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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아주심기 / 윤승원

cabin1212 2020. 4. 22. 06:06

아주심기 / 윤승원

 

 

 

정식한 양파모종이 비실비실하다. 비가 온다는 예보에 서둘러 옮겨 심었는데 하늘은 잔뜩 흐리기만 했다. 물을 주어도 쉽사리 일어설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아직 추위가 시작 되지 않았지만 어린 양파가 과연 제대로 곧추설지 걱정이 앞선다. 저토록 가녀린 것이 겨울을 견디고 주먹만 한 양파가 된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온실에서 키운 모종을 밭으로 내어다 심는 것을 아주심기라 한다. 불과 몇 해 전만해도 일반 농가에서는 집에서 파종을 했다. 본 잎이 두 장 나올 때까지 오전 오후 두 차례 물을 주어 기른 후 잎이 넉 장 정도 나왔을 때 아주심기를 한다. 아직 쪽파처럼 가늘기만 한 둥근 양파 모양새는 갖추지 못했다. 거름을 뿌려둔 밭에 멀칭 비닐을 설치하고 모종삽으로 비닐을 뚫어 얕게 심는다. 어머니가 하는 일에 잠시 거드는 정도인데도 허리가 묵직해진다.

나는 아직 제대로 뿌릴 내리지 못한 것 같다. 강산이 몇 번이나 바뀐 결혼생활이지만 시댁 경조사에 가면 여전히 어색하기만 하다. 다들 잘 어울려 정담을 나누는데 나만 친지들이 낯설고 부담스러워 긴장을 한다. 그러다 집에 돌아오면 파김치가 된다. 되도록 남편 혼자 보내고 가지 않으려 피한 적도 있다. 자주 집안 행사에 참석하지 않은 탓이기도 하겠지만 낯가림이 심한 이유라고 여겼다.

어릴 적 어머니는 내게 자갈밭에 혼자 둬도 거뜬히 살아낼 아이라고 했다. 그랬던 어머니가 여든 나이가 되고선 도리어 나를 어린 아이처럼 대한다. 내게 걸었던 기대와 달리 아등바등 살아가는 모습이 안쓰러웠던 것일까. 이미 다 성장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살고 있는데 어린 모종 취급을 한다.

아주심기 하는 가을작물에는 배추와 무, 양파가 대표적이다. 농사는 자연의 도움도 크지만 적기에 파종을 하고 옮겨 심고 관리하는 것이 여간 까다롭지 않다. 오죽하면 농작물은 주인 발걸음 소릴 듣고 자란다 할까. 아파트 베란다에서 화초 몇 키우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시골에서 나고 자랐다고 섣불리 도전했다간 실패하기 십상이다. 어릴 때는 농사일 거드는 일이 죽을 만큼 싫더니만 요즘 들어선 시골생활이 그리워지는 건 왜일까.

두 딸아이의 아주심기를 마치고 나면 전원생활을 하고 싶다. 뿌린 대로 싹을 틔우고 정성들인 만큼 수확하는 일이 도시생활보다 훨씬 보람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서로 경쟁하며 시기하는 도시는 너무 메마르고 살벌하다. 무엇을 하든 승부욕이 앞서고 지고나면 패배감에 분노하는 삶에 염증이 인다. 지금까지는 젊음으로 버텼지만 더 나이가 들면 서로를 할퀴고 아귀다툼하는 군상들에 배겨 날 자신이 없다.

큰 아이는 노르웨이에서 공부를 마치고 그곳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든든히 뿌리 내리기까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굳건히 견디고 해내리라 믿는다. 농부는 농작물을 옮겨 심어놓고 기도한다. 건강하게 자라고 튼실하게 영글어달라고. 그와 마찬가지로 나도 틈만 나면 기도한다. 내 품에서 떠나 머나먼 곳에 가 있지만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 듯 그곳 생활이나 문화에 적응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화교인들은 세계 각국에 퍼져 있다. 그들은 자주성을 잃지 않고 어느 곳에서든 잘 정착하고 성공신화를 이뤄낸다. 우리나라에도 요즘 들어 다문화가정이 많다. 길을 가다보면 외국인들과 자주 만나게 된다. 큰아이는 자신도 노르웨이선 이방인라고 외국인들을 만나거든 친절히 대해주라고 당부한다. 우리에겐 낯선 타인이지만 그들 또한 혼신의 힘을 다해 아주심기 중이리라.

나이가 들면서 각자의 삶에 따라 직종이 바뀌기도 한다. 젊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나이 들어서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언론사 편집일은 눈을 너무 혹사시키는가 하면 늘 컴퓨터로 작업을 하니 오십견이 왔다. 건강을 해치며 일하고 싶지가 않았다. 아주심기에 실패한 셈이다. 이직을 하고 만난 가게 주인은 사람을 믿지 못하고 의심이 많았다. 직원들이 제대로 정붙이고 일을 할 수 없게 히스테리성 닦달을 했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채소들 또한 온전히 뿌리 내리기 위해선 기후나 토양 등 주변 여건이 일조를 해야겠지만 주인의 따뜻한 관심이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직장은 한 곳에 뿌리내리기가 정말 힘들다. 누구나 어디서나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다. 헬프라는 영화가 있다. 인종차별에도 불구하고 백인 우월주의자들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고 멸시를 받지만 자기들이 맡은 육아나 가사도우미 일에 최선을 다한다. 자식들을 공부시키고 병든 가족을 위한 인내심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가 중년의 나이에 또 다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어느 시인의 시처럼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있을까. 사 년 차 일하는 동안 굽이굽이 고비가 있었고 인내를 요구했다. 그나마 제대로 뿌릴 내릴 수 있을 것 같아 안도감이 든다.

금방 파종을 한 양파처럼 비칠댄 적이 있다. 때로는 불안하고 긴장 속에서 안절부절못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내 인생은 나의 몫.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 가녀리지만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튼실한 결실로 거듭나는 양파처럼. 온전한 아주심기! 그것을 위해 오늘도 열심히 세상으로 뿌리를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