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어떤 의미 / 이정경
어떤 의미 / 이정경
봄은 화려한 댄스의 춤 놀림이다. 온갖 꽃들의 유희로써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남극의 두꺼운 얼음 같은 혹한이 지나고 생명의 불꽃 봄이 왔다. 본격적인 한해가 시작이 된 셈이다. 인생의 한 매듭은 새봄에는 무지개처럼 곱게 펼쳐지고, 여름의 뜨거운 열정 지나, 가을에는 풍성한 결실의 열매를 거둔다. 자연의 순리 따라 꽃처럼 피었다가 겨울이면 잠시 자연으로 회귀한다. 한해의 시작은 해마다 새롭게 태어나게 하고 새로운 계획을 다짐 하게 한다.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은 끊임없는 꿈의 연속이다. 무슨 일을 한다는 것은 사람과 함께 활동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눈뜨면 사람을 만나고 눈 감고 하루를 마감할 때까지 사람과의 관계가 이어진다. 사람 속에서 행복을 찾고 사람으로 인해 슬플 때도 있다. 사람 때문에 웃고 울며 인생의 마디가 굵어진다. 계획된 만남 보다 예상치 못한 만남이 더 많다. 우연한 장소에서 뜻밖에 귀인(貴人)을 만났을 땐, 황무지에서 빛깔 좋은 과실을 얻어먹는 기쁨을 느낀다. 그 분이 온화한 미소를 띠며 다정스런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건넬 때면 한 송이 연꽃의 고고한 향기를 맡게 된다. 돈으로 따지면 로또 복권에 당첨된 환희를 얻는다.
나와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사람은 많은 말이 필요치 않다. 어쩌다 만나게 되면 입 꼬리를 높여 지긋하게 미소만 띠어주어도 가슴에서 뜀틀 오고 가는 감동이 전해진다. 좋은 사람을 만나 좋은 인연을 맺게 되길 간절하게 기도한 적이 있다. 빛명상 초광력학회에 가면 그런 사람을 만날 것 같았다. 나와 생각이 비슷하고 나를 자신처럼 아껴줄 사우(師友)를 원했다. 간절함은 하늘에서 길을 열어주나 보다. 어느 날 학회 행사 때 내 옆에 신의 숨결처럼 그 분이 살포시 앉았다. 새털 같은 포근한 기운이 전해져 왔다. 첫눈에 봐도 내가 찾는 친구 같은 언니임을 알게 되었다. 묵례로 서로 미소를 던지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첫 만남에 두 손을 다소곳이 포개어 인사를 건넸다. 달빛에 젖어드는 은은한 향기를 맡는 감동이었다. 탁 트인 수평의 바다바람 같은 평온한 목소리는 넉넉한 심성을 지녔음을 알게 했다.
사람이 만나 서로 첫인상을 감지하는 데는 3초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첫인상으로 그 사람 인품이 다 드러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첫인상을 중요시 한다. 남녀가 선을 보고 일생을 결정짓는 결심도 첫 느낌이 좋을 때다. 시간이 흐를수록 친한 사이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이 서로 마주치는 처음 순간에 정감이 소통되는 것 같다. 자석처럼 강하게 끌어당기는 알 수 없는 첫 감정은, 반짝이는 보석처럼 서로에게 빛을 주며 좋은 인연을 맺게 한다.
만남에는 숙연(宿緣) 같은 만남도 있다. 오래 숙성되어 발효된 묵은 지 같은 고향 친구들과의 인연이다. 황토색 토담 같은 그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골동품 같은 정을 품고 있다. 가족 같은 인연으로 쉽게 변질되지 않는다.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목에 힘을 주어 말하지 않아도 내 본심을 알아주고 믿어준다. 나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고향의 흙과 같다. 내 말이 인정되지 않고 내 의견이 허공에 날아가는 바람처럼 휑할 때, 죽마고우들은 나를 잡아주는 끈이 되어 땅위에 발을 딛게 뿌리를 심어준다. 나의 목소리에 꿈을 담아주고 내 인격에 날개를 달아준다. 내 몸에 사람 냄새나는 향수를 뿌려주고 모든 생명을 살리는 태초의 에너지를 불어 넣는다.
정호승 작가가 방송에서 “이 세상에는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 있다.”고 열변했다. 내가 쓸모없다고 한탄하지 않고 잘 살아야 할 이유가 그 "단 한사람" 때문인 것 같다. 단 한 사람의 가슴에 간절한 그 ‘어떤 의미’의 내가 되었을 때, 나의 존재는 그에게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귀한 꽃으로 피어난다. 김춘수 시인의 "꽃"에서 말하는 "어떤 의미"를 말하지 않아도, 그 또한 나에게 소중한 사람의 존재로 의미 되어 있을 것이다.
새로 시작된 봄꽃이 찬란하다. 꽃의 수만큼이나 사람의 꽃 향도 다르다. 우리 모두는 커다란 화엄(華嚴)의 꽃동산에서 만나고 헤어지며 살고 있다. 누군가에게 어떤 의미의 꽃 향으로 남을 것인지는 각자의 가슴에 곱게 피고 있을 꽃 향의 밝고 맑기에 달렸을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 어떤 꽃으로 꽃 향을 피우고 있는가. 나의 또 다른 그들의 밝은 거울을 보며 매일 닦아 화려한 빛을 내어야 하리. 서로 마르지 않는 꿈과 희망의 의미까지도 함께 동행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