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바람길 / 이필선

cabin1212 2020. 12. 3. 06:04

바람길 / 이필선

 

 

 

낮은 담 너머로부터 바람이 분다. 얼굴을 훑으며 지나가던 바람은 내 삶의 일면 속, 반항기로 가득 차 아팠던 시기를 회상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실어 온다.

그때, 나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적군을 쏘아보는 독사처럼 독이 올라 있었다. 허리에서 아랫단으로 내려갈수록 넓게 퍼지는 까만 치마와, 각이 지고 크게 생긴 하얀 칼라를 뗐다 붙였다 하는 교복을 입을 수 없다는데 분노했다. 그 여름의 달밤에 마당에서 나눈 어머니와 이웃 아주머니의 대화를 듣지 말았어야 했다.

몬 보내지, 우리 형편에 어째 보내겠노…….”

열린 내 방문으로 모깃불 향에 실려 들어온 말이었다.

그날 이후, 고교진학에 대한 어떤 말도 없었거니와 학교에서 들은 공지도 전하거나 묻지 않았다. 부모 탓을 바탕에 깔고 천길 나락으로 떨어질 작정이라도 한 듯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다. 쓰디쓴 생의 고배를 마신 심정으로 시간만 보냈다. 성적은 삐딱선으로 탄 만큼 추락했고, 문중 재단에서 타던 장학금도 탈 수 없었다. 부모님은 그게 내 탓이라고 나를 독 오르게 했다.

하루 빨리 집을 벗어나고 싶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호시탐탐 날마다 기회를 엿보다가 아버지가 일하시던 집 앞 텃밭 둑을 넘어 뛰쳐나갔다. 목적 없는 반항의 방황이 나의 바람인 양 내가 만든 바람을 따라 서울에 도착했다. 하수구 냄새 같기도 하고 먼지 냄새 같기도 하던, 알 수 없는 서울 냄새를 그때 처음 맡았다. 공단의 냄새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가시지 않았다. 동경한 적 없이 닿은 발길이 도착한 서울 냄새는 서글펐다.

사회라는 넓디넓은 바다에 첫발을 디디던 순간이었다. 이후, 그 바다에 어떤 폭풍우가 치고 풍랑이 일지 알 바 아니란 듯 낯선 공단 속에 작은 몸뚱이를 밀어 넣었다. 얼마 후, 사무원은 나를 면접장으로 안내했다. 면접장 옆에는 큰 파이프에 절단되기 전의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감긴 원단이 가득 쌓여 있었다.

기억은 하고픈 것만 기억나게 한다던 말처럼 전정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많은 접수자를 제치고 기숙사가 있던 그곳, 산업체 고둥학교가 있는 방직회사에 합격했던 기억과 함께 그곳을 벗어날 때의 불안했던 심정이 잊히지 않는다. 출근하라던 날부터 보름쯤 다녔을까, 기숙사에 들어가려는 대기 인원이 차고 넘친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이십여 일만 기다리면 된다던 면접관의 말과는 달랐다. 서울이란 곳은 가난의 밥상에서 벗어나 돈벌이를 위해 내려 올 줄 모르고 올라가기만 하는 곳인 줄을 그때는 모르던 때였다.

잿빛 공장폐수가 흐르는 둑을 따라 폴라티를 입까지 끌어올리고, 목에 두른 스카프로 코를 막고 걸었다. 공장 하천을 흐르던 뜨뜻미지근한 하수구 냄새가 역겨운 그 길을 따라 출퇴근을 하며 머릿속은 복잡했다. 계획과 달리 기숙사에 들어갈 확신이 없어지자 그참저참에 핑계거리가 생겨 다행이다 싶었다. 공순이 공돌이들이 쏟아져 나오는 그 풍경 속 일원이 된다는 것을 용납하기 싫었다.

출퇴근길에 만날 사람도 없건만, 어느 누가 나를 안다고 하루 빨리 기숙사에 들어가 내 몸을 깊숙이 숨기고 싶었다. 숙소와 작업 현장과 학교만 오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바람이었기에 그간 일한 대가조차 요구할 줄 모르고 미련 없이 도망치듯 나와 버렸다.

제 가슴 스스로 여미는 것조차 버거울 만큼 덜 자랐을 때였다. 내가 원하는 바람을 찾겠다고 무모하게 나섰던 삶의 행보는 만만찮았다. 세상에 대고 항변하듯 내가 꿈꾸는 바람길을 만들고자 했지만, 바람길은커녕 꿈길조차 모르던 어릴 때였다. 애당초 나를 밀어주는 바람 없이 내딛기를 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수만 갈래의 바람길을 따라 흔들리고 또 흔들렸다.

그러고도 깜냥을 알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부족한 나의 실체를 알고부터 의식을 다 날려 버리느니 자아의 공간 중 한 층을 뚫어 바람길을 만들었다. 외롭고 고단하고 쓸쓸한 길이었다. 낯선 곳을 두드리며 나를 끼워 맞춰 나갔다. 덕분에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수시로 보수 공사하듯 메우고 다듬어 나가느라 기진했다.

오래전, 여행 중에 홍콩섬 고층 아파트의 바람구멍을 보녀 바람에도 길이 있다는 걸 그때서야 알았다. 바다에서 솟구쳐 오른 바람이 나갈, 바람길이 없었다면 아파트도 바다도 성치 못했을 것이다. 직진으로 내달리는 바람길을 막아 버렸더라면 갈지자를 그리며 휘청거리던 내 인생을 보듯 뻔하다.

여태까지도 바람길은 군데군데 만들어가며 살고 있다. 순풍이 나길 길을 막아버린다면 그간 닦은 길을 싹쓸바람이 순식간에 다 쓸어 가 버린 것을 너무 잘 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