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마른 나무에 비틀린 나뭇가지 /유채연
마른 나무에 비틀린 나뭇가지 /유채연
며칠 전, 산책로를 걷다 나무 한 그루 쓰러져있는 것을 보았다. 자전거에 받히기라도 하였는지 파인 자국이 선명한 나무는 뿌리가 하늘을 향해있었다. 오늘 다시 그 앞을 지나는데 그 사이 나무에는 꽃이 피었다.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져 하늘을 보고 있어도 나무는 꽃을 피웠다. 몸속에 남아있던 양분과 수분 한 방울까지도 모조리 짜내어 꽃을 피워냈을 나무, 문득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른다. 마른 나무가 내 어머니를 닮았다면 어머니를 헤아리지 못한 나는 햇살 좇아 비틀어진 나무 가지이다.
작은 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머니가 쓰러져 응급실로 가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관절염으로 거의를 눕거나 앉아만 계시는 터라 가끔씩 속이 불편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처럼 응급실에 실려 가는 일은 처음 있는 일이다. 제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손을 움켜쥔 채 들어선 응급실은 정신없이 분주했다.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들의 신음소리. 그 가족들. 바삐 움직이는 간호사들 틈에서 작은 체구의 어머니를 발견했다. 철 침대 위에 웅크려 누운 어머니를 보자 눈물이 쏟아졌다. 들키지 않으려 돌아서는데 뒤에서 힘없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하러 왔니.
병명은 노환이었다. 병실로 옮긴 어머니는 조금 전 막 잠이 들었다. 며칠 동안 미음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던 목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난다. 간간이 시골 가설극장 무대 걷을 때나 날 법한, 허망한 망치소리 같은 신음소리가 가슴을 아리게 한다. 가랑잎같이 가벼워진 몸. 자식들에게 다 내어줘 납작해진 가슴. 그 위로 두 손이 떨어진 듯 얹혀있다. 광목이불 속으로 거친 손을 더듬어 자는 아이들 뺨을 어루만지던 손엔, 여러 갈래의 줄이 늘어져 마치 막간을 이용해 쉬고 있는 헝겊인형을 보는 것 같다.
낮술을 마셨는지 발그레한 벚꽃 잎들이 호들갑을 떨며 땅으로 떨어지는 오후, 형제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저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놀랐던 순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어머니에겐 치매도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하늘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서일까, 그 순간 아무도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청천벽력이다. 나는 창가로 가 아무 생각 없이 떨어지는 꽃잎을 세고 있었다. 어디까지 세었는지 자꾸 헷갈린다. 그럼에도 나는 떨어지는 꽃잎을 다 세어야 하는 명령을 받은 로봇처럼 온 정신을 거기에 쏟아 세고 또 세기만을 계속했다.
노인병의 하나인 치매. 당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미로의 세상을 더듬는 어머니를 상상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더구나 지금보다 더 심해지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더욱 큰일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함께 살고 있는 작은언니에게만 모든 것 떠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실은 그리 만만치 않다. 시모를 모시고 있는 큰언니, 병상에 있는 남편을 시중들어야 하는 여동생과 아직 돌봐야 할 어린아이들이 있는 막냇동생, 그리고 시누이들이 많으니 처분만 기다릴 어린 올케, 누구의 사연도 저울질 할 수가 없었다. 저마다 삶의 무게가 큰 것을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선뜻 나서지 못하고 마른 나무가 되어버린 어머니의 무게를 어쩌지 못해 눈치만 보아야 했다. 퇴원 후 어머니는 여전히 병석에 있다. 스스로 수저를 들 수 있다는 것 외에 그다지 만족할 만한 건강을 되찾은 것은 아니다. 예전엔 운동 삼아 서성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것조차 힘에 부치는지 방에 누워만 있으려 한다. 시력도 청각도 전 같지 않아 망가진 소리 하나하나 매만지며 자식들 건강을 챙긴다. 오늘도 숨 가쁜 어머니의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들려왔다. 밥은 먹고 다니느냐, 가없는 어머니의 사랑이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의식의 가닥을 이어 더욱 서두르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당신도 자신의 아픔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어머니를 아직도 곁에 모시지 못하고 있다.
가로수가 차츰 초록빛으로 물들고 있다. 계절은 서서히 무르익는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제 할 일 바빠 내 슬픔 따위에는 아랑곳없다. 잠자듯 조용히 데려가 달라던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소리, 나도 그런 기도를 드린 적이 있다. 누구를 위한 기도이었을까. 부끄럽게도 변명할 자신이 없다. 마지막 힘을 다해 꽃을 피운 나무처럼 인고의 삶 속에서도 꽃을 피워낸 어머니. 나는 그 앞에 본연을 저버리고 햇살 따라 비틀어진 나무 가지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 엄마는 치매 같은 거 안 걸려’ 하던 막냇동생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