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역전앞갈대 / 김창식

cabin1212 2021. 11. 3. 06:00

역전앞갈대 / 김창식

 

 

 

1980년대 초 서울역과 염창동 일대에서 낮 시간대를 주름잡던 시절 이야기다. 밤 시간을 책임진 사람은 따로 있었다. 서울역 시계탑에서 대각선 방향에 위치한 한일빌딩에 근무하던 기획사(항공회사) 지점이 자리했다. 점심을 먹고 오다 지갑을 소매치기당했다.. 이 궁리 저 궁리하다 짚이는 바가 있어 부근의 '광택(구두세탁)주식회사' 간이 철제문을 밀고 들어섰다. 안면 있는 20대 초반의 젊은 사장에게 여차여차 상황을 설명하고 연통을 넣었다. 다음날 그가 내게 말했다.

"보자시는데요."

"지금 보고 있잖아요."

"아니, 저 말고요."

"그럼 누가?"

"우리 큰형님이요!"

'역전앞갈대'로 불리는 그와 서울역사 뒤쪽의 중국집 '외백外伯'에서 첫 대면이 이루어졌다. 옆이 트인 붉은 비단옷을 입은 '꾸냥'이 구석진 방으로 안내했다. 그는 40대로 보이는 찐빵 같은 외모의 사내였다. 영화 3의 사나이에 나오는 오손 웰스처럼 생겼다. 머리는 올백으로 넘겼고 포켓에는 행커치프를 꽂아 한껏 멋을 부렸다. 졸린 눈에 말도 느릿느릿했는데도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아마 기세에 눌렸던 모양이다.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자리에 앉았는데, 원형 식탁엔 가득 요리가 차려져 있었다. 한켠에 놓인 양담배가 눈에 띄었다. 그날따라 어찌나 담배가 피우고 싶던지. 떨리는 손으로 한 가치 빼물었는데 불이 잘 붙지 않았다. 거꾸로 담배를 물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중 담배가 두 동강 나는 바람에 재떨이에 구겨버리고 떨리는 손으로 새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흐릿한 동태눈에 잠깐 이채가 스치는가 싶더니 그가 무엇인가를 툭 던졌다.

"확인해볼 것이더라고."

내 지갑이었는데 내용물도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

"보고를 받았제. 주민증 까봉께 동향이더라고."

그때의 주민등록 중엔 본적이 적혀 있었다. 따져보니 그는 국민학교로 불린 초등학교 직속 선배였다. 그렇게 해서 그와는 '이물 없는' 사이가 되었다. 나중에 들었지만, 처음 나를 만났을 때 그도 솔찮이 당황했다고 한다. 자기 앞에서 터프하게 담배를 꺼내 피운 사람도 처음인 데다, 그 선량한 시민이 담배를 꺾어 아작냈으니.

역전앞갈대는 지탄받는 전국구 폭력배라기보다 걸인, 노점상, 잡상인, 구두닦이 같은 소외받는 직운을 자발적으로 관리하는 생계형 조직의 책임자급 인물이 아니었나 싶다. 그가 관할하는 구역은 우리 동네, 그러니까 서울역과 염천교를 아우르는 노른자위 지역이었다. 그와 함께 길을 걷기라도 하면 수상한 사람들이 일손을 멈추고 분분히 인사를 하기도 했다. 내 어깨에도 덩달아 힘이 들어갔다.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며 그런 내가 부끄러워지기도 했지만.

역전앞갈대는 첩실의 자식으로 태어나 중학교를 중퇴하고 무단 상경하여 서울역에 터를 잡았다고 했다. 앵벌이를 시작으로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 지역 맹주 위치에 오른 것이다. 유머러스하고 고향 사투리를 써서 말투도 정감이 있었다. 또 가방끈이 짧은 것에 맺힌 한이 있어서인지 문자를 즐겨 사용하기도 했다. 한번은 별명이 남세스럽게 '갈대'가 뭐냐고, '상어''악어' 같은 격에 맞는 사나운 이름으로 바꾸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넌지시 권했더니 표정이 엄숙하게 뒤틀렸다.

"고거이 나으 소싯적 별명잉께. 나가 그 잡것을 바꿔볼까 생각 안 해봤다면 거짓말이제. 연이나, 정도 들었겄다 고향 갈대밭이 눈에 삼삼한 것을 어쩌겄는가. 자네는 학문이 깊으니 그 머시냐 수구효심首丘孝心이라고 들어봤제? 여시가 죽을 때 고향을 그리는 마음 아니당가?"

내가 뭐 잘났다고 딴죽을 걸었다.

"성님, 수구초심首丘初心인데요!"

그가 희멀떡한 눈을 지그시 감더니 읊조렸다. 그가 갑자기 몇 년이나 더 늙어 보였다.. 어찌 보면 회한에 젖는 것도 같았다.

"아따, 이 사람, 멀 그리 따져쌓는가? 어르신이나 영감탱이나, 노파나 할망구나. 하먼, 나가 이 사업을 함시로 맴이 편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제. 그간 부끄러봐서 고향에도 못 내려갔단 말이시."

그와의 인연은 일 년여를 끝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와 호형호제한다는 것이 내심 꺼림칙하던 차 해외근무를 떠나게 되었다. 주재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여 여전히 현역인 광택회사 사장에게 그의 소식을 수소문했다. 근데 역전앞갈대가 그 바닥에선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은퇴했다는 것이다. 잠시 그가 어디로 갔을까 생각하는데 언뜻 가창오리 떼 날아오르는 갈대숲이 눈앞에 펼쳐졌다. 망연히 낙조를 바라보는 트렌치코드 입은 그의 뒷모습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