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오! 자유여 / 송혜영
오! 자유여 / 송혜영
오! 자유여.
그날, 그 일이 있었기에 너는 진정 내게로 온 줄 알았다.
어떤 이들은 우리를 게으르다고 손가락질한다. 억울하다. 우리가 게을러 보이는 건 신체구조가 노동에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게을러 보일 수밖에 없는 환경이 주어져서다. 신진대사가 원활하지 못해 불가피하게 천천히 움직이는 나무늘보가 나태의 대명사로 불리는 게 안타까운 건 동류의식을 느껴서다. 몸을 잘 움직이지 않는다고 게으르다고 단정 짓는 건 부당하다. 게으름과 부지런함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성의 문제라지 않은가. 내 경우는 두뇌 할동은 누구보다 부지런하다. 노동으로 사회와 가족에 기여하지 못하지만 문자를 다룰 수만 있다면 생활화된 사색을 바탕으로 한 나만의 독창적 철학을 바탕으로 인간들이 곧잘 출판하는 책 몇 권 정도는 쓸 수 있다. 지적 작업의 결과물이 재화로 돌아온다는 보장은 없지만, 하여간 내 현실의 외피는 무위도식이었다.
그런 나를 아무도 나무라지 않았다. 언짢아하기는커녕 내 거짓 휴식에서 인간들은 영혼의 안식을 얻는 것 같았다. 항상 시간에 쫓기는 그들은 내 게으름에 각별한 애정까지 표시했다. 항상 정갈한 잠자리와 질 좋은 음식도 주어졌다. 또 심심할까봐 실뭉치도 던져주고 눈앞에 요요도 흔들었다. 나는 그저 그들이 던지는 장난감류에 반응하고 집중하는 흉내를 냈다. 그러면 그들은 만면에 웃음을 띠우며 즐거워했다. 나를 품에 안고 털을 헤집고 어루만지는 손길은 어금니를 꽉 물고 참았다. 그들이 원할 때를 빼곤 종일 낮잠을 빙자한 사색에 잠길 수 있었으니까. 겉으로는 더 바랄 게 없는 평안한 삶이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일상이 권태로워지면서 안온했던 공간이 감옥같이 숨이 막혔다. 이대로 무사안일한 , 노예와 다름없는 생을 지속시켜야 할까.. 체험 없는 창백한 사유에만 머문 내 의식세계가 답답했다. 자유라는 관념을 실제로 경험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깊은 밤. 그동안 보지 못했던 틈을 발견했다. 조금 열려 있는 욕실 창문으로 내 한 몸 빠져나갈 수 있을 듯했다. 마침 건물 사이로 휘영청 뜬 보름달이 감옥에서 나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창틀로 냉큼 뛰어올랐다. 생각보다 쉽게 문틈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내 유연한 몸에 스스로 감탄했다. 그동안 왜 틈들을 간과했을까. 자책으로 몸이 떨렸다.
처음 걸어보는 밤거리는 두려움과 매혹을 동시에 선사했다. 사뿐사뿐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깊은 어둠만 골라 디디며 골목을 헤매고 다녔다. 정해진 행동반경을 벗어나 자유롭게 몸을 쓰는 기쁨은 이제껏 맛본 적 없는 신선한 성질이었다. 하지만 관성에 끌려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발바닥과 몸에 남아있는 외출의 흔적을 세심하고 지우고 시치미를 뗐다. 나는 그들이 언제든지 건드릴 수 있는 곳에서 눈을 감고 있어야 했으므로, 첫 번째 외출 이후로 밤이 되면 몸이 근질거렸다. 처음 마음먹기가 어려웠다. 외출이 잦아지면서 나는 점점 과감해졌다. 인상이 험해 보이는 길고양이와 마주쳐도 놀라지 않고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늘상 이완 상태였던 육체를 좀 더 격렬하게 작동시키고도 싶었다. 그래도 식구들이 깨기 전에는 꼭 집에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일이 터졌다. 결과적으로 보면 내가 터트린 거다. 마침 일요일이었고, 모두 밥상에 둘러 앉아 수저를 들려는 참이었다. 식구들은 물론 내가 밤마실을 나간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날은 골목에 나서자 다른 날보다 눈이 더 밝아진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제 이전의 내가 아님을 온몸으로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눈에 불을 켜고 동이 틀 때까지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털이 까맣고 눈이 샛노란 야수 같은 놈에게 노골적인 추파를 던지고 있었다. 그때 작은 물체가 대추나무집 담장을 가로지르는 걸 보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물컹하면서 살아 움직이는 생물의 느낌. 쥐다. 내가 사냥을 한 것이다. 피돌기가 더할 수 없이 빨라졌다. 나는 몹시 흥분했기 때문에 평소에 연마한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다. 단지 이 감격을 식구들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만이 나를 지배했다. 그간 가시적 업적이 전무했던 터라 내 힘으로 얻은 쥐 한 마리의 의미는 시사하는 바가 컸다. 나는 그걸 물고 와 자랑스럽게 식탁 밑에 내려놓았다. 전리품이 아직 살아있다는 걸 강조하려고 앞발을 번갈아 써가며 쥐를 굴렸다. 그때마다 쥐벼룩 고물이 바닥에 떨어졌다.
갑자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첫 번째 노획물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온, 내 기특한 행동에 감격해서 입을 떡 벌리고 있던 식구들이 곧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비명을 질러대는 것이 아닌가. 그건 결코 내가 원하는 감동의 몸짓이 아니었다. 뭔가 잘못 됐다. 다음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어느새 뒷방 늙은이였던 할머니가 마당 빗자루를 들고 들어왔다. 평소 나를 악마의 화신이나 하는 일 없이 양식이나 축내는 건달로 보고 혀를 차더니 옳다구나 내 등짝을 후려쳤다. 뜻밖의 처사에 기겁을 한 나는 마당 구석으로 도망쳤다. 내 자랑거리가 그들에게 혐오의 대상이 된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건 평소의 나답지 않은 일이다. 아니, 그건 고양이 몸으로 태어나 고양이로 살아온 존재의 한계이다.
그날 이후 나는 다시는 방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한 며칠 안채를 기웃거렸지만 그건 급작스러운 환경에 대한 적응 과정일 뿐이었다. 나를 집요하게 집으로 끌어들이던 관성에 힘도 빠져가고 있던 즈음이었다. 포근한 잠자리와 부드러운 음식에 대한 미련이 조금 남아있었지만 고통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가고 싶은 곳에 가고, 아직은 코를 막고 삼키는 수준이지만 싱싱한 쥐를 잡아먹고, 유혹적인 밤거리를 헤매며 취향대로 마음껏 연애도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동안 억제했던 야성의 소리에 충실하게 답하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의 노리개 노릇을 안 해도 된다는 사실이 좋았다. 게다가 생생한 체험을 소재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참, '문자를 다룰 수만 있다면'이라는 전제가 빠졌다. 그날의 사건은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내 인정투쟁 행위를 뒤늦게 보은으로 해석한 안주인이 다시 집안으로 들이려 했다.. 나는 냉정히 고개를 돌렸다. 이미 맛을 본 달콤쌉싸름한 자유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하고 슬슬 사는 게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사냥의 기회는 생각처럼 자주 오지 않았다. 금기 없는, 책임감 없이 분방하기만한 연애는 고달픔을 더할 뿐이었다. 인정받을 기회도 갖지 못할 창작행위에 대한 욕망도 부질없어졌다. 나는 양지 바른 지붕에 올라앉아 예전처럼 사색에 잠겼다. 권태로웠으나 끼니 걱정이나 적적함을 몰랐던 갇혀있던 날을 떠올렸다. 그리고 새로운 결론을 도출했다.
과거의 나는 지루한 일상과 고양이적 모멸감을 극복하고 상상력 극대화를 통해 자유를 획득했어야 했다. 지금 이 순간 열린 자유를 위해 외로움을 동반한 밥벌이의 구차함과 수고로움을 감수해야 하듯이.
오! 자유여. 너는 끝까지 나를 희롱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