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배웅 / 안량제
배웅 / 안량제
생전 처음 하는 배웅이라 마음이 설렌다. 배웅이란 아무에게나 선뜻 하는 일이 아니다. 웃어른이나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가 방문하고 돌아갈 때 전송하는 예의다. 문 밖까지 잠시 나와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하는 것이 상례다.
가까운 친지나 친구기 먼 길 떠날 때 바쁜 시간 쪼개서 기차역이나 버스정류장까지 전송하는 일이 흔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설레는 마음으로 서둘러 버스 터미널로 나갔다. 죄 짓는 일도 아닌데 가슴이 뛰고 주위에 신경까지 쓰였다.
그가 시골에 사는 언니가 보고 싶어 가는 시골길이다. 차를 세 번갈아 타야 하는 먼 길인데도 동행 없이 외로운 여행길이 쓸쓸하고 외로울 거라는 생각을 하니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언니가 보고파 하루를 꼬박 가야하는 먼 길을 마다 않고 한사코 가고파 하는 것은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벗어나고픈 심상의 행보인 것 같다.
내가 그를 알고 산(山) 친구가 된지도 한참 됐건만 먼 길 가고 올 때 단 한 번도 배웅을 하거나 마중한 적이 없었기에 오늘 큰마음 먹고 인심 한번 쓰고자 용기를 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산에서였다. 그 날은 전과 다르게 단짝 친구와 둘이서만 산행을 했다. 산행 중에 친구가 하는 말이 오늘 약속이 있으니 조금 일찍 하산하자고 했다. 모처럼의 친구 제의라 토를 달지 않고 순순히 따랐다.
친구는 약속된 장소로 간다며 앞장섰다. 영문도 모르고 하자는 대로 따랐다. 약속한 사람은 여성으로 산행에서 금방 하산한 듯싶었다. 등산화에 배낭을 메고 있었기에 친구가 산 동무를 하나 더 찾았나 생각했다.
나는 친구와 그 분은 아는 사이로만 알았다. 서로 인사도 하기 전이었다. 우선 땀부터 씻고, 지친 다리도 좀 풀고 자초지종 이야기는 조용한 데서 하자고 했다. 그리고는 산 아래 있는 온천탕으로 앞장 서 갔다.
탕 안에서 친구와 나는 마음을 털어 놓고 얘기를 했다. 결론적으로 조금 전 만난 그 분과 나를 친구로 만나도록 주선하겠다는 것이었다. 친구의 선의는 참으로 고마웠지만 나 자신의 처지는 난감했다. 나는 즉답을 피하면서 생각해보자는 뜻을 밝혔으나 미련을 버리지는 못하고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자 친구는, 내 소임은 여기까지이니 이후는 잘 생각해 알아서 하라며 떠났다. 기왕이면 우리 세 사람 한 자리에서 스스럼없는 이야기로 이어졌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와는 그렇게 어설픈 인연이 되어 이따금 산행을 같이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앞으로 잘 되어 갈지 난관이 있을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알고 보니 그도 외롭고 나도 외로운 처지다. 아파봐야 아픈 사람 사정을 안다. 배고플 때 가장 절실한 것은 먹을거리다. 그와 나는 외로울 때 동무가 되었다.
자녀가 여럿인들 뭣 하겠나, 가까이 있는 이웃이나 친구가 멀리 있는 자식 보다 못할 바 없지 않은가. 그가 갈 길이 멀기도 하지만 직행 교통이 없으니 일찍 서둘러야 해지기 전에 언니 집에 들아 갈 수 있다며 서두르는 모습이다.
어머니 뵈러 친정 가는 길도 아니다. 많지 않은 형제자매이기에 나이 들어감에 더욱 혈육의 정이 그리웠으리라는 잠작도 된다. 오랜만에 혈육들을 만나 회포도 풀면서 그간에 쌓였던 외로움도 털어보려던 마음이 한꺼번에 쏟아지니 서두르는 것이 이해된다.
이런 때에 한 번쯤 배웅하는 것도 도리고, 우정의 표현이요 여정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지 않을까 싶은 엉뚱한 핑계로 배웅을 생각했다. 별것 아니지만 버스표 한 장 손에 쥐어주고 환한 모습으로 차에 오르면 뒷모습 보면서 손 한번 흔들어주고 돌아서는 나도 마음이 가벼우리라 생각했다.
서둘러서 버스표 한 장 사서 손에 쥐고 친구가 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친구는 작은 여행가방 하나 끌고 나타났다. 저만치 올 땐 지친 듯 피곤해보이던 친구는 나와 눈이 마주 치는 순간 표정이 환해지면서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나도 조금은 멋쩍은 표정이었겠지만 반가웠다. 전날 내가 배웅을 가겠노라 한 말을 농담으로 알고 믿지 않았는데 현실이 되고 보니 놀랄 만도 했다. 몇 시에 출발하는 차냐고 묻기는 했지만 배웅하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았기에 뜻밖이라는 표정인 듯 했다.
오랜만에 자매가 만나는 것이기에 기쁨에 들뜬 기색이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그런 표정이 아니었다. 어딘가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 같았다.
짧아도 며칠은 지나야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얼굴 마주 하고 함께 산을 오를 때는 예사롭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한참 동안 같이 산행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왠지 손에 쥐고 있던 무엇을 놓친 것 같은 허전한 생각이 들었다. 길어야 며칠이건만 그래도 섭섭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점심시간이 조금은 이르지만 구내 간이 분식집으로 갔다. 김밥에 우동국물로 간단히 요기를 하자고 권했다. 지금 출발하면 중간에 밥 먹을 곳도 마땅찮으니 간단히 때우고 언니네 가서 잘 먹으라고 체면치례를 했다.
아쉽지만 정해진 시각은 빨리 다가왔다. 차표 한 장 달랑 손에 쥐어주면서 잘 다녀오라는 한마디 말로 작별 인사를 했다. 차에 오르면서 연신 눈을 떼지 못하는 그의 모습이 왠지 너무 측은해 보였다. 연신 손짓을 하며 나보고 먼저 가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는 자매와 친지를 만날 꿈을 안았겠지만 나는 돌아서는 발길이 천근이나 되는 듯 했다. 보내는 사람과 떠나는 사람의 마음이 같을지 모르겠다. 지하철 승강장으로 내려가는 계단 길 하나하나를 내려서는 기분이 참으로 이상했다. 서로가 아픈데 찾아서 다독이고 가려운 데를 긁어 줄 수 있는 친구가 되어서 나쁠 것 없다. 무쇠 솥에 물 끓이듯 천천히 데우고 느긋이 식히면 그 물은 따스함이 오래갈 것이다.
오늘 내가 쥐어준 차표 한 장으로 언니네 집까지 가벼운 마음으로 안착했을 것으로 믿는다. 차표란 종이 한 장의 배웅이, 그와 나 사이 우정의 끈을 동아줄같이 탄탄히 묶을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이 헛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