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사랑나무 / 김순동
사랑나무 / 김순동
가을의 은해사銀海寺는 짝지은 등산객들로 붐빈다. 일주문을 지나 소나무 숲을 지나노라면 햇빛을 서로 많이 받으려고 키 재기하는 틈새로 빠져드는 햇빛이 은빛 바다처럼 눈부시다. 수많은 외침을 겪으면서도 손상되지 않은 채 지금껏 묵묵히 앉아 있는 백흥암 극락전의 모습은 부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인지 안정감을 준다.
운부암으로 오르는 길옆에는 사랑나무가 있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춘다. 둥치가 비슷한 아름드리 두 나무가 사랑을 속삭이는 듯하다. 왼쪽 나무의 허리쯤에서 나온 가지 중앙 부위가 오른쪽 나무 둥치에 붙어 한 몸을 이룬다. 마치 왼쪽 남자가 팔을 뻗어 여자의 허리를 껴안고 있는 모습이다. 거기다가 접목된 부분은 여인의 얼굴 모양으로 둥글게 부풀어 올라 보는 사람마다 사랑나무임을 의심치 않는다.
한 나무의 줄기가 다른 나무둥치에 맞닿으면 마찰을 일으켜 표피가 손상된다. 손상된 표피에 융합된 세포는 결국 한 몸이 되어 양 나무의 물관과 체관을 공유하게 되어 형성층을 이룬다. 하지만 서로 다른 뿌리는 애써 섭취한 물과 미네랄을 자기 가지에 보내고 잎에서 만든 영양분도 자기 몸에 전달하고 싶을 것이다.
나무둥치나 가지는 원래 아래가 굵고 위는 가늘다. 사랑나무를 자세히 보면 접목 부분 위쪽 가지가 아래쪽 가지보다 훨씬 굵다. 위쪽이 굵은 것은 물관과 체관 사이를 가로지르는 형성층이 더 많이 발달하여 뿌리가 빨아들인 수액과 잎이 합성한 영양분을 골고루 나누어주지 못하고 위쪽 가지에 더 많이 보냈기 때문이다.
접목 부분이 부풀어 올라 사람의 얼굴 모양을 하고 다른 부위보다 검은빛을 띠는 것은 상처 난 수피에서 세포가 융합할 때 형성층이 쏟아낸 끈적끈적한 치유물질이 검게 산화되어 굳은 흔적이다. 어쩌면 영양분을 일방적으로 탈취당하는 스트레스에 북받쳐 간장이 타들어 가 얼굴이 검게 부풀어 오른 것인지도 모른다.
나무는 수액이나 영양분을 물관과 체관의 모세관을 통해 모세관현상으로 이동한다. 강의 주류로 흐르는 물이 많으면 지류의 물이 주류로 빨려 들어가듯 나무도 체력이 강하면 강한 쪽으로 수액이 빨려 들어간다. 우리가 보는 사랑나무는 말 그대로의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다. 어느 한쪽은 사랑으로 위장하여 수혈을 짜가는 도둑이다.
사랑나무의 속 사정을 알고 보면, 마치 사랑나무같이 우리와 붙어있거나 에워싸고 있는 주변 나무들을 생각하게 한다. 같은 대륙에 연결된 한 나라는 겉으로는 가까운 이웃처럼 보이지만 덩치가 크고 힘이 세다는 이유로 우리나라를 침범해 여인들을 납치해가고 땅과 재산을 갈취한 것이 한두 번인가.
또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둔 채 인접해 있는 나라는 사랑나무처럼 위장하여 수혈을 빨아가고 우리의 혼마저 약탈했다. 평온한 우리나라를 불법으로 침공하여 7년 동안이나 전쟁을 치르게 해 삶을 황폐화했다. 그뿐인가 36년의 긴 세월 동안 강점하여 저지른 만행은 백 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때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동족을 남북으로 갈라놓은 계기를 만들더니 그것도 모자라 다시 경제전쟁을 일으킨다.
수액을 뺏고 빼앗기는 사랑나무가 싫다. 수없이 침범당한 아픔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도 대비를 소홀히 하고 당파싸움만 일삼는 위정자도 밉다. 국익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공공연하게 빨대를 꽂아놓고 수혈을 뽑아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것이 안타깝고 슬프다.
나무에 물이 오르는 4월이 오면 위장한 사랑나무처럼 거짓 대의명분을 앞세워 개인의 영달을 꾀하는 위정자를 밝혀내고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망가트린 자들을 솎아내어 희망의 나라를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