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염원 / 윤석희

cabin1212 2020. 10. 9. 06:08

염원 / 윤석희

 

 

 

다리가 휘청거린다. 현기증도 난다. 땅 밑으로 얼마나 왔을까. 이어지는 지하 계단으로 사오십 분은 내려 온 듯하다. 갱의 깊이가 삼백 미터, 삼백 킬로가 넘는 길이의 거대한 산업시설, 폴란드의 옛 수도 크라쿠프 근교의 비엘리치카 암염 광이다. 십 삼세기 시작된 채굴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햇살도 염전도 없다. 어둠 속 지하 동굴이다.

언제였을까. 먼 옛날 암염은 햇살과 바람이 만든 소금 알갱이였을 게다. 알갱이가 뭉쳐져 바위가 되고 산이 되었다. 또 엄청난 시간이 흘러 지각변동으로 땅속 깊이 묻혀버렸다. 하얀 소금이 지하 광물이 되고 광산을 이뤘다. 무슨 업보인가. 어둠 속에서 썩지도 못하고 갇혀 있다. 속죄의 억겁을 보내야 다시 밝은 세상으로 나오려나. 바위가 된 암염은 태양아래서 피어나는 흰 꽃이 되고 싶지 않을까.

채굴이 끝난 지하 별세계에 이천 개가 넘는 빈방들이 있다. 세계 문화유산으로 이제는 보존해야 할 명소가 되었다. 신비한 지하 동굴인 듯, 어쩌면 냉랭한 감옥 같기도 하다. 광부들의 작품들이 썰렁한 공간을 지키고 있다. 대단하다. 섬세함과 예술성에 탄복한다. 모두 다 암염을 조각해 만든 것들이다. 믿겨지지 않아 두리번거린다. 손톱으로 긁고 만지고 두드려도 본다. 혀끝에 닿는 짠맛에 진저리를 치고서야 암염을 인정한다. 소금 굴의 청량함에 한기까지 돌지만 그 조각품들로 연 팔십만이 넘는 관람객들이 호사를 누린다. 성모상, 광부들의 생활과 기도하는 모습을 담은 수많은 자화상, 거대한 제단, 최후의 만찬 등 작품명도 다양하다. 어둠 속이어서 더욱 빛이 나는가. 예배당의 샹들리에는 참으로 빼어나다. 빛이 그리워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샹들리에를 새겼나보다. 신기함에 한동안 나도 구경에만 정신을 팔았다.

채광용 도구와 장비들이 대량으로 보관된 방도 있다. 채굴 기술의 발전사를 한눈에 보는 듯하다. 그중 큰 몫을 담당한 말들의 형상이 애처롭다. 수레를 돌려 짐을 나르며 지하에서 시달린 말들은 수명이 무척 짧았다한다. 죽어서야 땅으로 나올 수 있었다니 지상의 초원을 얼마나 그리다 갔을까. 광부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게다. 그들의 땀과 눈물로 점철된 소금광산에서 잠시 묵념한다. 대신 울어준다면 그들의 영혼에 위로가 될 수 있으려나.

곳곳이 교회당이다. 작업장에 웬 교회일까. 한참 만에 생각이 머리를 친다. 광부들의 고뇌가 가슴으로 느껴지며 눈물이 흐른다. 빛이 없는 지하에서 갱도를 만들어가며 소금을 파내고 그것을 땅위로 옮겼다. 하루하루 사투를 벌이곤 했을 게다. 죽어나간 사람들은 또 얼마였을까. 지상으로의 무사 귀환을 빌고 빌었을 것이다. 때문에 성소가 필요했고 혼신을 다해 신에게 매달렸다. 유난히 많이 십자가를 세우고 성모상과 성화를 조각하며 그들은 기도하고 소원하였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 안전을 기원했고 살아남은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사고로 갇혀있을 때도 이곳은 그들을 지탱해주는 성전이 되었다.

거친 삶을 사는 광부들이 어찌 다 조각가였겠는가. 목숨내건 그들의 삶이, 간절한 염원이 예사롭지 않은 조각품을 만들었다. 처절한 갱내 생활을 꿈으로 바꿔 둔 것이다. 소금 덩어리를 쪼며 소망했을 것이다. 깨고 조각내어 삶의 무게를 가벼이 하고 싶었을 게다. 그 아픔과 갈망으로 어느 유명 조각가의 작품보다 월등한 것들을 창조했다. 간구함이 빚어낸 고난의 꽃이라 하겠다.

아니 광부들의 피땀이 바위가 되어 암염 광을 이루었다. 아름다운 작품들 하나하나가 사연을 담고 있어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경건한 종교 의식을 치루 듯 마음을 여민다. 이제 관광업이 우선이라지만 이곳은 여전히 광부들이 노역이 필요한 곳이다. 아직도 하얀 보석을 캐기 위해 어둠 속을 헤집고 있는 그들의 삶을 조각품들이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