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집 비우던 날 / 김영관
집 비우던 날 / 김영관
밤비가 창 두드리는 소리에 베갯머리의 기억 열차가 순식간에 시공간을 초월,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뒤로의 궤도를 내 달렸다.
어머니 기록관이 가까워지자 열차는 속도를 줄였다. 저만치 어머니가 걸어온 고난의 길이 산모퉁이를 돌아 보이는 철길처럼 길게 이어져 있었다. 길은 한눈에 보아도 험했다. 좁고 가파른 바닥에는 돌멩이가 지천이었다. 문득 의문이 생겼다. 청상과부로 어린 사형제를 태운 수레를 끌고 저 험한 언덕길을 어떻게 올라왔을까?
열차에서 내려 쉼 호흡으로 숨을 고르고 기록관 안으로 들어갔다. 첫 번째 방은 병원 중환자실이었다. 매캐한 소독 냄새가 몸과 마음을 짓뭉갰다. 병상으로 어정어정 걸어가 어머니를 내려다봤다. 핏기 하나 없는 얼굴에 깊은 주름이 한가득 고난의 삶이 서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병상에 붙어 앉아 꼬챙이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인제 그만 가면 안 좋겠나.” 자식의 온기를 느낀 어머니의 신음 넋두리가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구름사다리를 올라가려는 어머니에게 이 순간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自愧感이 쓰나미처럼 밀려드는데 얼마 전 병원에 오던 날 어머니의 기억 영상이 아리게 돌아갔다.
“불은 다 껐나, 물은 잠그고….” 자동차 문을 닫지 않고 주문 외우시던 어머니는 급기야 차에서 내리셨다. 왼쪽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데다 시도 때도 없이 앙탈을 부리는 두 무릎을 지팡이로 겨우 달래며 부엌으로 간 어머니는 행주와 걸레를 갖고 나와 빨랫줄에 널며 말했다.
“며칠 비우면 곰팡이 핀다….” 그리곤 땔감으로 쓰려고 언덕 위 밭에 늘어놓은 빈 깻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일 비 올 것 같으니 창고에 넣어라.” 그 깻단은 겨우내 눈비를 맞아 반쯤이나 썩은 것이었다. 깻단이 다 옮겨질 즈음 어머니는 또 장독대로 가셨다. 멸치젓 항아리 뚜껑을 열고 검지로 장을 찍어 쩝쩝 입맛을 다시곤 혼잣말을 항아리에 담았다.
“올해 김장은 정말 맛있겠다.”
집 뒤란 감나무에 터를 잡은 까치 부부가 이런 행동을 낱낱이 내려다보더니 우듬지에 부리를 닦으며 반복해서 물었다.
“며칠 있다가 오실 거죠?” 까치의 물음에 감나무를 올려다보는 어머니 눈가에 이른 봄볕이 반짝거렸다. 뒤란 속을 다 비운 오동나무는 고개를 숙이고 묵언이었다.
오전 내내 씨름 끝에 사립문 나서던 어머니는 당신을 쏙 빼닮아 한쪽 어깨가 푹 기울어진 이십 년 지기 사립문의 어깨를 어루만지고 어루만졌다. 사립문은 구부정한 자세 그대로 고개를 푹 숙이고 제 그림자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어머니는 몇 번이나 사립문과 눈을 맞추고 맞춘 다음에야 자동차 문을 닫았다. 어머니는 병원으로 가는 내내 뒷좌석에 꼿꼿이 앉아 거르지 않던 낮잠도 잊으시고 눈 카메라로 스쳐 지나는 산천을 찍고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