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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복사꽃 피는 마을 / 손광성

cabin1212 2025. 4. 27. 06:33

복사꽃 피는 마을 / 손광성

 

 

높은 절개를 귀하게 여겼기 때문일까. 옛 선비들에게 복사꽃은 별로 사랑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어떤 이는 소인배니 요부니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요사스러운 친구라고 하기도 했다. 심하면, "천한 계집 지분 당장을 했지만, 목덜미 솜털은 감출 수 없구나"하고 비꼬기도 했다.

어디 그뿐인가. 송순宋純과 같은 이는, "도리​桃李야, 꽃인 양 마라"하고 아예 꽃의 족보에서조차 몰아낼 기세였다. 좀 심하지 않았나 싶다. 강희안姜希顔이 꽃을 아홉 등급으로 나눌 때에도 복사꽃은 다섯 번째에 들어 있다. 그나마 대접받은 것이라 하겠다.

꽃이 푸대접을 받은 것도 그렇거니와 열매마저 푸대접을 받은 것은 어찌된 영문일까? 밤, 대추, 감, 사과, 그리고 배와 복숭아 이렇게 육과六果중에서 제사상에 오르지 못하는 것은 오직 복숭아 하나뿐이다. 그 생김새 때문일까?​

그러나 서민들은 복사꽃을 사랑했다. 매화니 난초니 하는 것은 남도 지방에서만 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에게는 멋이며 운치보다 화려한 꽃이 더 좋게 보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복숭아나무와 살구나무는 우리들의 고향을 구성하는 데 빠질 수 없는 소재가 되었다.

쇠잔등같이 둥그스럼한 초가집, 비스듬히 돌아간 돌담,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활짝 피어 있는 한두 그루의 복숭아나무의 화사한 자태.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이런 정경은 언제나 잊혀지지 않는 장면으로 떠오르게 마련이다.

어떤 여행가의 말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산다는 중아 아시아 타슈켄트에 갔는데, 그곳이 한인들이 사는 마을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겠더란다. 동구 밖이나 집 주위에 복숭아나무며 살구나무를 심어 놓은 것이 마치 한국의 어느 마을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더라는 것이다.

이역 만리 유랑의 삶이기에 고향이 간절했을 것이고, 그리고 그때마다 눈에 삼삼하게 떠오르는 것은 동구 밖에 핀 환한 복숭아꽃이었을 것이고, 그 복숭아나무를 심음으로 해서 고향을 옮겨올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는 세 가지 애국가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의식 때 부르는 공식 '애국가'이고, 두 번째는 '아리랑', 그리고 세 번째는 '고향의 봄'이라는 것이다. 복사꽃은 이 제3의 애국가에도 나온다. 이처럼 복사꽃은 가장 한국적인 꽃이다.

그리고 또한 가장 한국적인 여인을 상기시키는 꽃이기도 하다. 같은 여인의 얼굴을 보고도 각 나라마다 표현하는 말이 다르다. 서양 사람들은 "장밋빛 고운 뺨"이라 노래하고, 우리나라 시인들은 "복사꽃 고운 뺨"이라고 노래한다. 사쿠라빛 얼굴은 너무 창백하고 장밋빛 얼굴은 너무 강렬하다. 다소곳하면서도 육감적인 얼굴은 복사꽃 얼굴이다​. 홍조를 띤 수줍은 얼굴을 반만 내밀고 웃는 여인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우리는 거기에서 가장 한국적인 여인을 발견하게 된다.

중국 사람들도 복사꽃을 좋아한다. 당나라 현종은 복사꽃이 핀 정원을 좋아했다. 어느 날 복사꽃 한 가지를 꺾어서 양귀비 머리에 꽂아 주면서, "이 꽃이 여인의 교태를 돕는구나!"라고 했다.

벚꽃은 필 때보다 질 때가 더 아름답다는 말이 있다. 복사꽃도 마찬가지다. 봄바람에 흩날리는 복사꽃을 보면서 사랑과 이별, 삶과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예쁜 계집은

흰 이 드러내어 노래하고

가는 허리 하늘하늘 춤을 추라

봄도 어느덧 기울려 하는데

보라,

붉은 비처럼 떨어지는 복사꽃.​

 

이하李賀의 '장진주將進酒의 한 구절이다.

복사꽃 지는 것을 보고도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인생의 반을 헛산 사람이다. 그런 사람과는 더불어 인생을 논할 가치가 없다. 눈물을 모르는 사람일 테니 말이다.

오래전이었다. 우리 집 마당에 이십 년이 넘는 복숭아나무가 두 그루 있었다. 복사꽃이 한창일 때면 친구를 불러 대작하기도 하고, 아니면 혼자서 술을 마시기도 했다. 복사꽃 나뭇가지 사이로 달은 기울고, 바람도 없이 시나브로 지고 있던 분홍빛 꽃잎들​…. 마시고 또 마시다 취해서 일어서면 어느새 옷소매는 꽃 물이 들어 있었다.

​ 복숭아는 그 꽃 색에 있어서나 모양에 있어서도 모두 여성을 연상시키기에 알맞다. 기생 이름에도 도桃자가 많다든지, 성적인 내용을 담은 잡지를 도색桃色잡지라 한다든지 하는 말은 다 이 때문이 아닌가 한다. 홍도紅桃라는 말은 한국 기생 이름의 대명사격이었다.

<삼국유사>에 도화녀桃花女라는 여인이 나온다. 그녀는 신라 사량부의 미인이었다. 그녀가 얼마나 예뻤던지 진지왕은 보자마자 반해 버렸다. 그래서 남편이 있는 그녀를 힘으로라도 상관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너를 죽이면 어찌하겠느냐?"

"차라리 죽을지언정 다른 일은 원치 않습니다."

"네 남편이 없다면 어찌하겠느냐?"

"그러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왕이 죽었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도 죽었다. 그리고 열흘이 되던 날 홀연히 왕이 나타나 말했다.

"네가 이전에 허락이 있었는데 이제는 되겠느냐?"

이에 그녀가 허락하자 이레 동안을 머물다가 갔다. 그런데 그 이레 동안 오색 구름이 늘 그녀의 집을 덮고 향기가 방에 가득했다고 한다.

복사꽃과 물과 여인은 동양에서 낙원을 구성하는 세 가지 기본 요소라 하겠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는 세월의 흐름도 멈추며, 죽음의 불안과 고통도 없고 모두 행복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도연명陶淵命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별천지가 그렇고, 유원태의 이야기가 그러하며, 또 다른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서왕모西王母가 가꾸는 천도天桃는 삼천 년마다 꽃을 피우는데, 이 천도를 한 번 먹으면 얼굴이 소녀 같고, 또 장생불사한다고 한다. 이런 신화가 그러나 그저 근거 없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본초강목>에 보면, 복숭아를 얇게 저며서 말려 포를 만들어 두고 먹으면 안색이 좋아진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너무 많이 먹으면 열이 난다고 한다. 복숭아에는 미독微毒이 있기 때문이다. 또 삼월 삼짓날 꽃을 따서 말려 두었다가 복용하면 안색이 좋아진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세 그루의 복사꽃을 다 먹으면 얼굴이 발그레해지면서 생기가 도는 것이 마치 복사꽃 같다고 한다.

우리 민속에 의하면, 복숭아나무는 주력呪力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병자에게 붙은 귀신을 쫓는 방법이 있는데, 그때 복숭아나무 가지를 가지고 환자를 가볍게 때리면서 경經을 읽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 가지나 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동남쪽으로 뻗은 것이라야 한다.

이런 민속은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이다(일본서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의 아버지 아자나기노미고토가 죽은 아내가 보고 싶어 황천으로 갔다. 죽은 아내가 생전의 모습으로 그를 맞는다. 그러면서 아내는 자신을 보지 말아 달라고 그에게 간청하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인데 그는 아내를 더 보고 싶은 마음에 불을 밝힌다. 그러나 밝은 불빛 아래 드러난 아내의 몸은 퉁퉁 부어오른 채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놀라서 도망친다. 아내를 지키고 있던 귀신들이 그를 추격해 온다. 한참을 쫓기다가 복숭아 밭에 이르렀다. 그는 복숭아나무 뒤에 숨어서 귀신들에게 복숭아를 던진다. 그제야 귀신들이 모두 물러갔다.

우리 민속에서 제사상에 복숭아를 올리지 못하는 것은 이와 같이 복숭아에 귀신을 쫓는 주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 데서 나온 결과가 아닌가 한다. 제사상을 받으러 오던 조상님들이 혼비백산해서 도망가고 말 테니, 그런 불효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복숭아에 귀신을 쫓는 주력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복숭아나무 잎이 구충제로 쓰이는 것은 사실이다. ​

이런 모든 민간 신앙은 그 근원을 신화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중국 신화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아 나온다.

동해에 도도산이라는 섬이 있는데, 그 섬 가운데 큰 복숭아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그 나무에 꽃이 피면 사방 삼천리가 복숭아꽃으로 덮인다. 그런데 그 복숭아나무의 동쪽 가지 사이에 귀신들이 출입하는 귀문鬼門이 있다. 그 귀문에 신도와 울루鬱壘라는 두 형제 신이 있어 그리로 출입하는 귀신들을 감시한다.

밤에 인간 세상으로 나갔던 귀신들은 사경四更이 되어 그 복숭아나무 위에 있는 금계가 울면 그 소리를 듣고 모두 돌아가기로 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이 동쪽 가지의 귀문에 이르면, 밤새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해를 끼친 귀신은 갈대로 꼰 새끼줄에 묶어 호랑이 굴에 던져 잡아먹히게 한다.

섣달그믐날 도부桃符라 하여 복숭아나무 판자에 갈대로 꼰 새끼줄을 들고 있는 두 신상을 조각한 것을 대문 양 기둥에 세워놓고 큰 호랑이 그림을 그려 붙여 놓으면 잡귀가 범접하지 못한다고 믿는 풍습은 이 신화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옛날 서울에서 복숭아꽃으로 유명한 곳은 성북동이었다. 꽃이 만발할 때가 장관이지만 꽃이 피기 전인 2월 하순쯤이면 잔가지들이 온통 비둘기 발가락처럼 발갛게 되는데, 멀리서 보면 밭 전체가 발그스름한 것이 상서로운 기운이 감도는 것 같았다.

일제 시대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기억 속에서 늘 잊혀지지 않는 정경이 있었다면 무엇이었을까? 복사꽃 아련히 피어 있는 고향 마을이 아니었을까?​

 

복사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살구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너 오래오래 정들이고 살던 집

함부로 짓밟힌 울타리에

앵두꽃도 오얏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이것은 박두진朴斗鎭의 시이다. 일제 치하에서 고향을 떠난 동포들이 해방의 날을 만나 돌아오는 것을 꿈꾸며 지은 시라고 한다.

한국 사람들의 신앙에는 낙원이란 개념이 따로 없다. 있다면 우리가 어렸을 때 살던 고향이 바로 유토피아이다. 복사꽃과 살구꽃이 핀 마을이 우리의 고향이고, 그곳이 무릉도원이자 우리의 영원한 유토피아인 것이다.

조선 말기<황성신문>은 복사꽃을 국화로 삼자고 했다. 그냥 웃어넘길 일이 아닌 것 같다. 복사꽃을 국화로 한다는 것은 무릉도원 같은 이상국을 만든다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