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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 / 손훈영

cabin1212 2020. 4. 29. 06:18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 / 손훈영

 

 

 

세 시다. 오후 세 시는 무엇을 하기에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은 시간이다. 체념을 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고, 헛된 희망을 가지기에는 어둠이 가까이 다가와 있다.

병원 근처 커피숍에 앉았다. 성당과 인접한 그 커피숍은 날이 좋아 실내를 오픈해 놓았다. 성당 마당 한중간에 서 있는 십자고상이 햇빛을 받아 검게 빛나고 있다. 하늘에는 부드러운 새털구름이 떠다니고 지상의 나무들은 신기루처럼 일렁인다. 많은 것들과 결별하고 홀로 이곳에 앉아 있는 느낌이다. 텅 빈 이대로 내 존재가 정지되는 것 같다.

다섯 시면 결과를 알 수 있다. 투병생활의 어려운 점은 몸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의 긴장을 견뎌야 하는 일이다. 손발이 굳어지는 듯한 긴장을 견디어 고스란히 앉아 있기가 힘들다. 무언가 도움이 필요하다. 힘들게 기다리고 있는 자신에게 스스로 용기를 내라고 즐거움을 베풀어준다.

누군가가 말했다. 좋아하는 음식을, 좋아하는 그릇에 담아,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먹는 것보다 더 완전한 쾌락은 없다고. 이 말을 한 누군가는 쾌락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칫 화석화되어 버리려는 기다림의 시간을 작은 쾌락으로 채워본다. 불안으로 굳어가는 자신에게 향기로운 커피와 달콤한 치즈케이크를 먹인다. 재미있는 책도 읽힌다.

일주일 전에 검사를 했다. 항암치료 후 일 년 만에 하는 전신 검사였다. 대부분 일 년 안에 재발이나 전이가 되기 때문에 치료 후 일 년 만에 하는 검사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인지 검사하는 내내 긴장되었다.

펫 시티촬영과 유방 초음파를 했다. 수술한 유방이 제자리를 잡지 못했는지 촬영 때 많이 아팠다. 바쁜 의료진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들의 사무적이고 무성의한 손놀림에 마음이 씁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한마디 말도 없이 바쁘게 기구를 작동하던 의사가 나가버린 뒤 혼자서 칙칙한 젤을 닦아 낼 때, 젤의 차가운 느낌만큼이나 내 마음도 착잡해졌다. 젤 냄새는 검사가 끝난 뒤까지 온몸을 따라왔다. 그것은 우울과 막막함의 냄새이며 예리한 아픔을 불러오는 냄새였다. 어쩔 수 없이 죽음을 연상케 하는 냄새였다.

검사 전 몇 차례의 준비과정을 기다리며 검사 받을 몇 사람과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주황색 환자복을 입은 우리들은 그 누구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두컴컴한 주황색 정물이 바로 나였다. 두려움에 포박당한 막막한 심경으로 그저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는데 로비 쪽에서 간호사들의 탄력 있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영원히 병하고는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의 웃음소리였다.

내 불안과 어둠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이 저기 저렇게 웃고 있구나, 심판을 기다리는 어두운 자는 문득 그 웃음이 서러웠다. 순간 나와 그네들 사이로 육중한 철제문이 내려졌다. 그들은 그들의 건강을 살 것이고 다만 나는 나의 병을 살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들과는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접점이 없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세상에 진 빛을 다 갚은 듯한 생각이 들게 했다. 홀로 나만의 밤길을 걸어가는 기분이 되게 했다.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는 커피향이 지금의 시간을 잊게 한다. 내 인생의 시간은 몇 시인가. 아마도 시곗바늘은 시작보다는 마침에 더 가까울 것이다. 무엇을 했던가. 아무것도 이룬 것 없는 시난고난의 세월이었다. 자신을 지키기 못해 아무도 지킬 수 없었던 나날이었다. 정오의 햇살처럼 머리 위에서 빛나던 생의 중심을 가는 줄도 모르고 흘려보낸 자의 오후는 춥고 쓸쓸하다.

해무가 걷히고 도달해야 할 섬이 보이는데 치명적 고장으로 배가 좌초하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출발선에 선 달리기 선수가 문득 다리뼈에 금이 갔다는 것을 느끼는 마음이 이런 것일까. 이제 겨우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은데 기다렸다는 듯 병의 장막이 눈앞을 가리다니. 인생이란 이런 역설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일 뿐이란 말인가.

어차피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인생이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러니 새삼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시간이라는 것이 무에 그리 절망스러울 것인가. 한 치 아니라 멀리 내다봤다 하더라도 올 것은 오고 일어난 일은 일어났을 것이다. 마지막 기도인 양 마음을 다해 두 손을 모은다. 해가 저물기 직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처럼 내 남은 생에도 폭죽 같은 환희를 한 번만 더 허락해 달라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빌어본다.

다섯 시가 다 되어간다. 이미 결과는 나와 있을 것이다. 외과 진료실 컴퓨터에 조용히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홀로 고요히 누워 있을 것이다. 결과들이여, 부디 나에게 자비를 베풀라. 일상이 사라지고 지옥문이 열리는 일이 다시 일어나기 않게 하라.

다섯 시다. 진료실 대기의자에 앉아 있다. 다음다음이 내 차례다. 입안이 마르고 손이 차갑게 굳어온다. 지금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엾은 존재다. 먼 미래는 고사하고 바로 몇 분 뒤 내 운명조차 모른다.

조금 있으면 무슨 일이 나에게 일어날 것인가. 안 일어날 것인가. 그 결과가 어떤 것이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부정할 수도 긍정할 수도 없는 불가항력의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얇은 문 하나가 나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게 놓아줄 수밖에 없다니. 이토록이나 무기력하게 기다려야 하다니. 온몸을 조이는 긴장이 자제력을 넘어 몸 밖으로 쏟아져 나올 것만 같다.

깨끗합니다.”

괜찮습니다.’보다 더 기분 좋은 말이다. 초음파도 펫 시티도 모두 깨끗하다 한다. 이 말은 내 몸 전체를 통 털어 단 한 줌의 암세포도 없다는 말이다. 의사를 통해 듣는 이 말 한마디로 지옥이 물러가고 일상이 돌아온다. 자칫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릴 수도 있었을 아침 산책과 저녁 식탁이 펼쳐진다. 글쓰기와 영화보기가 다시 허락된다. ‘깨끗하다는 이 간단한 말 한마디가 걱정 없이 살아도 될 일 년을 선사한다.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의 응축된 고통을 지불하고 얻은 나의 일 년. 그 일 년이 내 눈앞에서 전대미문의 황홀함으로 빛을 발한다. 이제 열심히 살 일만 남은 그 일 년을 향하여 기쁜 걸음을 옮긴다. 오후의 금빛 노을이 눈부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