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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몽돌발이 / 이원길 몽돌발이 / 이원길 호롱 속에 고향이 들어있다. 내가 놀았던 동계수 그 명랑한 여울물과 구름들 드넓은 논밭을 호롱도 보았고, 내가 젊은 부모님, 처녀 적의 누나들과 자라 등반한 초가 울타리 안에서 맴돌았던 푸른 시절을 이 호롱도 함께 지냈다. 또 옛날을 그리는가. 깜박깜박, 거실 진열장에서 호롱이 졸고, 나도 덩달아서 세월의 강을 거슬러 오른다.조왕신을 모신 면경面鏡같은 부뚜막, 닳도록 매만져서 자르르 윤기 흐르는 옹달솥, 소댕이 열리고 그을음이 박쥐처럼 매달린 서까래까지 김이 솟구치고 나면 곧 들어오던 소박한 저녁상, 늦은 저녁 짓느라 서두르는 어머니의 손길은 오직 안방 구멍창에서 가늘게 비치는 호롱 불빛에 의지했다.별 하나 비치지 않는 마른 논바닥에 겨우 사름을 한 벼 이파리가 끼니 거른 자식처럼 ..
[좋은수필]어느 벽화 이야기 / 김재희 어느 벽화 이야기 / 김재희 분명 잘못된 그림이었다. 어느 산사에서 절 안팎을 둘러보며 벽화를 감상하고 있는데 좀 잘못 그려진 부분이 있었다. 왜 저렇게 그렸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알고 있는 상식과는 다른 그림이었다.『빈두설경 賓頭設經』에[우물 안의 나그네]라는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미쳐서 날뛰는 코끼리를 만나 도망치다가 우물 속으로 피신을 하게 되는데 마침 우물터에 있는 등나무 줄기를 타고 들어가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물 밑을 내려다보니 무서운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며 먹잇감을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밖에는 성난 코끼리요, 안에는 독을 품은 독사니 진퇴양난이다. 간신히 등나무 줄기에 생명을 걸고 버티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쥐들이 그 줄을 갉아먹고 있지 않는가. 이러지..
[좋은수필]기다림 / 김정순 기다림 / 김정순 등대섬에 어둠이 내린다. 푸른 바다도 붉게 물들더니 이내 어둠에 젖는다. 섬마을엔 하나 둘 등불이 걸리고 하얀 등대에도 불이 켜진다. 수평선 위로 열이레 둥근달이 조용히 떠오른다. 오늘 밤도 온통 달빛으로 잠기게 하려나 보다.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여행을 왔다. 어머니와 단 둘이서 긴 여행을 하기는 처음이다. 어쩌면 이 여행이 어머니와의 마지막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깝다. 아흔을 바라보는 어머니가 얼마나 더 내 곁에 살아 계실지 모를 일이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해변으로 나왔다. 달빛 속의 어머니를 보니 가슴 저렸던 아련한 기억이 비다가 은막인 양 영상처럼 다가온다. 잊을 수 없는 그날 밤도 숨 막히도록 달이 밝았었다.잠을 자다 오줌이 마려워 잠에서 깨어났다. 윗목의 ..
[좋은수필]물소리를 들으며 / 허창옥 물소리를 들으며 / 허창옥 혼자 앉아서 물소리를 듣는다. 그 시원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물은 내 눈앞에서 두세 번 꺾이며 떨어져서 소沼에 잠긴다. 영국사 가는 길, 내 발걸음으로는 숨이 찰 즈음에 삼단폭포를 만났다. 폭포는 높지 않고 물줄기도 세지 않다. 마찬가지로 소도 둘레가 크지 않고 깊이도 얕다. 작고 조용한 폭포, 오히려 쉬기에 편안한 느낌이다. 평상처럼 펀펀한 바윗돌에 홀로 앉아 있다. 이제 막 돋아나는 새잎들의 투명한 초록으로 천지가 눈부시다. 물은 연신 떨어져서 포말로 퍼지고 소는 그 물을 받아안는다. 물은 소에 이르나 한 쪽이 터져 있어 또 어디론가 흘러내린다. 그러니 소는 더함도 덜함도 없이 마냥 그대로이다. 품었으나 다시 흘려보내니 소는 아주 편안해 보인다.소는 그 속을 훤히 드러내..
[좋은수필]네가 누리는 축복을 세어 보라 / 장영희 네가 누리는 축복을 세어 보라 / 장영희 얼마 전 어느 잡지사와 인터뷰를 했다. 최근 몇 년간 나에 대한 기사는 거의 암 환자 장영희, 투병하는 장영희에 국한되어 있어서 그냥 인간 장영희, 문학 선생 장영희에 맞춰 줄 것을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나는 열심히 문학의 중요성, 신세대 대학생들의 경향 등등을 성의껏 말했다. 그런데 오늘 우송되어 온 잡지를 보니 기사 제목이 '신체장애로 천형天刑 같은 삶을 극복하고 일어선 이 시대 희망의 상징 장영희 교수'였다.'천형 같은 삶?' 그 기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난 심히 불쾌했다. 어떻게 감히 남의 삶을 '천형'이라고 부르는가. 맞다. 나는 1급 신체장애인이고, 암 투병을 한다. 그렇지만 이제껏 한 번도 내 삶이 천형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사람들은 ..
[좋은수필]인테그랄 / 유성은 인테그랄 / 유성은 남편과 나는 고집이 세고 까다롭고 자존심이 강하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단 세 가지 공통점이다.우리는 지구 반대편에서 만났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운명이라고 불렀다. 어쩌면 너무 평범한 만남을 더 그럴싸한 의미로 채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첫눈에 반한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편의점 가판대에서 색다른 과자봉지를 한 번쯤 집어 보고 싶은 유혹 같은 것이었다.그의 썰렁한 농담에 내가 박수를 치며 웃게 되었을 때, 차비를 아끼려고 늘 걸어서 다니던 그가 불현듯 저녁을 사겠노라 했을 때 우리의 관계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뜨겁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재채기만큼이나 숨겨지지 않았던 설렘, 상대의 의미 없는 행동에도 심장을 쓸어내렸던 떨림. 우리는 그것을 섣불리 사랑..
[좋은수필]나의 글방 / 정성화 나의 글방 / 정성화 초등학교 시절, 방 두 칸에서 여덟 식구가 살았다. 두 칸이라 해도 중간의 미닫이문을 열어젖히면 방은 하나가 되었다. 방 모퉁이에 둥근 양은 밥상을 펴놓고 숙제를 했다. 그때마다 어린 동생들이 달려와 밥상 다리를 잡아당기거나 밥상을 뒤집었다. 앉은뱅이책상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가구보다 공간에 대한 갈망이었다.가정을 이루고도 한참 동안 나만의 방을 갖지 못했다. 그래도 늘 무언가를 썼다. 말로 하는 것보다 그게 편했다. 식구들이 잠든 시간에 식탁에 앉아 글을 쓰다 보면 어느새 날이 밝아왔다. 친정엄마가 입원해 있는 동안에는 엄마가 잠든 후 환자 휴게실에서 글을 쓴 적도 있다. 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때는 장소 같은 게 문제 되지 않았다.지금 나의 글방은 ..
[좋은수필]향내 품은 툇마루 / 김순경 향내 품은 툇마루 / 김순경 좁고 가파른 길이 산속을 파고든다. 어둠이 사라지자 치열하고 분주했던 숲속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조용하기만 하다. 촌부의 손등처럼 거친 껍질의 소나무들도 깊은 잠에 빠진 듯 서로 엉켜 있다. 산허리를 돌 때마다 마주치는 구불구불한 계곡길이 묵혀두었던 숲의 사연들을 토해낸다.마지막 능선을 넘어서자 멀리 기와지붕 용마루가 나타난다. 산줄기가 감싸고 있는 양지바른 곳이라 온종일 햇살이 머무는 아늑한 지형이다. 큰 절이 있었던 넓은 빈터에는 기와집 몇 채만 흩어져 있고, 작은 연지에는 누렇게 말라버린 연꽃 줄기들이 화려했던 지난여름을 말하는 듯 얼음을 뚫고 솟아있다. 개목사開目寺를 제대로 찾아왔다.원래는 흥국사였다. 통일신라 초기에 세워진 절이다. 의상대사가 신통한 묘술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