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코 고는 소리를 주조(鑄造)하다 / 김영관
코 고는 소리를 주조(鑄造)하다 / 김영관
피리소리에 잠을 깼다. 가만히 들어보니 모로 누운 아내의 코 고는 소리였다. 평소보다 요란한 코 고는 소리에 얼마 전 일이 생각났다.
얼마 전, 단독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결혼 사십육 년 차의 살림살이는 많기도 많았다. 이사하기 전 두 달 동안, 일차 이차 그리고 삼차까지 살림을 정리했지만, 이삿짐 트럭에서 짐을 내려 아파트에 펼쳐 놓으니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우리 부부는 이틀 동안 부산을 떨었지만 겨우 잠잘 방 개만 정리를 마칠 수 있었다. 토요일, 딸 내외가 두 손녀와 함께 도와 주러왔다. 점심을 먹고 함께 옷 정리에 들어갔다. 내 양복 정리에서 아내와 나는 의견이 갈렸다. 아직 멀쩡하니 두 벌은 놓아두자는 애게 몸에도 맞지 않고 유행도 많이 지났으니 이번 기회에 과감하게 버리자고 했다. 오래된 양복 상의를 걸친 나를 올려다본 딸이 한마디 했다.
“우장 바우 같다고.”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어깨와 키가 줄어든 칠십 대 노인이 오래된 양복을 걸쳤으니 말이다.
책 정리에 들어갔다. 몇십 년 동안 책장 한 장 넘기지 않은 책이 대부분이었다. 좁은 공간에 짐이 된다며 이참에 다 버리자는 아내의 말에 나는 넋두리를 했다.
“두 번이나 내다 버렸는데 뭘 또 버려!” 그리곤 책꽂이가 넘치자 바닥에 책을 쌓기 시작했다. 그때 아내가 한마디 툭 던졌다.
“OO김씨 고집을 누가 이기나.” 그 말에 나는 발끈 그만 선을 넘어 버렸다.
“당신 옷, 신발이나 좀 버리지!” 내 말이 방바닥에 닿기가 무섭게 아내는 속사포를 쏘았다. 말다툼을 하다 논리에 뒤진 나는 언성으로 이겨보려 고함을 질렀다.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던 중학생, 초등학생인 두 손녀가 달려왔다.
“할아버지 왜 그러세요.”
두 손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웃 동네에 사는 두 손녀는 어릴 때부터 우리 집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해서 아내와 내가 토닥거리는 걸 자주 봐 왔기에 어지간한 목소리는 대수롭지 않게 여길 터인데 나의 목소리 톤이 상상 그 이상이었음이 분명했다. 후회가 막심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자식들 보는 앞에서 이게 무슨 창피야.”
아내가 울먹이자, 어색해진 딸 내외는 손녀와 함께 서둘러 저희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나를 곰곰이 되돌아봤다. 아내와 함께한 세월이 강산이 네 번 반이나 흘렀다. 이쯤이면 상대를 이해하는데 달인을 넘어 신의 경지에 이르고도 남을 세월이지 않은가!
자괴감에 팔베개를 하고 애먼 천장에 눈총을 쏘고 있자니, 지인이 보낸 카톡 음이 떠올랐다. ‘노년에 우友 테크를 잘해야 한다.’ 즉 친구 관리를 잘해야 노후의 외로움을 극복하고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마치 내 현재를보고 있는 듯했다.
가만히 대입해 보니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가족에 대한 애愛테크였다. 특히 아내에 대한 사랑 투자가 부실했다. 그동안 나는 아내와의 갈등 때 고철이 된 내 마음을 까만 용광로에 넣어 베개를 뒤척이며, 나는 제련을 한다고 했지만 늘 원점으로 돌아갔다. 되새김질해보니 그건 내가 이만큼 양보하면 상대도 그만큼 변하겠지 하는 은연중 반대급부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물 한잔을 마시는데 참새 소리가 짹짹 맑고 곱게 들려왔다. 아파트 오 층 창밖을 내다보니 채찍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나는 궁금했다. 소리 나는 쪽으로 갔다. 에어컨 환풍기 박스 위에 참새 한 쌍이 앉아 비를 피하고 있었다. 가만히 다가가 엿봤다. 털 고르기를 서로 해주며 주고받는 눈빛이 애틋했다. 간간이 주고받는 목소리는 정답고 고왔다.
문득 생각이 났다. 참새 부부를 집안으로 초대, 아내와 나 사이에 꾸물거리는 송충이를 잡아먹게 하고 소나기 피한 사연을 시작으로 참새 부부의 애정담을 들으며 아내와 나 빗소리를 피아노 선율로 감상하고 싶었다.
그날 일기를 쓰며 마음속 다짐을 했다. 지금부터 상대와 관계없이 나만 변하자, 이번 기회에 내 가슴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독종을 제거하여, 아내에게 사랑 투자를 확시랗게 하자고.
일기 내용을 떠올리는데 아내의 코 피리 소리는 더 커지고 더 길었다. 나는 생각했다. 어려운 집안에 시집와서 반세기 동안 가정을 꾸려오면서, 아이 둘을 키우고, 한 성질 하는 남편 뒷바라지하다 남모르게 가슴속에 쌓인 응어리들을 한음 한음 애절하게 토하는 것이라고.
나는 느긋하지 못하고, 참지 못하는 내 마음을 바꾸기로 다짐했다. 내가 변한다면 아내의 코 고는 소리를 주조 피아노 음률로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