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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왜 화가 나면 물을 끼얹어요? / 고두현

cabin1212 2022. 3. 18. 05:47

왜 화가 나면 물을 끼얹어요? / 고두현

 

 

 

화풀이 '물세례'와 아름다운 '나비물'

 

'사르륵/ 사알짝/ 물방울 아기들.//초가짐 지붕 위에 모여 와서/ 미끄럼 탄다'로 시작하는 동시를 몇 번이나 읽었다. 교과서에 실린 이희철의 <초가집 낙숫물>이다. 시 속의 '물방울 아기들'이 하도 앙증맞고 예뻐서 그대로 흉내 내며 흥얼거렸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조카 녀석이 생뚱맞은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왜 화가 나면 물을 끼얹어요?"

하긴 우리나라 드라마와 영화엔 유난히 물 끼얹는 장면이 많다. 오래전 방영된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는 초반부터 그랬다. 연회 중 갑자기 등장한 안방마님이 옥정에게 물을 확 끼얹고는 "내 잡에서 절구나 찧어야 할 천한 계집이 잘난 척을 하고 있어."라며 패악을 부렸다.

이보다 더 격한 장면은 막장 드라마의 본처와 불륜녀 사이에서 연출된다. 대부분은 커피숍이나 카페에서 티격태격하다가 갑자기 상대 얼굴에 물을 확 끼얹고는 나가버린다. 배운 듯한 젊은 여성들도 예외가 아니다.

왜 그러는 걸까. 정말 화가 나면 손이 먼저 나갈 텐데, 핸드백이나 물건을 집어던지고 탁자를 뒤집어엎을수도 있을 텐데. 이른바 최소한의 품위는 지키면서,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최대한의 모욕감을 안기는 극단적인 응징 수단이 바로 물세례다. 당하는 쪽도 침 뱉을 때보다 더 큰 치욕을 느낀다니 그럴 만하다.

이런 행동은 한국인 특유의 몸짓언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상대에게 자신의 위치를 확인시키는 '과시효과'와 네 처지를 알고 물러서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환기효과', 많은 사람 앞에서 망신을 주려는 공개응징의 '증폭효과'가 합쳐진 것이다. 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에게 물을 퍼붓는 경우는 '각성효과'를 겨냥한 것이다.

이렇게 허구한 날 드라마에서 물을 뿌려대니까 화나면 으레 그래야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많다. 당하는 사람으로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물벼락'이다. 얼마 전에는 대기업 총수 딸이 '물컵 갑질' 때문에 해당 기업 전체가 휘청거리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물세례가 화풀이에만 쓰이는 건 아니다. '찬물을 끼얹다'는 표현은 잘되어 가는 일에 공연히 헤살을 놓는다는 뜻이고, '좌중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는 것은 분위기가 급랭하거나 상황이 급변했다는 의미다.

''은 좋은 의미로 쓰일 때도 많다. '시원하게 물을 끼얹자 햇볕에 달궈졌던 몸이 금세 식었다'거나 '아이가 데었다면 재빨리 찬 물을 끼얹어서 열을 식혀줘야 한다' 등의 기본 용례부터 그렇다. 음식에 수분을 보충하거나, 식물의 생장을 돕는 뜻으로도 쓰인다. '밥이 된 듯하니 물을 좀 더 끼얹으렴', '할머니가 콩나물에 물을 죽죽 끼얹으며" 등이 그런 예다.

손바닥으로 물을 끼얹으며 앙증맞게 노는 연인들에게는 물세계가 사랑의 매개다. 축제 때 유럽 총각들이 처녀에게 물을 끼얹거나 물총을 쏘며 희희낙락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태국 최대 축제인 '송끄란' 때에는 전국에서 신명나는 물총 잔치가 벌어진다. 원래는 물세례 대신 향기로운 정화수를 손이나 어깨에 뿌리며 축복을 비는 전통에서 시작됐지만, 이젠 외국인들도 함께 즐기는 풍속이 됐다.

기독교에서 '물세례'는 글자 그대로 '신자가 세례를 받는 의식'의 하나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며 참된 기독교인이 된다는 표시다.

물세례는 기우제에도 등장한다. 충남 금산의 무형문화재 '농바우끄시기'가 대표적이다. 농바위 아래 계곡에 여인들이 알몸으로 들어가 물을 끼얹으며 장난치고 놀면 비가 온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행사다.

물 끼얹는 행위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걸 꼽으라면 '나비물'일 것이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마당이나 대문 앞길에 나비의 날갯짓처럼 사뿐하게 펼쳐 뿌리는 물이 나비물이다. '마당가에 피는 꽃들은 아침이면 식구들이 차례로 끼얹어주는 나비물을 맞으며 하루를 시작한다'는 문장처럼 물의 부챗살처럼 펼쳐 부드럽게 끼얹는 것이니 말 그대로 가장 우아한 물세례다.

실제로 나비 날개처럼 물을 뿌린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을까. 겉모습이 팔랑거리는 나비 날개를 닮기는 했다. 하지만 폭을 나타내는 '너비'도 우리말에서는 '나비'와 함께 쓴다. 옆으로 길게 퍼지도록 쫙 끼얹는 물이라 해서 '나비물'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모양이야 어떻든 이름은 참으로 예쁘다. 우리 생활과 밀접하다는 점에서 더욱 정겹다.

이정록은 <나비물>이라는 시에서 '날듯이 달리는 말을 만나려면. 한 세숫대야의 물이 필요하다./ 물을 길어 얼굴을 곱게 씻고/ 너른 마당에 드넓게 끼얹으면/ 물갈기를 세운 말이 허공에 나타난다'고 했다. 이어 '세숫물은 말이 되었다가 나비물로 내려앉는다./ 깨끗하게 쓸어놓은 마당에 날개를 펼친다'고도 했다. 나비물의 쓰임과 모양새를 시인의 눈으로 절묘하게 포착했다.

재미있는 것은 나비물을 뿌려도 정작 나비 날개는 물에 젖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날개 표면을 덥고 있는 미세한 비늘 가루 덕분이다. 날개를 만졌을 때 묻어나는 가루가 곧 인분鱗粉이라고 불리는 비늘이다. 일종의 솜털인 이 비늘가루가 촘촘하게 배열돼 날개를 보호하고 물을 퉁겨낸다고 한다.

벌써 초여름 날씨다. 조금 더 더워지면 연인들의 물싸움 놀이가 곳곳에서 펼쳐지리라. 여기에 사랑스러운 여름꽃잎까지 덤으로 얹힌다면 이보다 더 예쁜 '꽃물세례', '꽃나비물'이 또 있을까. 이럴 땐 우리 마음까지 젊어져 어느새 '물마중'나가는 '물 찬 제비'가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