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무 / 홍억선
어느 여류 작가가 보내온 새해 편지에 '겨울 나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열 줄 남짓한 본문에는 이런저런 덕담만 눈에 띌 뿐 어디에도 겨울 나무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소심한 나는 궁금해지기 시작하였다. 굳이 왜 그런 제목을 서두에 붙였을까?
어쩌면 창 밖의 나무 한 그루를 무심히 옮겨 놓았을지도 모를 그 한 마디를 붙들고 나는 평소 그분의 섬세한 서정에 기대어 오랜 생각에 잠겼다. 가녀린 나목처럼 내가 그렇게 춥게 보였단 말일까? 나는 스스로 부끄러움에 한참 동안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그리고는 구석구석 나의 몸을 되비추어 보았다.
볼 품 없는 외모에 기름지지 못한 얼굴, 중년에 접어들면서 더욱 메말라가는 몸짓이 볼수록 초라하기만 했다. 하지만 편지를 보낸 사람이 삶의 외형만을 꼬집어 남을 부끄럽게 하는 분이 아닐 거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았다. 그렇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새해 벽두에다가 어젯밤에는 눈발마저 분분하게 흩날렸으니 혹시 어느 시인의 시 한 구절을 떠올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겨울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지난 연말, 어떤 모임에서 그분과 처음으로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그날도 문학 이야기는 밑도 끝도 없이 깊은 매너리즘에 끌려 다녔고, 나는 버릇처럼 어줍잖은 단견으로 고집을 부렸다. 나의 고집은 언제나 이길 수 없는 다수를 만나 오기(傲氣)로 전락하였다. 오기는 더 많은 적을 만들고, 그럴 때마다 나는 나의 미약함이 너무나 분하게만 느껴졌다.
나의 문학적 감각은 왜 이렇게 민첩하지 못한 것일까. 나의 눈은 왜 이렇게 먼 곳에 어두운 것일까. 나의 입은 왜 이렇게 향기로운 말소리에 인색한 것일까. 나의 가슴은 왜 이렇게 옹졸하여 많은 것을 담지 못할까. 나의 팔다리는 왜 이렇게 짧아 걸음을 더디게 하는 것일까. 그리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한없이 쓸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의 모습이 그분의 눈에 무척 측은하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분을 떠나 나에게 다가온 위로의 메시지는 겨울 나무에 걸린 바람처럼 나의 남루한 어깨를 감싸안았다. 바람은 따사로워서 나는 쉽게 감동하였다. 나는 온 겨우내 그 감동을 품고 사색에 잠겼다.
나의 사색은 얼었던 몸을 녹이고 막혔던 체관과 물관에 온기를 흐르게 하였으며, 딛고 선 발밑에 스며들어 튼튼한 문학적 구근(球根)을 이루어 나갔다. 나의 허전한 몸에는 푸른 움이 돋기 시작하였고, 팔과 다리에는 새로운 힘줄이 꿈틀거렸다.
나는 나의 새로움에 신기해하면서 이길 수 없는 다수와 만나 콧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었고, 거대한 적들 앞에서도 바람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어느새 나는 짙은 숲 속에서도 강건하게 버틸 수 있는 믿음을 가졌다. 머잖아 봄이 오는 길목에서 문득 그분이 그리워질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쓸쓸함은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쓸쓸함을 견디어 낸 자만이 고독한 나뭇가지에 따뜻한 바람으로 걸릴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힘껏 발꿈치를 돋우어 그분의 자리를 건너다보았다. '겨울나무'라는 제목이 붙은 편지를 꺼내 다시한번 곰곰이 되새겨 보았다. 그 곳에는 사색의 잠에서 서둘러 깨어나 이미 잎이 무성해진 푸른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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