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6

[좋은수필]만어사의 돌너덜 / 황소지

cabin1212 2024. 2. 28. 06:00

 

만어사의 돌너덜 / 황소지

 

 

초겨울 들어 원로 문인 몇 분과 밀양시 삼랑진에 있는 만어사萬魚寺에 다녀왔다. 부산에서 한 시간 남짓한 거리였다. 자그마한 사찰인데 절 앞의 돌너덜이 장관이었다. 부산 근교에는 바닷가라 그런지 고기 어魚 자가 들어간 절이 많다. 포항에 있는 오어사吾魚寺도 있고 신어사, 만어사 등 김해 김수로 왕릉 앞 전각 대문 위에는 물고기 문양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

만어사 입구, 골짜기를 가득 메운 돌너덜은 폭이 약 150m이고 길이가 700m 이상 되는 듯했다. 첩첩이 깔려 있는 크고 작은 돌들은 마치 물고기가 입질하는 듯 고개를 들고 있는 것들이 많았다. 이것들은 주위에 있는 다른 돌보다 유난히 무겁고 단단하다. 다섯 개 중 한 개는 두드리면 청명한 쇠 종소리를 낸다. 이 돌을 종석, 또는 만어석이라 부르기도 한다. 부슬비가 내리는 날이나 운무가 가득 끼어 있는 날, 이곳을 찾으면 물기 닿은 돌들은 살아 있는 물고기가 움직이는 듯하다.

《삼국유사》제3권 <탑상>편의 '어산불영魚山佛影'에는 만어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기원 후 46년(수로왕 5)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왕 때 금관가야 국경지대에 옥지玉地라는 연못에 독룡 한 마리와 다섯 나찰이 서로 사귀면서 돌풍이 불고 우박이 내리는 등, 4년 동안 농민들이 애써 지은 농사를 망치는 온갖 행패를 일삼았다. 이에 수로왕은 주술로써 그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인도 쪽의 부처님께 설법을 청하였다. 부처님은 신통력으로 왕의 뜻을 알고 여섯 비구比丘와 일만의 천인天人을 데리고 독룡과 나찰녀를 항복시키고 가르침으로써 모든 재앙을 물리쳤다. 수로왕은 부처님 은덕에 감사하여 이곳에 사찰을 지었다. 이곳은 예부터 태풍이며 홍수 등, 자연재해가 많았던 지역으로 이런 설화가 있을 법도 했다.

또 《동국여지승람 東國輿地勝覽》과 《택리지》에 따르면 동해에 살고 있는 용왕의 아들은 자기 목숨이 다한 것을 알고 낙동강 건너에 있는 무척산의 신통한 스님을 찾아 새로 살 곳을 마련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스님은 "가다가 멈추는 곳이 인연이 있는 곳"이라 일러주었다. 왕자가 길을 떠나자 수많은 고기떼가 그의 뒤를 따랐다. 왕자가 머물러 쉰 곳이 바로 이곳 만어사라고 한다. 그 뒤 왕자는 큰 바윗돌이 되었고 수많은 물고기들은 작은 돌이 되었다는 것이다.

가야시대 창건되었다고 하지만 지금의 사찰은 고려 중기 명종 때 중창하고, 조선시대 고종 때 중건했다. 이곳은 자그마한 대웅전과 범종각, 미륵전과 삼성각과 요사채가 하나 있는 조촐한 절집이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보물 3층 석탑이 있다. 용왕의 아들이 돌이 된 큰 바위를 모셔 지어 놓은 곳이 미륵전이다. 그 내부에 들어서니 바위가 너무 커서 일부는 전각 밖에 나와 있었다.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아들을 얻을 수 있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한다. 미륵전 아래로 돌너덜이 있고 그곳의 작은 돌들은 미륵전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있다. 부처님 설법을 깨달은 돌은 맑은 쇳소리를 내고 깨닫지 못한 돌은 둔탁한 소리를 낸다고 한다. 절 마당에서 멀리 아래로 내려다보면 운무가 끼인 산이 겹겹으로 이루어져 있어 또 다른 선경을 자아낸다. 어산불영은 돌너덜에도 부처의 영이 깃들어 있고 미륵전각 안에 있는 큰 바위에도 부처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다는 뜻이다.

옛 신라인 경주와 울산 지역에는 남편을 그리워하다 죽어 돌이 된 박제상 부인의 이야기가 있다. 충신 박제상은 《삼국사기》나《삼국유사》에도 나온다. 신라 내물왕이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두 동생을 구해오기 위해 강직하고 계략이 뛰어난 지금의 양산 지역 태수인 박제상을 사신으로 보냈다. 고구려에 가서는 왕을 잘 설득하여 왕자 복호를 구해낸다. 신라왕은 왜국에 있는 다른 동생 미사흔도 구해오기를 청하였다. 이에 박제상은 아내도 만나지 않고 다시 일본으로 떠나는 배를 탔다. 아내는 일본으로 떠나는 배를 보고 통곡하였다. 박제상은 "그대는 다시 나를 만날 생각을 하지 마시오."했다. 그는 일본에서 왕자 미사흔을 신라로 도피시키고 자신은 결국 불태워지는 죽임을 당하였다.

그의 아내 김 씨 부인은 두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 바다 건너 남편이 있는 일본을 향해 슬피 통곡하다 죽었다. 부인과 두 딸은 몸은 죽었지만 돌로 변하여 망부석望夫石이 되었고 그의 영혼은 새가 되어 날아가 바위 뒤에 숨었다고 한다. 그 바위를 은을암隱乙巖이라 하며 암자가 생겼다. 얼마나 간절한 염원이 있었으면 죽어서 돌이 되는 것일까? 가슴속에 있는 돌처럼 결곡한 의지를 후세 사람들은 돌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만어사 앞의 돌너덜을 보고, 용왕의 아들을 따라 수많은 물고기들이 뒤따라왔다고 하지만 물고기들이 어찌 산으로 올라갈 수 있었겠는가. 옛날 이곳 만어사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 민초들이 자연재해에 시달렸을까? 수리 시설이 없었던 그 시절 홍수나 가뭄이 연이어 들면 굶어 죽거나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그들을 덮쳤을 것이다. 민중들은 영험하다는 이곳 절 골짜기로 밀려오지 않았을까? 민중들은 애달프고 간절한 소원을 품었고, 그 지극한 소망에 천지가 감응하여 소원이 이루어지리라 믿고 이곳으로 들어와 결국은 돌이 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