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5 (997) 썸네일형 리스트형 [좋은수필]어느 유기견의 원칙 / 최지안 어느 유기견의 원칙 / 최지안 우리 집 맞은편에는 집이 두 채 있다. 왼쪽 집은 울타리가 낮다. 마당엔 배롱나무가 초여름부터 가을까지 진분홍 꽃을 피운다. 이 집엔 아이들 셋을 둔 부부가 산다. 자주는 아니지만 아이들이 나와서 공놀이를 하거나 배드민턴을 친다. 골목에서 들리는 아이들 소리는 언제나 기분을 좋게 한다. 초등학교 1학년인 막둥이가 징징 우는소리도 좋다. 그 소리를 들으면 아이들이 가득했던 옛날 골목길 생각이 난다. 배롱나무집 여자는 음악선생님이다. 소곤소곤 말하는 그녀와 가끔 마주치면 인사도 하고 한참씩 서서 얘기도 나눈다. 내가 아이들에게 책을 주면 우리에게 과일을 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먹을 것이 오고 가는 사이가 되었다. 오른쪽 집은 옹벽 위에 담장이 있다. 올려다보는 사람에게 위.. [좋은수필]눈물은 낯을 가린다 / 조이섭 눈물은 낯을 가린다 / 조이섭 눈물은 낯을 가리나 봅니다. 여자들은 화장실에서 물 틀어 놓고 울고, 중년 남자들이 마시는 소주잔의 반은 눈물로 채운다잖아요. ‘눈물 없는 세상’이 왔으면 하고 바라는 이들이 많습니다. 기쁘고 좋아서 흘리는 눈물보다 슬프거나 억울해서, 서럽거나 외로워서 우는 사람이 많아서 일 테지요. 눈물 없는 세상이 하늘에서 툭 떨어지기를 기다리느니,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내 맘대로 펑펑 울 수 있는 눈물 방이라도 하나 만들어 볼까 싶네요. 이이들은 언제 어느 때 가리지 않고 제 울고 싶으면 울고, 좋으면 웃습니다. 어른들은 그렇지 않고 웃거나 울 때 눈치를 살핍니다. 다른 사람의 좋은 일에는 박장대소하지만, 나에게 웃을 일이 생기면 주위에 슬픈 사람이 없는지 기색을 살핍니다. 울고.. [좋은수필]정선 장날 / 우명식 정선 장날 / 우명식 작년 이맘때 일입니다. 장마철이라 장사도 안 되는데 보고지운 마음이나 달래자며 다녀가라는 큰언니의 엄명이 떨어졌습니다. 득달같이 달려가 세 자매가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어둑발 내릴 무렵, 마른 쑥으로 모깃불 피워놓고 평상에 앉았습니다. 소쿠리에는 갓 쪄낸 옥수수와 감자가 더위에 지친 미각을 자극했습니다. 갈래머리 팔랑대며 꽃처럼 고왔던 언니들은 어느 사이 지명의 고개를 넘어 이순의 문턱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온몸에 세월의 흔적을 오롯이 담고 서로 바라보는 애틋한 시선으로 가슴이 짠했습니다. 몇 해 전만 해도 의상실을 하던 큰언니가 불황으로 가게를 처분하고 짐수레에 옷을 싣고 다니며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큰언니의 옷은 시골 아주머니들이 즐겨 찾는 편한 동대문표입니다. 어엿한 의상실 주.. [좋은수필]마침표는 시작이다 / 정근식 마침표는 시작이다 / 정근식 글을 쓰다가 마침표를 찍었다. 글이 완성되어서가 아니라 한 문장이 끝이 나서 작은 점을 찍었다. 마침표는 끝이라는 뜻이지만 쉬어가는 쉼표와 의미가 비슷하다. 다음 문장을 시작하기 위해 앞 문장을 마무리하고 잠시 쉬어가라는 표시이다. 한편의 글에서 진정한 마침표는 마지막에 찍는 점 하나밖에 없다. 마침표가 모여 한편의 글을 완성하듯이 우리 삶 역시 퇴직, 졸업, 이혼, 죽음 등 크고 작은 마침표를 겪어야만 완성이 된다. 인생이란 대하드라마에서 쉼표의 의미인 마침표는 새로운 변화다. 변화는 희망과 두려움이 함께 존재한다. 새로운 변화에 좌절하는 사람도 있지만, 변화에 적응하여 새 삶을 잘 꾸려가는 사람도 많다. 글을 읽을 때 호흡을 편하게 하고 글의 흐름도 좋아지게 하는 마침표처.. [좋은수필]불청객을 위하여 / 권현숙 불청객을 위하여 / 권현숙 그에게서 불쑥 탄성이 터진다. 그의 검지가 베란다 창문을 덮고 있는 머루 덩굴을 가리킨다. 내 눈길이 그의 손가락을 좇는다. 아, 산새들이다. 머루 덩굴에 앉아서 제 것인 양 머루를 따 먹고 있다. 회갈색의 몸통에 꽁지가 길고 날렵한 모양새가 낯설다. 높고도 경쾌한 소리가 꽤나 소란스럽다. 녀석들은 수시로 날아든다. 맨 처음 혼자 왔던 녀석이 노다지를 발견했다고 소문이라도 낸 것일까. 이제는 아예 떼로 몰려온다. 우거진 머루 덩굴이 시끌벅적하다. 흔치 않은 광경을 놓칠세라 부리나케 카메라를 찾아든다. 하지만 매번 녀석들의 눈치가 더 빠르다. 우리의 시선을 느꼈는지 일시에 푸르르 날아가 버린다. 녀석들의 머루 서리 현장을 제대로 훔쳐보고 싶었는데 허탈해진다. 은근히 약이 오른다.. [좋은수필]섬 / 김희자 섬 / 김희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섬이다. 우주의 중심에서 실재하는 지구 또한 외딴 섬이요.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저마다 혼자인 섬이다. 우리 삶도 섬이 되는 날이 있다. 어부의 통통배를 얻어 타고 앵강만을 건너 노도에 섰다. 노도는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채 티끌처럼 떠 있는 섬이다. 실타래 같은 인연으로부터 탈출의 욕구에 시달릴 때는 차라리 세상만사와 아득히 먼 섬이 되고 싶을 때가 있다. 사람들 속에서 중심을 잡아보지만 외롭기는 매한가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 섬에 오고 싶었다. 그리움도 병인 양 부딪혀서 환상을 깰 수 있다면 차라리 그 편이 낫다. 비우고 털어 낸 자리에 또 다른 것이 채워지듯 새로운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 삶에도 여백이 필요하다. 구운몽의 배경이 되었던 앵강만은.. [좋은수필]화해 / 허복희 화해 / 허복희 어린아이가 새끼 참새를 붙잡았다 아이의 엄마가 그걸 보고 웃고 있었다 참새의 엄마도 그걸 보고 있었다 지붕에서 울음소리 참으려 보고 있었다 -가네코 미스즈, 『참새의 엄마』 우연히 마주친 『참새의 엄마』란 시 한 수가 강아지 ‘하나’를 데려오던 우리 가족들의 무정한 모습 같아 가슴이 아리다. 말 못하는 동물이라고 감정도 없진 않을 터인데 이별 연습도 없이 덥석 데려왔으니 얼마나 놀라고 두려웠을까? 강아지와 한 식구가 된다는 기쁜 마음에 두려움과 공포에 떨었을 강아지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낯선 사람들과 어디로 향하는지, 새끼를 떠나보내는 어미 개의 가슴은 또 얼마나 억장이 무너졌을까. 강원도 홍천에서 ‘하나’를 처음 데려오던 날, 너무나 달떠서 강아지를 품에 안고 돌아오는 다섯 시간.. [좋은수필]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 이상국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 이상국 1. '사랑을 쓸쓸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뒤돌아보고 있는 사람이다. 사랑의 현기증이 지나간 마음의 흉터들을 어루만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것이 시작되던 순간의 설렘과 그것이 익어가던 날의 황홀과 그것이 못 견딜 그리움이 되던 날과 그것이 무너져 내리던 날의 절망과 긴 그림자까지 사랑의 전경(全景)을 아주 멀리에 깔린 노을처럼 천천히 고개 들어 바라보는 사람이다. 이제야 사랑의 진상(眞相)이 보인다. 그 피의 광기들이 뿜어 올린 과장법과 신기루가 거기 실감 나는 영상이 되어 서성거린다. 문득 이런 생각이 따라 올라온다. 정말 그 사람은 나를 사랑했던 것일까? 혹시 내가 내 사랑에만 취해 그 사람을 괴롭히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는 다만 내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한.. 이전 1 2 3 4 5 6 7 ··· 12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