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5 (997) 썸네일형 리스트형 [좋은수필]이옥설(理屋說)/ 이규보 이옥설(理屋說)/ 이규보 오래되어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낡은 행랑채 세 칸이 있었는데, 나는 부득이 그것을 수리하게 되었다. 그 중 두 칸은 비가 센 지 오래 되었는데, 나는 그것을 알고도 어물어물하다가 미처 수리하지 못한 것이고, 다른 한 칸은 한 번밖에 비를 맞지 않았지만 이번에 같이 수리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수리하고 보니, 비가 센 지 오래된 것은 서까래, 추녀, 기둥, 들보가 모두 썩어서 못 쓰게 되어 경비가 많이 들었고, 한 번밖에 비를 맞지 않은 것은 재목들이 모두 완전하여 다시 쓸 수 있었기 때문에 경비가 적게 들었다. 나는 이에 느낀 것이 있었다. 사람의 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잘 못을 알고서도 바로 고치지 않으면 곧 자신이 나쁘게 되는 것이 마치 나무가 썩어서 못쓰게 .. [좋은수필]동백꽃 피는 소리 / 박금아 동백꽃 피는 소리 / 박금아 겨울 꽃시장에 갔다. 동백 송이에 눈길이 머물렀다. 잎선이 보드라운 향동백이 도시 귀부인이라면, 붉은 동백은 바닷바람에 손등이 터진 섬 아낙을 닮았다. 꽃집 주인은 향동백이 인기라고 했지만, 나는 저만치에 혼자 앉은 붉은 동백 분憤을 품에 안았다. 꽃송이 한 개를 틔웠을 뿐인데 온 집안이 동백 꽃잎으로 그득했다. 올망졸망한 꽃망울들도 머지않아 꽃을 터뜨려줄 것이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맺혔던 꽃이 지고 말았다. 절정의 순간에 제 몸을 통째로 비워버리는 결단이라니.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떨어져 누운 꽃송이가 오래도록 붉었다. 꽃이 져서도 또 한 번 바닥에서 핀다는 동백, 짭조름한 갯냄새 속으로 꽃잎에 접힌 기억의 시간이 열리고 있었다. 봄이 오는 길목이면 고향 노.. [좋은수필]질문하는 인간 / 최민자 질문하는 인간 / 최민자 시험 문제를 마음대로 내도록 한 철학 교수가 있었다. 한 학기 수업 내용 중 가장 중요하다 생각하는 문제를 스스로 내고 거기에 맞는 답까지 써내라는 시험이었다. 자문자답自問自答이라, 이렇게 쉬운 시험이 있을까. 처음엔 그렇게들 생각했을 것이다. 결과는 의외였다. 답만 쓰는 시험보다 학생들은 더 난감해했다. 출제가 어렵다며 백지로 낸 학생까지 있었다. 친구인 교수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다. 질문도 알아야 하는 법, 질문하는 수준을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 욕구를 거세당하고 던져주는 먹이에만 익숙해진 애완견은 제가 먹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인간이 침팬지와의 경쟁에서 승리한 이유가 야구를 잘해서라는 우스개 이야기가 있다. 스피드와 제구력을 겸비한 인간의 던지기 실력이 돌이나 .. [좋은수필]혼즐과 베프 사이 / 서 숙 혼즐과 베프 사이 / 서 숙 혼자 먹으려고 그럴듯한 요리를 하여 예쁜 그릇에 담아 테이블 세팅을 한 기억이 내겐 없다. 그런 준비는 언제나 타인과 같이하려 할 때였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다르다. 혼자 밥 먹고(혼밥) 혼자 술 마시고(혼술) 혼자 놀고(혼놀) 혼자 영화 보고(혼영) 혼자 여행하고(혼행)…. 혼자 즐기는 ‘혼즐’이 시대의 흐름을 타고 있다. 홀로 자신만을 위한 쿠킹을 하며 즐겁다는 것이다. 찻집이나 식당에는 탁자가 벽이나 창에 붙어 있어서 혼자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부쩍 많아졌다. 소위 혼밥족이 늘어나는 추세를 반영한다. 사람들은 점점 타인과 생활을 나누는 것을 불편해한다. 자신의 공간에 남의 숨결, 남의 자취를 남기는 것은 싫다.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고 싶다. 간섭이나 구속은 질색이다... [좋은수필]기억을 돌려주세요 / 임만빈 기억을 돌려주세요 / 임만빈 나는 뇌혈관병을 주로 다룬다. 병의 성격상 젊은 환자들보다 나이 드신 분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할머니들이 많은 편이다. 오늘도 한 할머니와 실랑이를 했다. “의사양반, 왜 이렇게 기억력이 없는 겨? 불안해서 살 수가 없네. 어제도 친구 집에 가서 빌려준 돈을 받아 지갑에 넣고는 그것을 그대로 두고 왔잖아. 친구 집에 두고 왔기에 망정이지 다른 곳에 뒀더라면 어쩔 뻔했어? 머리를 수술하면 모두 이렇게 기억이 없어지는 건가?” “아이고, 할머니 또 머리 수술 탓하시네요. 감기에 걸려 머리가 아파도 머리 수술 탓, 나이 들어 기억이 없어지는 것도 수술 탓이라고 하면 제가 좀 억울하잖아요?” 나는 기억력 상실에 효과가 있다는 약을 처방해 드렸다. 얼마 전 아파트 현관문을 들어서는데 .. [좋은수필]발걸음 소리 / 김창식 발걸음 소리 / 김창식 다세대 주책 1층으로 이사했다. 집 주변은 '쓰레기 천국'이었다. 정화조 냄새가 불안정한 음표처럼 떠돌았다. 길고양이가 눈치를 보며 차 밑으로 숨어들었다. 이삿짐 정리하느라 한동안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전에 살던 아파트에 무엇을 놓아두고 온 것 같은 석연치 않은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딱히 중요하지는 않은데 그렇다 해도 확인을 해야 마음이 놓일 법한 물건, 정황 아니면 사건, 그것도 아니라면 자취나 흔적, 혹 소리? 이사를 한 달여 앞두고 있을 무렵이었다. 한밤중 섬뜩한 기척에 잠이 깨었다. 숨죽여 귀를 기울인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나 해서다. 발걸음 소리 때문에 잠을 깼는지도 모르겠다. 사위는 적막하고 괴괴한 기운이 흐른다. 아파트 끝집이고 침실은 복도.. [좋은수필]너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날 버리고 떠나지 마" / 구활 오귀스트 로댕의 '키스'를 보기 위해 올림픽 공원 소마미술관을 찾았다. 관객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 '키스'라는 기사를 읽고 이번 기회에 로댕의 섬세한 끌질과 망치질을 눈 속에 가득 채우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키스'란 작품은 너무 섬세하고 아름다워 내게는 버거운 상대였다. 글깨나 쓰는 선비들이 시를 지으려면 금강산을 찾았지만 거대한 자연에 압도당해 글 한 줄을 읊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렸다는 옛 일화와 궤를 같이 한다. 나는 명화전을 보러 갈 때마다 대어를 낚을 준비를 했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남들이 잔챙이 취급하는 소품들이 오히려 내게는 월척이었다. 갈 때마다 그랬다. 명화에 나름대로 이야기를 입힐 수 있는 작품이라야 내 스스로 빠져들어 글 한 편이라도 쓸 수 있지만 이미.. [좋은수필]존재는 외로움을 탄다 / 최민자 존재는 외로움을 탄다 / 최민자 이른 새벽, 이슬이 맺힌 풀숲 사이로 나는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멀리서 들려오는 계곡물 소리가 간밤 불면으로 멍해진 머리 속을 차고 맑게 헹구며 지나간다. 밤새 열변을 토하던 벗들은 아직도 깊이 잠들어 있다. 세상과도, 자기 안의 고독과도 화친하지 못한 채, 짧은 삶을 마감해야 했던 한 작가에 대하여 사람들은 제각기 할 말이 많았다. 숲으로 향해 가는 내 발걸음을 마른 풀 줄기가 잡아당긴다. 아직 이르니 동틀 때까지 기다리라는 건가. 괜찮다고, 머지않아 해가 떠오를 거라고, 달래듯 어르듯 헤치며 걷는다. 늦도록 두런대는 사람들 때문에 잠을 설친 숲의 정령들에게는 돋쳐 오르는 이른 햇살이 그다지 반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골짜기 사이에 가로놓인 나무다리를 건너간다. 나무가 .. 이전 1 2 3 4 ··· 12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