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말 무덤 / 김형규

cabin1212 2022. 4. 6. 06:57

말 무덤 / 김형규

 

 

 

신축년 새해가 밝은지도 두 달이 흘러갔다. 향긋한 새봄이 옷깃을 여미고 다가오고 있다. 창공을 나는 새처럼 나도 한 마리 새가 되어 봄을 맞이하고 싶다.

따뜻한 봄바람을 타고 호기심이 솟아났다. 설 연휴가 지난 한가로운 주말, 신기한 말 무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기로 했다. 하회마을과 삼강주막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개 무덤(義狗塚), 소 무덤(義牛塚), 호랑이 무덤(義虎塚)은 종종 들어보고 찾았지만, 말 무덤은 난생처음 듣는 말이다. 달리는 말()이 아닌 입에서 나오는 말()을 묻은 무덤이다. 이른바 언총(言塚)이다. 신기한 말 무덤은 경북 예천군 지보면 한대마을 앞 낮은 구릉에 자리 잡고 있다. 깊은 산골짝 한적한 들판은 시간이 멈춘 듯 적막 속에 잠들어 있다. 허리를 숙인 노송과 미소 짓는 진달래꽃이 찾는 이를 반긴다. 말 무덤으로 오르는 고즈넉한 오솔길 곁에는 아담한 정자가 놓여있고, 말과 관련된 격언과 속담들이 현판과 자연석에 새겨져 있다. 고분 같은 무덤 앞에 세워진 굳게 다문 입술과 손가락으로 ‘쉿’하는 동작의 조형물에 잠시 눈길이 머문다.

말의 신중함을 일깨우는 말 무덤의 유래는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예부터 한대마을에는 여러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하지만 마을을 가로지르는 언덕배기를 사이에 두고 문중 간 말다툼이 그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씨앗이 되어 큰 싸움으로 번지는 일이 잦아지자 마을 어른들은 그 원인과 처방을 찾기에 골몰했다. 어느 날, 한 나그네가 이 마을을 지나다 뒷산의 형세를 보고는 “좌청룡은 곧게 뻗어 개의 아래턱과 같고, 우백호는 구부러져 길게 뻗은 위턱이라, 마치 개가 짖어대는 형상을 하고 있어 마을이 늘 시끄럽겠네”라는 말을 던지고 지나갔다.

지금도 한대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야산은 그 형세가 마치 개가 입을 벌리는 듯하여 주둥개산이라 불린다. 마을 사람들은 나그네의 말에 따라 개 주둥이의 송곳니 위치인 논 한 가운데에 날카로운 바위를 세우고, 개의 앞니 위치인 마을 길 입구에는 개가 짖지 못하도록 재갈 바위를 세웠다. 이어 마을 사람에게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상스럽고 험한 말, 남을 비방해 가슴에 상처를 남기게 한 말, 미움과 원망이 담긴 말들을 큰 사발에 뱉고는 신주 모시듯 가져오라고 했다. 그리고는 소나무 숲 언저리, 개가 짖어대는 형상인 주둥이 언덕배기에 말이 새어 나오지 않게 깊게 묻고 흙을 수북이 쌓아 봉분을 만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무덤을 신성시하여 매년 정성껏 음식을 차려 제사도 올렸다. 그 후로는 신통하게도 말다툼이 수그러지고 이웃 사이에 두터운 정이 오갔다고 한다. 마을의 화합을 이끌었던 선조들의 지혜가 번쩍인다. 예천군은 말 무덤 주변을 말끔히 정비하여 언어 순화를 위한 산교육장으로 가꾸어가고 있다.

조선 영조 때 김천택이 편찬한 <청구영언>에는 고려말 이래 1,000여 편의 옛시조가 실려 있다. 그중 말에 관한 작자 미상인 시조 한 편이 있다.

 

말하기 좋다 하고 남의 말 말을 것이

남의 말 내 하면 남도 내 말 하는 것이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날아다니는 오묘한 말은 변장술이 뛰어난 꽤 많은 요술쟁이인 것 같다. 그러기에 말에 얽힌 수많은 격언과 명언들이 동서고금을 통하여 이어져 오고 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 ‘범도 제 말 하면 온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 ‘내 말은 남이 하고 남의 말은 내가 한다’ ‘혀 아래 도끼 있다’ ‘한점 불티는 능히 숲을 태우고, 한마디 말은 평생의 덕을 허물어뜨린다’ ‘가루는 칠수록 고와지고, 말은 할수록 거칠어진다’ ‘말 많은 집은 장맛도 쓰다’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요, 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다’,

삼사일언(三思一言), 언중유골(言中有骨), 감언이설(甘言), 언행일치(言行一致), 교언영색 선의인(巧言令色 鮮矣仁),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 등 깊이 새겨야 할 말들이 계속 등장한다.

말 무덤은 말의 소중함과 고귀함, 침묵과 묵언의 수행을 조용히 일깨워준다. 말은 생각과 뜻을 담는 그릇이며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생각은 말로 나타나고 말은 행동으로 나타난다. 말에는 고귀한 인격과 품성이 담겨있고 맛과 멋, 감성과 색깔이 숨어 있다. 말 속에도 악보가 있고 온도가 있다. 아름다운 말씨는 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갈고닦은 수양의 결정체다. 말은 맑고 깨끗한 공기나 물과 같다. 감동적인 말 한마디가 차디찬 얼음장을 녹인다. 진실과 사랑이 깃든 부드럽고 따뜻한 말은 칠흑 속 반짝이는 한줄기 별빛이다. 칼에 베인 상처보다 말로 난 상처가 더 아프고 오래간다. 보이지 않는 말의 위력과 무서움이다. 막말 거짓말 거친 말은 오히려 자신을 해치게 한다. 무심코 내뱉는 말이 불씨가 되어 끝없는 분노와 원망, 갈등과 분열을 불러온다. 성경에 나타난 바벨탑 이야기도 말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인간은 말을 할 줄 아는 만물의 영장이다. 아름다운 말은 깨끗한 씨앗이 되어 행복한 삶을 키우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다. 풀잎에 맺힌 영롱한 이슬방울처럼 순결한 말, 꽃망울처럼 은은한 향기로운 말이 온 누리에 활짝 피어났으면 한다. 말 무덤 위로 따사로운 봄볕이 사뿐히 내려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