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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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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사이 ㅅ / 박순태 사이 ㅅ / 박순태 바람이 속절없이 불어대는 날이다.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린 잎사귀들에 눈길이 간다. 잎이 춤을 출 땐 나뭇가지는 배경음악이 되어주고 곡예를 할 땐 신경 줄을 놓지 않으면서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불어오는 바람에 춤을 추는 잎은 무희이거나 곡예사가 되기도 한다. 그 가운데 나뭇가지와 잎은 돌풍과 태풍이 휘몰아쳐도 온전한 동반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그 장면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으려니, 낱말도 나뭇가지 잎처럼 둘이 만나 일심동체가 되는 경우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흐르는 내와 그 주변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냇가', 초와 불이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 생긴 '촛불' 제사와 날이 후손을 매개체로 하여 생성된 '제삿날', 그리고 나무와 잎이 인연을 맺은 '나뭇잎…….이 중 '나뭇잎'이란 합성어가 ..
[좋은수필]기차칸을 세며 / 반숙자 기차칸을 세며 / 반숙자 노부부가 가만가만 풀을 뽑는다. 호미를 쥔 손등에 동맥이 내비쳐 쏟아지는 햇살에 푸르게 빛난다. 올봄 내 몸살감기를 달고 사는 남편은 기운이 달리는지 호미를 내려놓고 질펀하게 내려다보이는 들녘에 눈길을 꽂는다.그 들녘을 가르고 기차가 지나간다. 음성역에 정차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것을 보니 화물차인 모양이다. 꼬리가 길다. 디젤기관차로 바뀌기 전에는 기차 소리가 칙칙폭폭으로 들렸었다. 언젠가부터 기차소리는 덜커덕덜커덕하다가 요즘은 뿌우웅 한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기차가 지나가는 기차역을 바라보며 일하는 이 언덕에서는 어려서와 마찬가지로 기치는 장난감이다.무료해지면 노부부는 기차 칸을 센다. 하나, 둘 열하나……. 번번이 숫자를 놓친다. 아니 숫자가 아니라 기차 화물칸이다. ..
[좋은수필]빗방울 전주곡 / 구활 빗방울 전주곡 / 구활 비가 오는 날이면 쇼팽의 전주곡 15번 '빗방울'을 듣는다. 날씨가 흐린 날에도 '어서 비가 오라'고 그 음악을 듣는다. 그 곡을 듣고 있으면 마음에서부터 비가 내린다. 참 좋다. 비가 오면 조금은 쓸쓸하지만 비가 전해 주는 슬픔이 때로는 따뜻한 위안이 될 때가 있다. 그래서 좋다.쇼팽의 '빗방울'을 듣고 있으면 슬픈 일도 없는데 피아노 건반 위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가 괜히 나를 슬프게 한다. 그럴 때면 빗물이 타고 내리는 유리창 앞에 선다. 눈도 흐려지고 마음도 흐려져 슬픔은 더욱 커진다. 이별의 아픔을 앓는 사람처럼 외롭고 처량하다. 슬플 때는 유리창처럼 울어야 한다.'빗방울'을 들을 때미다 두 이미지가 겹친다. 하나는 쇼팽이며 나머지 하나는 나 자신이다. 스물여덟의 쇼팽은..
[좋은수필]빗방울 전주곡 / 구활 빗방울 전주곡 / 구활 비가 오는 날이면 쇼팽의 전주곡 15번 '빗방울'을 듣는다. 날씨가 흐린 날에도 '어서 비가 오라'고 그 음악을 듣는다. 그 곡을 듣고 있으면 마음에서부터 비가 내린다. 참 좋다. 비가 오면 조금은 쓸쓸하지만 비가 전해 주는 슬픔이 때로는 따뜻한 위안이 될 때가 있다. 그래서 좋다.쇼팽의 '빗방울'을 듣고 있으면 슬픈 일도 없는데 피아노 건반 위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가 괜히 나를 슬프게 한다. 그럴 때면 빗물이 타고 내리는 유리창 앞에 선다. 눈도 흐려지고 마음도 흐려져 슬픔은 더욱 커진다. 이별의 아픔을 앓는 사람처럼 외롭고 처량하다. 슬플 때는 유리창처럼 울어야 한다.'빗방울'을 들을 때미다 두 이미지가 겹친다. 하나는 쇼팽이며 나머지 하나는 나 자신이다. 스물여덟의 쇼팽은..
[좋은수필]‘꺾이지 않는 마음’에 대하여 / 정성화 ‘꺾이지 않는 마음’에 대하여 / 정성화 2002년 한일 원드컵은 4강 신화와 함께 우리에게 의미 있는 선물을 남겼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슬로건이다. 비록 스포츠 슬로건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일곱 글자가 가긴 힘은 컸다. 삶이란 사건 사고의 연속이다.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나는 그 일곱 글자를 떠올리곤 했다. 그러면 마음 속으로 한 줄기 빛이 들어오는 듯했다.재작년 월드컵 대회에서 16강 진출이 확정된 순간, 태극전사 두 사람이 펼쳐 든 태극기에는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란 글귀가 적혀 있었다. ‘꺾이지 않는’이란 말속에는 무언인가 우리를 꺾으려 한다는 현실이 들어있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하던 시절이었기에 이 슬로건 역시 큰 주목을 받았다.3..
[좋은수필]낙양의 동쪽, 강 흐르다 / 박시윤 낙양의 동쪽, 강 흐르다 / 박시윤 산야를 훑고 지나온 물이 몸집을 불린다. 완만한 초입을 지나, 굽이굽이 치며 넘어온 길이 어찌 평안하였다고만 할 수 있겠는가. 이 땅의 지맥을 따라 흐르던 기운이 모여, 어느 골짜기에서 샘을 이루었을 게다. 한 방울 한 방울의 물이 미미하게 발원하여, 겨레의 마음을 담고 예까지 흘러왔을 게다.그간 바닥에 뉘인 몸은 만신창이가 되고도 남았을 터인데, 어찌하여 그 흔적 다 감추이고, 이리도 맑게 세상을 담그고 있단 말인가. 사내의 가슴에 한 번쯤은 애간장 녹이며 안기었을 여인의 애틋한 사랑이기도 하고, 때로는 땅의 기운을 쫓아 강하게 달음질치는 대장부의 무서운 기세였겠지.물빛은 지금, 조용히 나를 투영하고 있다. 떠밀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나를 담그고 있다. 나는..
[좋은수필]낡은 집 / 유영자 낡은 집 / 유영자 집수리를 시작했다. 햇수로 삼십 년을 넘긴 낡은 연립주택이다. 이 집에서 아들을 낳았으니 아들 나이보다 한 살이 더 많은 집이다. 사는 동안 부동산 붐이 일어 집에 비해 비싼 값을 주겠다고 팔라는 권유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귓등으로 들었다. 무엇이든 손에 쥐면 바들거리고 그게 전부인 양 놓지 않았다. 내 삶도 그랬다. 이만한 집에서 요만큼 사는 것도 내 분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그동안 이 다세대주책 네 가구에 주인들이 여러 번 바뀌었다. 우리가 처음 입주한 채로 남아 있는 유일한 본토박이이다. 그러나 우리도 해운대로 이사를 가서 10년을 살다가 다시 이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 전에는 아래층 102호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내가 아파서 누워있을 때에 할머..
[좋은수필]말은 입체다 / 정성화 말은 입체다 / 정성화 어느 환자를 두고,"암입니다. 6개월 생존율이 5%이고 현재로선 치료법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의사 A와,"어려운 상황이긴 하나 현대 의학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니 조만간 좋은 치료 약이 나올 겁니다. 그때까지 저와 함께 버텨봅시다."라고 말하는 의사 B가 있을 때, 환자는 어느 의사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고 싶을까.남편 중에도 A타입과 B타입이 있다. 아내가 저녁밥을 먹은 뒤 배가 살살 아프다고 할 때, TV 화면에 눈을 고정시킨 채 "많이 먹을 때 알아봤다."라며 이죽거리는 남편이 있는가 하면, 다가와서 "어디가 어떻게 아프냐?"라고 물어보고는 우선 약이라도 먹어보자며 약병 뚜껑을 열어 드미는 남편이 있다. 인간관계는 대개 이런 말에서 시작되고 말에 의해 그 향방이 정해지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