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꽃구경 / 한정미
꽃구경 / 한정미
밖은 휑하니 찬데 공연장 안은 후끈 달아오른다. 남자가 한 손을 살포시 치켜들고 하얀 버선발을 내디딘다. 치켜든 하얀 두루마기 사이로 소리가 흘러나온다.
화창한 봄날, 아들은 꽃구경 가자고 어머니에게 등을 내밀었다. 어머니는 좋아라고 아들 등에 업혀 길을 나섰다. 마을을 지나 언덕을 오르고 산자락에 휘감긴 숲길이 짙어지자 어머니는 말을 잃었다. 나지막이 숨을 고르는 남자의 소리에 감고 있던 나의 눈이 파르르 떨린다.
달포 전, 손윗동서에게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아흔을 훌쩍 넘긴 어머님이 요즘 부쩍 정신을 놓는다는 것이었다. 섬망 증세가 나타나는지 헛손질을 하며 밥을 해야 한다고 막무가내라 했다. 집을 비울 때면 염려가 되어 가스 불을 잠그고 쌀을 숨긴다고 했다. 위험한 칼과 도마는 부엌에 아예 두지 않는다며 탄식이 늘어졌고, 어머님의 거취 결정을 내려야 한다며 한숨을 토했다.
이태 전부터 어머님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시작되었다. 다소곳하던 분이 갑자기 큰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밤에 일어나 거실문을 확 열어젖히고서는 거기서 뭐 하냐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무엇보다 밥을 자꾸 하려고 떼를 썼다. 관절이 아파 기어 다니면서도 어디서 힘이 솟아나는지 벌떡 일어나 부엌을 향했다. 밥을 한 솥 하여 그릇마다 퍼 놓고 마당을 향해 밥 먹으라며 소리를 질렀다.
한바탕 소동을 벌이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요해졌다. 그러고는 행동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 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많은 기운을 소진한 탓에 며칠째 잠에만 빠져들었다. 걱정된 동서는 어머님의 코에 손을 대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했다. 자식 모두가 염려했지만 모두 먹고사는 일에 바빠 어머님의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숨을 고른 남자의 노래가 이어진다. 꽃구경 봄 구경도 눈감아 버린 어머니는 한 움큼 한 움큼 솔잎을 따서 가는 길 위에다 뿌렸다. “어머니 지금 뭐하나요? 솔잎을 따다 뭐하나요?” 가슴으로 부르는 그의 노래가 나를 갈래갈래 흩어놓는다.
지난여름, 매년 휴가를 같이 보내는 형제들이 시골에 모였었다. 사흘 머무는 동안 듣기만 했던 어머님의 행동을 눈으로 보게 되었다. 밤이 이슥하게 깊었는데 인기척이 났다. 눈을 떠보니 어머님이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더니 부엌으로 향했다. 나는 살금살금 뒤따라가 가보니 어머님은 쌀을 퍼내고 있었다.
“어머님, 지금 뭐 하세요?”
어머님은 놀란 어깨를 멈칫하더니 아비들이 배고파해서 밥을 짓는다고 했다. 그 눈빛은 너무 애달프고 간절했다. 어머님 손에 들린 양재기를 조심스레 받아 내려놓고 부축해서 건넌방으로 향했다.
“어머님, 아비들은 조금 전 배불리 먹고 지금 자고 있어요.”
어머님은 조심조심 다가가 잠든 아들들의 얼굴을 만졌다. 잠든 아들들을 확인한 어머님은 안심되었는지 그때야 방으로 건너갔다. 나도 어머님을 따라 들어가 곁에 누웠다. 어머님의 거친 숨소리가 차츰 잦아들자 조용히 일어나 잠든 어머님을 바라보았다.
어머님이 왜 그렇게 밥을 지으려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랬다. 하지만 아비들 먹여야 한다는 눈빛을 보며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어머님의 간절한 눈빛을 보며 나는 알았다. 먼 길을 가시기 전에 먹고 살기 힘들었던 기억을 떠올린 것이었다. 자식들이 배곯을까 봐 미리 밥을 해놓으려는 것이었다.
열여섯 꽃다운 나이에 고개 너머 종갓집 종부로 시집을 온 어머님에게 자식은 전부였다. 층층시하의 수발에 마음껏 안아주지 못했지만 끼니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어머님을 뵈면 늘 밥 먹었느냐는 게 첫마디였다. 무심코 흘려들었던 말속에는 어머님의 깊은 뜻이 숨어 있었다. 그 속을 헤아리는 데는 세월이 이렇게 필요했다.
그의 소리가 끝이 나고 큰 울림을 주는 북소리가 흘러나온다. 잠시 후 등에 업힌 어머니가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너 혼자 내려갈 길 걱정이구나.”라고 흐느낀다. 길을 잃고 헤맬까 걱정이라 하는 남자의 절절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그칠 줄 모르는 눈물이 나의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조용히 무대에 불이 꺼진다. 하얀 두루마기를 걸친 남자는 다소곳이 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무서울 만큼 객석에는 정적이 감돈다. 서서히 무대에 불이 켜지며 밝아졌다. 옆에 앉았던 남편도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어깨가 들썩인다.
아직 바깥은 찬바람이 인다. 하지만 봄은 이 겨울이 지고 나면 찾아오리라는 걸 누구 하나 의심하지 않는다. 꽃 피는 봄이 오면 어머님을 휠체어에 모시고 나들이를 나서야겠다.
“어머님, 우리 꽃구경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