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상동 은행나무 / 은종일
상동 은행나무 / 은종일
팔다리가 또 잘려나갔다. 두 번째 이주다. 새살을 키워가며 가까스로 사경을 벗어날 즈음에 또 끌려왔다. 엎친데 겹친 고통이었다. 게다가 소음과 매연과 먼지로 귀, 눈, 코, 목의 통증까지 보탰다. 사방으로, 그것도 교대로 미끄러져가는 차량의 무리 때문에 눈이 팽팽 돌고 정신을 차릴 수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지하철공사를 한다며 밤낮으로 폭약을 터트려서 노루잠마저 설쳤다.
사 년여가 지나자 지하철공사가 끝나고 못 살 것만 같았던 이곳에서의 삶도 서서히 익숙해져갔다. 여생을 저당잡고 살아보자며 무진 애를 썼다. 지금 되돌아보면 깜깜한 죽음의 터널을 지나온 것만 같다. 마천루들이 중천을 찌를 듯이 키 재기를 하는 도심의 십자 대로에서 새로운 21세기 세상을 살고 있다.
내 생일은 정확하지 않다. 들어온 바로는 조카의 왕위를 뺏고 죽이고, 충신들마저 참살한 그 못된 임금 세조가 죽은 해라고 했다. 보물 2호로 중앙박물관에 누어있는 보신각종이 태어난 그해라고도 했다. 그해가 세조 14년이고 보면 내 나이는 올해로 오백마흔일곱 살인 셈이다.
나를 두고 그냥 노거수(老巨樹)라고 부르고들 있지만 표석에다 떡하니 새겨놓은 이름은 ‘상동 은행나무’이다. 내가 본시 살았던 상동에선 ‘내 발밑에 물을 뿌려주는 사람에게는 불끈불끈 힘이 생긴다.’는 전설의 주인공이었다. 그래서 내가 살았던 곳이 은행나무마을이다.
나는 은행나무마을에서 오백여 년을 묵새기고 살았다. 두 손 비비며 기도하는 민초들의 기원에서 켜켜이 밴 소박한 소망도 헤아렸다. 수십 대(代)를 이어오면서 겨끔내기로 모여들어 나누는 객쩍은 이야기에서, 때론 담뱃대를 바닥 돌에 두드리며 가래려는 시시비비에서 세상사를 읽었다. 구순하게 살아가는 민초들의 애환에서부터 당파싸움에 이골이 난 조정의 난맥상, 게다가 나라의 변고와 전란의 참상들까지 앉은뱅이 용쓰듯 그렇게 마음을 졸이면서였다. 울가망하게 지내온 세월이 그저 아슴아슴하기만 하다.
분단 후 남북당국이 처음으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란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여 감성적인 통일론이 비등했던 그해 나에게도 경사가 있었다. 대구시로부터 ‘지정보호수’라는 품계를 받은 것이다. 어린학생들이 단체로 찾아왔다. 세워놓은 입간판을 보고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번 더 봐주고 지나갔다. 관심을 받는다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이라는 걸 그때서야 실감하였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품계를 받고 몇 년이 지나서부터 괴상한 소문이 들렸다. 그건 동서로 넓은 길을 새로 내는데 내가 방해물이요, 걸림돌이라는 것이다. 그때부터 수호신이 아니라 네 탓이라며 눈을 부라리고 손가락질을 해댔다. 대를 이은 긴긴 세월의 연(緣)을 매몰차게 끊으려는 세상인심에 슬펐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그나마 뜻을 모아 새로운 삶터를 마련하려는 입소문 때문에 시나브로 부아를 삭이며 억지로라도 마뜩해 하려고 애썼다.
어느 날 포크 레인과 불도저가 금속성 굉음을 내며 들이닥쳤고 수십 명의 인부들이 발밑에 달라붙었다. 팔다리가 잘리고 새끼줄, 고무줄에 묶여 처참한 몰골로 인근 정화여자중고등학교의 뜰로 옮겨졌다. 코뚜레를 잡힌 듯 낯선 곳에 끌려와서 잘린 상처를 치유하며 재생의 뿌리를 내리느라 죽을 고생을 하였다. 그래도 어린 소녀들이 보내는 고운 눈길이 위로이자 활력소가 되어 낯선 곳에서의 삶을 익혀가고 있었다.
그런데 비극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학교가 도심 밖으로 옮겨지고, 나의 삶터에는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었다. 넌더리나는 두 번째 강제 이주를 당하였다.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이 아니라 공해에 잘 버틴다며 내몬 곳이 여기 범어네거리이다.
피동적이고 패배주의적인 유전자의 대물림으로 원초적인 생존수단인 의식주의 해결에 몸과 마음이 묶여있던 그들이 나를 두 번씩이나 내몰았다. 그것도 넓은 도로를 뚫고, 고급 고층아파트를 짓는다면서. 말로만 들어봤던 ‘한강의 기적’이란 압축성장의 발전상을 여기에 와서야 보았다. ‘다이내믹 코리아’란 유무형의 힘을 체감할 수 있었다.
달라진 삶의 체제나 방식들에서 아연실색하였고, 푼더분하고 진번질한 민초들의 행색에 놀랐다. 한일월드컵 거리응원 때는 붉은 악마로 명명한 오만 명이 넘는 응원의 함성에 화석 같이 굳은 몸을 사시나무 떨듯 전율하였다. 그것은 내가 오백여 년 만에 처음 본 풍요와 역동적인 힘과 자긍심으로 뭉쳐진 하나의 환시 같은 기적이었다.
본시 오백여 년을 지탱하던 몸체는 죽어 화석처럼 굳었고, 뿌리에서 일어난 새로운 다섯줄기가 노거수의 면모를 지키고 있다. 나를 바라보면서, 지역민과 애환을 함께한 소중한 문화유산이자 생물자원이란 고정관념보다 신구(新舊)의 조화, 생(生)과 사(死)의 공존이라는 인간의 삶으로의 공명을 더욱 소망해 본다. 영광은 고통 속에 감추어진 보석이란 것을 온몸으로 드러내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