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꽃샘추위 / 김애자
꽃샘추위 / 김애자
봄은 아프게 온다. 후원에 청매와 산다화 가지에 맺힌 꽃망울이 하루가 다르게 부풀고 있다. 열흘 전까지 산간의 기온은 아침이면 영하권이었다. 그랬던 날씨가 일주일째 20도 안팎을 오르내리고 있다. 갑작스러운 일기의 변화가 무슨 조짐인가 싶어 걱정스럽다. 지난해에도 3월 초의 날씨가 4월 하순을 방불케 하여 과수원에 유실수가 개화를 서둘렀으나 하룻밤 사이에 날씨는 언제 그랬었냐는 듯이 변덕을 부렸다. 희뿌연 황사바람이 온 산하를 뒤덮었고 수은주는 영하로 곤두박질을 쳤다.
꽃샘추위에게 오지게 변을 당한 매화나무는 얼어 울혈 든 꽃잎을 다독이며 필생의 힘을 다하여 씨방을 갈무리하였지만 수확은 형편없었다. 과수원을 경영하는 농부들도 사과와 배나무에 맺힌 꽃망울이 얼었다가 반 이상 떨어져 원예조합에서 가져다 쓴 퇴비와 농약값을 반도 건지지 못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꽃샘추위는 인간사에도 자주 끼어든다. 시를 쓰는 K는 10년째 꽃샘추위에 시달리고 있다. 간암으로 수차례 항암치료를 받는 고통을 견디었으나 지금은 폐로 전이되어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다. 오늘도 전화기를 들었다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번호를 누르지 못하고 수화기를 내려놓고 말았다. 지금 그가 어떤 심경으로 고통을 견디고 있을까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어서이다.
나도 그런 시절을 겪었다. 10대 후반에 걸려든 결핵은 얘기치 못한 꽃샘추위였다. 결혼 적령기에 들어선 오빠들 혼삿길 막힌다고 어머니는 딸의 병을 봉인된 비밀문서 다루듯 했다. 결국 국립의료기관인 메디컬 센터에서 처방해준 약 보따리를 싸들고 산골암자로 들어갔다. 내가 원해서 떠난 길이었다. 가방을 들고 암자로 가던 때가 4월 초였다.
산세는 수려했다. 크고 작고, 높고 낮은 산과 골짜기들이 서로를 품거나 어깨를 겨루고 있는 풍경 속에서 진달래꽃이 막 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낯선 암자의 독방은 감옥이었다. 밤이면 물소리가 산곡을 흔들었고, 솔바람소리는 첼로의 저음으로 잠을 앗아갔다. 세상 끝으로 밀려난 내게 밤의 정적은 두려움 자체였다. 어디든 기댈 곳만 있으면 기대어 울고 싶도록 막막했던 그때는 잠자리에 들 적마다 다시는 눈을 뜨지 않기를 원했다. 하지만 인간의 목숨이란 원하는 대로 쉽게 죽어지는 게 아니었다. 밤이 지나면 어김없이 아침을 맞아야만 했고, 죽음이 몸 안에서 자라고 있는 것 같은 불안감에 앙다문 입술 사이로 울음이 삐져나오곤 했다.
불안하고 지루한 시간을 견디어내기 위해 가방 속에 들어 있는 책을 벗하였다. 그중에서도 헤르만 헷세의 「싯다르타」는 표지가 닳도록 읽고 또 읽었다. 처음엔 내용이 너무 철학적으로 흐르는 것 같았으나 문장에 이끌려 다섯 번을 읽고 나니 싯다르타가 고오빈다에게 알려주던 구도의 참뜻은 내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으면서 불안감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사람은 자기가 이루고 싶은 것만을 목표로 삼으면 그것이 구도라 할지라도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편견에 사로잡힌다는 충고는 놀라운 깨우침이었다. 목표는 집착에 가까워 자유를 구속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나서는 행위는 열려 있는 자유로운 상태라는 가르침을 통해 나는 혼자서 견디는 법을 익힐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네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이 나의 미래를 위해 열려 있다는 인식의 전환은 새로운 빛의 출구였다.
나는 매달 집에서 보내주는 하숙비와 약과 책을 받아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가난한 암자에선 내가 보태는 하숙비가 보릿고개를 넘어가는 데 크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또 아홉 살 난 동자승을 앞세우고 주변에 있는 산과 계곡을 세상물정 모르고 돌아치던 기억은 지금도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시인 K는 내가 겪었던 꽃샘추위와는 성격이 다르다. 그는 가정을 이루었고 두 딸은 둔 가장이란 책임감을 걸머지고 하루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끔찍한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육체의 고통과 죽음 앞에 이르면 자신이 철저하게 개체로 독립된 존재임을 알게 된다. 수십 년간 살을 섞어가며 살아온 부부도 그렇거니와 피를 나눈 부모자식도 개입할 수 없는 것이 육체의 고통이고 죽음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 놓인 k가 안쓰러워 새벽마다 나의 하느님께 기도를 올린다. 10년 동안 꽃샘추위로 문신을 떴으니 이제는 고통에서 해방시켜 달라는 청원을 넣는 것이다. 그는 아직 젊고, 시적 재능이 아까워 기도의 꽃을 바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