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다채색의 만남 / 허표영
다채색의 만남 / 허표영
귀로 듣는 만남이 있다. 이 청각을 통한 대화는 주로 전화로 이루어진다.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하면 작은 긴장이 온다. 신경을 달팽이관에다 모으면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아진다. 저쪽에서 먼저 호들갑스럽게 자신을 밝히는 경우도 있고, 은근히 목소리만으로도 자기를 알아주었으면 하고 능청을 부리는 상대방도 있다. 후자가 나는 더 피곤하다. 길치, 음치에다 얼른 목소리를 잘 구별하지 못하는 전파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런 만남은 마음 편한 점도 있다. 상대방의 시선이 어디에 있든, 어떤 표정을 짓든 신경을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선을 통해 만나면서 약간의 딴 짓을 해도 상대방한테 결례가 되지 않는 좋은 점도 있다.
눈으로 보는 만남이 있다. 목례가 약간 곁들어지기도 한다. 골목 안에서, 또는 전철 속에서 자주 만나는 사람에게 눈으로 인사를 보낸다. 말을 건네기에는 아직 조심스러울 때 이 눈길을 통한 대화가 이루어진다. 잠깐 동안의 순간에 지나지 않는 시간이지만 많은 것이 오간다. 기약 없는 이별을 오래 한 후, 처음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먼저 눈으로 감정을 표현한다. 특히 사랑이라는 감정이 한쪽 편이든 양쪽 다이든 알고 있다면 이 만남은 소리 없는 대화가 전신으로 퍼진다. 심장박동을 울리는 아련한 파동이 눈길에 실려 흘러가기도 한다.
코를 통한 만남도 있다. 이 경우는 주로 사람보다는 자연이나 동물을 그 대상으로 한다. 늘 다니는 산책길의 솔향기는 멀리서부터 나무들과 나와의 만남을 예고한다. 청량한 강 냄새도 좋고, 바다의 비릿한 냄새도 싫지가 않다. 멀리서부터 그 독특한 향기를 보내며 안부를 전한다. 이 만남은 주로 나의 일방적인 감정 표출로 이루어지고 끝나는 경우가 많다. 천리향이나 은목서의 향기만 그윽한 게 아니라, 매화나 배꽃, 감꽃의 향기도 은근하면서 속삭이는 맛이 있다. 난향도 그러하다. 특히 자두나무의 향기를 만나보았는가. 외국에서 들어온 여러 종류의 껌 향기나 온갖 허브의 향기에 밑지지 않는다. 황홀하고 현혹적이다.
입을 통한 만남은 여러 가지로 주의할 점이 따른다. 음성의 고저, 장단, 감탄사의 적절한 배합 등이 상대방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잘못 내뱉은 말은 큰 화가 되어 돌아올 수 있다. 이 만남은 종종 종합적인 표현을 곁들이는 경우가 많아 눈짓, 손짓, 나아가 몸짓까지 동원되기도 한다. 스킨십이 따르기도 해 그 효과를 극대화시키기도 한다. 입술의 만남으로 발전하는 전단계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몸 전체를 통한 만남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영상을 통한 만남도 요즘은 일반화되었다. 카메라 휴대폰은 대중화되어 있고, 화상회의, 화상채팅도 벌써 우리 앞으로 다가와 있다. 그 영역을 대기업들의 회의나 학술세미나 등 다방면으로 확장하고 있다. E-Mail이라는 전파는 손으로 쓰는 편지를 밀쳐버렸다. 26살이라는 나이차를 극복하고 퇴계 선생과 고봉 선생 사이에 13년간이나 이어져왔던 글을 통한 교류는 이제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책을 통한 만남이 있다. 이것은 단순한 눈을 통한 만남과는 다르다. 학문과 예술, 철학, 종교 등 모든 것을 교류하며 만나는 것이다. 서로 얼굴을 보지 않지만 많은 부분을 공감하면서 깊이 있는 대면을 하게 된다. 영상을 통한 대면보다는 훨씬 깊이 있는 만남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속 깊은 나눔의 자리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이 만남은 어딘가 아쉬움이 따른다. 상대방의 실체를 느낄 수 없고, 호흡을 나눌 수 없는 흑백의 만남이다.
그런데 뜻밖에 갖게 되는 의미 있는 만남도 있다. 단색이나 흑백이 아닌 서로간의 호흡이 통하고 감정이 교류하는 다채색의 만남이다. 책에서 글로만 읽고 감명 받던 작가 J를 만난 것이 이런 경우이다.
그녀는 젊은 나이로 암 선고를 받고, 절망과 나락의 투병생활을 하며 그 눈물겨운 과정을 10여 회에 나누어 병상에세이를 연재한 수필가이다. 문학세미나에서 처음으로 그녀를 보게 되었다.
사회를 맡고 있는 그녀는 예상외로 건강한 모습이었다. 주님! 살려주세요. 그 한마디 말을 촌각의 틈도 없이 계속하며, 허점을 보이면 그 순간에 죽을 것 같았다는 절박한 심정을 피력하던 허약한 모습이 아니었다.
이 모임에 참석하느냐를 놓고 내내 망설였다던 나는 권위 있는 작가들의 작품세계와 창작태도를 들으면서 차츰 마음의 안정을 얻어가고 있었다.
만찬이 마무리되어가자, 여흥시간이 이어졌다. 소리의 고장답게 남원의 소공연장을 동편제와 가야금산조, 판소리 등이 분위기를 고조 시키며 울려 퍼졌다. 넋을 잃고 감상하고 있는데 누군가 곁에 다가와 앉았다.
“깜짝 놀랐지요?” 돌아보니 그녀였다. J는 빈자리를 찾다가 제일 뒷좌석의 내 곁에까지 오게 된 모양이었다.
GOK(God only Know)라고 쓰인 진료기록의 차트를 몰래 볼 때와 ‘오늘 밤을 못 넘길 수도 있어’라는 의사의 말을 들었을 때의 절망감을 공감하며 다음 호에는 그녀의 부고장이 함께 실지나 않을까 하는 조바심을 느끼게 했던 그녀가 곁에서 웃고 있는 것이다. 특히 자기 자리에 대신 들어올 여자에게 남편과 아이들을 사랑해달라며 스스로 흔적을 지우는 내용은 가슴을 뭉클하게 했었다.
그녀의 글을 잘 읽었다고 소감을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그녀는 보기보다 다감했다. 처음 보는 내게 작품을 쓸 때의 심경과 표현의 수위 등에 관해서 비교적 소상하게 설명 해주었다. 특히 종교적인 부분의 연결이 힘들었다고 말했다. 죽음 직전까지 다가간 절망의 순간과 남편과 자식들을 생각하는 애틋한 연민의 심정, 소생할 때의 감동과 기도의 순간 등을 실감하게 표현했던 그녀는 역시 감성이 풍부한 여자였다.
짧은 만남의 시간이었지만 나는 모임의 모든 성과를 나 혼자 다 얻은 기분이었다. 책에서만 만나던 흑백의 만남이 아니라, 그녀의 호흡과 체온과 감정을 함께 접한 색깔 있는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