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6

[좋은수필]고도 / 송명화

cabin1212 2025. 5. 31. 07:00

고도 / 송명화

 

 

방학이 다가오면 교사들은 생활지도에 더욱 관심을 쏟는다. 올해는 예년에 없던 항목이 하나 더 늘었다. 아이들에게 엘리베이터를 혼자 타지 말라고 당부한 것이다.

유괴나 성폭행이 걱정되어 부모들이나 교사들은 아이들이 눈앞에 보이지 않는 시간 내내 좌불안석이다. 간곡하게 지도를 하고 하교 시켰다. 텅 빈 교실에 혼자 앉아 곰곰이 생각하니 씁쓸하기 이를 데 없다.

우리 조상들은 집안 어른들뿐만 아니라 동네 어른들의 가르침에 힘입어 행동거지를 바로잡았다. 어른이라면 누구나 자기 아이, 남의 아이 할 것 없이 가르치고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 대대로 내려온 우리 민족의 사고방식이었다.

잘못된 행동을 하면 동네 어른들이 나서서 치죄하기도 하고, 좋은 일이 있으면 동네잔치를 벌여 함께 기뻐하였으며, 재주 있는 아이는 내 자식과 함께 가르치기도 하였다. 단지 아무개의 아이가 아니라 우리 집안, 우리 동네, 우리 고을의 아이였던 것이다. 오늘 내가 아이들에게 조심하라고 말한 대상은 과연 누구인가. 한 아파트에 사는 이들조차 경계하라고 가르친 셈이 되고 말았으니.

만학의 한 대학생이 아무도 모르게 죽었다. 부모를 떠나 자취를 하면서 학비를 벌기 위해 노동을 하다가 허리를 다쳐 몸져눕고 말았다.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옆방 학우들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 그렇게 힘들었을까. 허리에 복대를 하고 영양실조의 상태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수순을 자연스레 밟지 못하고 오 개월 동안이나 어두운 방안에 버려진 이승의 육신이 안타까워 그의 영혼은 그 방을 떠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그의 슬픈 최우가 눈에 선하다.

그가 찬 방바닥에 쓰러져 마지막 숨을 몰아쉰다. 점점 힘이 빠지고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형제들, 친구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르는데 그 이름들을 부를 힘이 없다. 주위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을 삶의 군더더기로 여겼던 탓에 이 시간에 자신을 찾아줄 이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한스러워 한줄기 눈물이 바닥을 적신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현대를 소외의 시대라 한다. 시간을 쪼개 쉴 새 없이 움직여야만 잘 사는 것이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어 다른 이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돌아볼 여유를 갖지 못한다. 시시때때로 생경한 시간 속에서 나와 다른 수많은 다양함을 숨 쉬며 현기증을 느낀다.

지하철을 타고서 ​같은 시간에 같이 흔들리는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본 적이 있는가. 동행이 아니라면 사소한 눈인사나 인사말도 삼간다. 아무런 말을 눈에 담지 않고 타인을 쳐다보는 것이 예법처럼 굳었다고나 할까.

화려한 무대에 서지만 오로지 옷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얼굴 표정을 지워야 하는 패션모델들처럼 사람들은 타인을 향한 사진의 표정을 모두 죽였다. 차디찬 이미지를 밖으로 내세우고 안으로는 얼음장처럼 쪼개진 날을 세우고 세련되게 보다 세련되게 우리는 몸을 부대끼면서도 타인을 그냥 지나친다.

공익광고의 한 장면이 충격적이다. 한 소년이 책가방을 메고 집을 들어선다. 엄마의 반김에는 아랑곳없이 무표정하게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를 두드린다. 갑자기 화면에 엄마가 아들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뜬다.

놀라는 아들에게 하는 엄마의 대사가 의미심장하다. '우리 아들하고 대화하려고 엄마가 배웠지.'​ 엄마의 자식을 향한 사랑이 대단하다거나, 직접 화를 내지 않고 엄마가 지혜롭게 대처하였다거나 현대는 엄마는 저렇게 하여야 한다거나 어른이 먼저 마음을 여는 것이 중요하다는 등의 생각보다는 가슴이 괜히 헛헛하였다.

내게도 아들이 있다. 녀석도 컴퓨터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내가 외출했다가 들어와도 등을 보이고 있는 것이 예사다. 아직 어리지만 얘도 광고 속의 아이처럼 자라면 내 눈앞을 무표정하게 그저 스쳐 지나치지 않을까.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라고 부르지만 어떤 수필가는 컴퓨터를 미친 상자로 부르고 싶다고 하였다. 컴퓨터가 가진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이 더욱 활개를 치고, 직접 경험하고 부딪히기보다는 가상공간에 숨어 자신의 자리를 꾸미는 요즘 세태를 그도 걱정하였으리라.

그 대학생의 부모가 집주인과 함께 세상과 단절된 그 방문을 열었을 때의 놀라움을 생각한다. 오랫동안 소식이 끊긴 아들을 찾아온 어머니의 놀라움은 과연 어떠하였을까. 가출을 했던 것도 아닌데 부모와 미혼의 자식 간에 그토록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이 의아하지 않은가. 집주인은 돈을 받고 단지 방을 빌려주었을 따름이었다. 그 대학생과 맺은 새로운 인연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나 보다.

우리도 어느 날 그 대학생처럼 카프카가 우리에게 예언했던 <변신>의 주인공이 되어 있을지 모른다. 마음속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몸부림쳐도 자신의 말은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소리나 신음으로만 존재한다. 남들은 나의 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결국 그 대학생도 자신의 말을 안으로 삼키며 절망이라는 세계 속에 유폐되어 주인공 그레고르처럼 쓸쓸히 떠나지 않았는가.

차가운 컴퓨터 앞에 앉아 가상의 세계에서 미지의 대상과 이야기를 나누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은 남과 같이 있는 순간을 못 견뎌 한다. 입을 다물고 그 시간을 견디기 위해 고군 분투하다가 혼자만의 성으로 돌아오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가상 세계 탐험에 빠져든다. 극단적인 고독 속에 있으면서도 고독을 느끼지 못한다는 데 그 심각함이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명제에 대한 해석을 수정해야 할 시점에 이른 것은 아닐까. ​

아침저녁으로 엘리베이터를 탄다. 남과 공유해야 하는 그 공간이 너무 좁아서 벽 쪽으로 바짝 붙어 서서 변화하는 층 표시 숫자만 올려다보고 서 있다. 마음속에 갈등이 인다. '우리 라인에 사는 분인 것 같은 데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혹시 시큰둥하게 반응해 오면 어쩌지. 이 사람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리면서 기어드는 소리로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하였다. 엘리베이터 안에 남은 이가 뜻밖이라는 듯 인사를 받는다.

이사를 한 지 두 달이 지났는데도 대문을 마주한 앞집 아저씨를 대면하지 못하였다. 서로의 바쁜 생활을 배려하는 마음도 조금 있었고, 남의 생활을 들여다보기 싫은 마음도 있었으며, 우리의 생활을 방해받기 싫은 마음도 한 이유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쑥스럽고 용기가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차 한 잔, 맥주 한 잔 같이 하며 이야기를 트는 것이 예전에는 이렇게 힘들지 않았다. 열 평짜리 작은 복도식 아파트에 살 때 우리 층 사람들은 자주 모여 음식도 나누고 누군가 아프면 서로 반찬도 마련해 주고 매일 같이 안부를 확인하며 한 식구들처럼 정답게 지내지 않았던가. ​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회적인 성취에 마음 뺏기면서, 먼저 손 내미는 것을 잊어버리고 살았다. 외로운 이웃에 대한 뉴스를 자주 보지만 정작 내가 이 세상에서 고도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모두들 섬으로 변해버리면 생을 마감하는 순간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으랴.

사람은 혼자서 왔다 혼자서 간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이 비록 태어날 때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던져졌다 하더라도 갈 때는 누군가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야 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