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은행나무의 반란 / 신노우
은행나무의 반란 / 신노우
출근길은 수목원 앞길이다. 탐방객이 날로 늘어나서인지 도로 확장 공사를 시작했다. 확장 도로가 어느 정도 완성되어 갈 즈음에 가로변에 은행나무의 손과 발을 자른 채 줄지어 나란히 뉘어 놓았다. 뿌리가 마르기 전에 심기를 바랐지만 여러 날 방치해 두었다. 은행나무는 평생 살아야 하는 곳이 정해졌고,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시작되었다.
여름이 닥치자 미처 발을 제대로 만들지 못한 나무는 매운 시집살이를 했다. 뿌리가 제 몫을 다하지 못하니 잎이 건강하지 못해서 작고 노랬다. 햇빛이 강한 낮에는 아직 뿌리가 시원찮은 데다가 증산 작용을 하느라 날갯죽지를 늘어뜨렸다가 밤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리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세월이 약이던가, 시집온 은행나무가 조금씩 터를 잡고 웃기 시작하더니 날이 갈수록 씩씩한 청년 모습을 갖추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길에 참혹한 광경을 보았다. 수목원 앞을 지나 아파트 옆 왼쪽으로 휘어지는 내리막길에 사고가 났다. 대형 트럭에 애꿎은 가로수 두 그루가 급살을 맞고 참혹하게 깔아뭉개졌다. 아마도 졸음운전 사고인 것 같다.
수목원 근처로 이사를 했다. 매일 새벽 운동을 나가며 잘린 은행나무 그루터기를 다친 아들인 양 측은하게 만져 보았다.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던 은행나무 가로수가 이가 빠진 듯이 두 그루가 비어 있어 보기에 흉했다.
봄이 되자 잘린 그루터기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해 반란이 일어났다. 보상받기 위한 데모를 하듯 새싹을 뾰족뾰족 무수히 틔웠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 하늘바라기로 키재기를 했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자 은행나무 새싹도 서너 뼘 크기로 자랐다.
겨울 동안 알몸으로 오들오들 떨던 은행나무가 봄이 돌아오자 그루터기에서 수십 줄기 형제가 다시 다투어 자랐다. 그 가운데 큰 줄기는 내 허리께까지 왔다. 새벽 운동하러 함께 가던 K에게 좋은 일 좀 하자며 잘린 은행나무 그루터기가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이 많은 줄기를 그냥 두면 가로수 역할을 못 한다고 하자, 어떻게 해야 하느냐며 나를 바라봤다. 선택과 집중의 논리로 중심이 되는 큰 줄기 하나만 남기고 다른 줄기는 잘라 주어야 빨리 자랄 수 있다고 했다.
며칠 뒤, 전지가위로 잘린 그루터기에 아비 몫의 대를 이을 굵직한 아들 줄기 하나만 선택했다. 나머지 다른 줄기는 미안하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아픈 마음으로 하나하나 말끔하게 희생시켰다. 새벽 운동을 오가며 발악하듯이 다시 돋는 새순을 제거했다. 좀 더 빨리 자라기를 욕심내며 가끔 비료도 뿌려 주며 빌었다. 2년여를 돌본 결과 두 그루 중 한 그루는 내 키보다도 훨씬 높게 자랐다.
여름날, 은행나무 아들 줄기가 내리쏟는 달구비를 맞고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지주를 세우고 끈으로 묶어 줘야겠구나 생각하고 철 파이프와 끈을 구하러 마을로 향했다. 그런데 저만큼 어둠 속에서 누군가 철 파이프와 끈을 들고 바쁜 걸음으로 다가왔다. 아침 운동을 같이 다니는 K다. 이심전심이었다.
사람도 성장기에는 부모의 보살핌이 필요하듯, 은행나무 아들 줄기를 내 자식같이 자꾸 움트는 곁가지를 따 주며 사랑으로 가꾸었다. 뿌리가 올려 주는 영양분 전부를 한 줄기가 집중적으로 먹다 보니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 하늘로 향한다. 지날 때마다 흐뭇해서 보고 뒤돌아서 또 본다.
비록 깔아뭉개진 은행나무 가로수, 반란을 일으키듯 그 아픔을 딛고 이제 아들 줄기가 튼실하게 대를 이어 가고 있다. 인간사처럼 지난 일을 원망 말고 죽은 아비 몫까지 쑥쑥 자라 사고를 당하지 않은 나무들과 하루속히 어깨를 나란히 하기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