한이 서리는 계절이다. 시효 지난 달력을 세월의 영정인 양 걸어놓고 유한한 생명의 삶을 살면서 지나온 날들을 자성하지 못했다. 이를 반성하기 위해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는 산으로 왔다. 나무들은 좋든지 싫든지 한자리에만 서서 굳건히 살아간다. 불만 없이 옹이가 생기도록 어려움을 참고 살아가지만 때가 되면 모든 걸 내려놓을 줄도 안다. 그리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가을에는 색깔로 보여 준다. 그런 나목의 모습을 보면서 불평만 일삼고 덧없는 일상의 삶에 채우기에만 급급하며 살아온 날들이 후회막급하다. 한낱 나그네인 것을 왜 몰랐을까. 산새 노래마저 잦아든 숲에 잎 떨군 마른가지처럼 내 영적 소망도 말라 공허한 자아를 느낀다. 가을은 정녕 회계의 눈물이 가득하여 마음이 가난해지는 계절인가.
가을에는 슬픔도 향기롭다 하지 않았던가. 윤동주 서시에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시 구절이 있다. 아름답게 피어났던 가을꽃들은 모두가 순백해 보인다. 떠남을 위한 마지막 모습이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나의 삶도 호흡이 멎는 날 순백해 보일 수 있을까. 세상의 끝자락에 서서 뒤돌아보는 심정이다. 산과 숲에는 온통 떠나가고, 죽어가는 것들로 인해 이별을 감당하기에 너무 서럽다. 내가 지금껏 살아온 삶은 허황된 시간에 분주했을 뿐이다. 진실을 추구했던 삶의 행복은 어디 있는지. 반복되는 계절의 후회건만 나 지신에 대한 질문에 정답을 말하지 못하고 되풀이 하는 부질없는 또 한해의 삶이었다.
어둠이 일찍 물드는 산에 붉은 노을 꽃이 피기 시작한다. 슬픔과 외로움이 번지기 전에 하산해야 한다. 남은 인생의 시간은 왜 이리도 산 그림자처럼 금세 날이 저물어 가는지…. 빈 영혼으로 산을 내려오는 나에게 직립으로 선 나목들이 말했다. 산다는 것은 바람 같은 것이라고. 내려놓고 가라고 한다. 청명한 하늘에는 뉘우치지 못한 조각난 삶에 허무들이 새털구름으로 깔려 흘러간다.
산을 내려가면 인생의 연말 정산표를 작성해야 할 터인데 부가가치 없는 건조한 삶이었으니 무엇을 기록하랴. 적막한 산을 붉게 물들이며 뒤 따라와 이내 어둠에 묻힐 석양을 바라보며 남은 인생만은 초라하지 않게 장엄하게 물들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