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5 (997) 썸네일형 리스트형 [좋은수필]편지 / 정임표 편지 / 정임표 편지를 받아 본지가 까마득하다. 편지를 주고받을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된 탓도 있지만 마음을 나눌 상대가 없어진 탓이기도 하다. 가끔 문우님들로부터 수필집을 배달 받는다. 책을 받았으면 읽고 그 소회라도 적어 답을 해야 하는데 그냥 책상머리에 두었다가 손에 잡힐 때마다 대충대충 읽고는 만다. 참으로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편지를 보내는 것은 마음을 보내는 것이다. 책을 주는 것도 마음을 주는 것이다. 나의 내면을 이해할 만하다고 내 속마음을 나눠주는 것이다. 저 사람이라면 통할 것 같은 마음, 공감할 것 같은 마음,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느껴지는 마음들이 있어서 편지를 쓰고 책을 보내는 것이다. 편지를 쓰지 않는 세상이 오고부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지함이 사라졌다. 모두들 핸드폰을 .. [좋은수필]자기만의 방 / 김정화 자기만의 방 / 김정화 단. 칸. 방. 어릴 적 우리 집은 방이 하나밖에 없었다. 들판 한가운데 내려앉은 둥근 초가지붕 하나. 마당과 경계 없이 사방으로 탁 트인 논과 밭. 새들의 울음을 싣고 흐르던 낮고 긴 강. 둥글게 그어졌던 지평선 그림자. 그리고 네 식구가 누우면 군불이 약해도 훈훈하기만 했던 방. 내가 태어나 이십 년 동안 살았던 그곳은 어머니의 자궁처럼 편안했다. 방 안에 켜둔 호롱불은 밤이 깊도록 꺼지지 않았다. 가끔 겨울바람이 문풍지를 흔들면 그을음을 내는 불꽃은 바람에 밀렸지만, 독서나 바느질을 방해하진 않았다. 시골 외딴집까지 전기선이 닿으려면 따로 전봇대를 세워야 한다고 했다. 우리 집에 그런 큰돈이 있을 리 없었다. 매일 호롱에 석유를 붓고 불을 댕기는 일은 내 몫이었다. 어쩌다 마.. [좋은수필]불 꺼진 방 / 심선경 불 꺼진 방 / 심선경 퓨즈가 나간 방은 삽시간에 어두운 숲이 된다. 고사목 덩치처럼 벽 한쪽으로 길게 누운 소파에 얼른 올라앉아 고개를 조아리는 내 모습은 수풀 더미 아래로 황급히 몸을 숨긴 채 웅크린 작은 산짐승의 형상이랄까. 길이란 길은 모두 지워지고 숲을 점령한 어둠에 항거하는 것은 푸르디푸른 잎새를 기억하는 단단한 그리움들뿐이다. 때로는 바람과 몸을 섞은 나무들 서넛, 그 흔적을 애써 잊으려는 듯 고개를 떨군다. 지난가을, 창밖에서 활활 불타던 단풍나무는 참다못해 그 열기를 몸 밖으로 마구 뿜어내었다. 하지만 사랑의 흔적을 아무도 죄라고 나무라지는 않았다. 가을 나무들이 잎새를 빨갛게, 혹은 샛노랗게 물들이는 것은 그리움의 상처를 감추기 위한 그들만의 위장술인지도 모른다. 낡은 퓨즈가 끊어져 버.. [좋은수필]다시 시작 / 김은주 다시 시작 / 김은주 목화가 툭 하고 고개를 꺾었다. 경주서 얻어 온 씨앗이 돼 피우고 다시 살아나 여러 해 나의 뜰에서 산다. 솜이 칭칭 감긴 씨앗 몇 알을 누구에게 받아 왔는지 통 기억에 없다. 백련이 지고만 어느 논둑에서 받은 기억은 아련한데 누구였는지 무슨 일로 연 밭에서 목화씨를 건넸는지 아득하기만 하다. 마른 기억은 바람에 사라졌지만 해마다 야무진 검은 씨앗을 쓰다만 종이에 싸 확독에 보관해 둔다. 옹기에서 겨울을 난 씨앗은 봄이 되면 다른 일년초와 함께 뜰 여기저기 뿌려지는데 그 위치는 꽃 피는 여름이나 되어야 정확히 알게 된다. 마당 귀퉁이에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꽃피우고 지다가 초록이 쓰러지는 이맘때쯤 흰 솜꽃을 피워 존재를 드러낸다. 집 비운 사이 된서리가 다녀간 모양이다. 온통 뜰.. [좋은수필]벌레 / 맹난자 벌레 / 맹난자 욕조에 들어가 샤워기를 집어든 순간 바다에 시커면 벌레가 보였다. 놈은 침입자에 놀란 탓인가, 꼼짝도 않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길이는 5cm쯤, 발이 많이 달린 그리마, 속칭 돈벌레였다. 물을 틀면 곧장 하구로 쓸려 갈 테고, 어쩌면 좋을까 망설이고 있는데 손 가까이에 밥주걱처럼 생긴 발뒤꿈치를 미는 기구가 보였다. 간신히 놈을 거기에 앉히고 욕조 벽면에 밀착시켜 끌어올리기를 시도했다. 도르래를 탄 것처럼 어지러운가, 놈은 중간쯤에 이르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2차 시도도 실패였다. 필사의 탈출인가, 아니면 자포자기인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그놈을 살려서 밖으로 내보내고 싶었다. "너를 다치지 않게 할 거야." 진정으로 말한 뒤 시퍼렇게 질린 몸을 주걱에 담아 다시 한번 시도했다. 벽.. [좋은수필]우화羽化 / 이미경 우화羽化 / 이미경 신평 어른의 과수원에서 연기가 피어오른 건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후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동네 사람들은 과수원 근처의 밭에서 일하고 있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지만 쓰레기나 잡목을 태우겠거니 하며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농촌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과수원 한가운데서 불이 났을 때 어른은 한평생 드나든 과수원이라 손바닥 보듯 환히 안다는 자신감이 앞섰다. 자신의 나이가 아흔넷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물통에 있는 물을 가져와 뿌리고 윗옷을 벗어 불길을 잡으려고 애썼다. 하늘이 인간에게 내린 형벌은 마음이 육체의 노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불과 바람은 한통속이 되어 빠르게 내달렸고 어른의 행동은 세월의 흔적이 덕지덕지 붙어 굼떴다. 연기가 가득 차서 앞이 .. [좋은수필]갈매기 / 김문호 갈매기 / 김문호 갈매기는 천지창조의 돌연변이 인지도 모른다. 가도 가도 바위섬 하나 없는 태평양 일부변경선 언저리의 갈매기를 보고 있노라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창세기 몇째 날, 새들에게 배정된 영역은 육지의 숲과 하늘이었지 바다와 창공은 아니었으리라. 세상 어디에도 둥지라곤 없는 새, 해면에서 잠을 자고 바다에서 살다가 바다로 돌아가는 새. 일망무제의 바다와 무한 창공을 자유 자재하는 갈매기의 유영은 말 그대로 완벽한 자유의 표상이다. 구름 속에 들었는가 하면 눈발처럼 휘날리고, 까마득한 창공에 깃발처럼 떴는가 싶으면 바람같이 해면을 내달린다. 그의 삶에는 어떤 장애물도 없다. 생명을 위협할 맹조류나 침입자도 없거니와 생존을 경쟁할 다른 종족들도 없다. 수평선으로 테두리 쳐진 거대한 궁륭은 그의 .. [좋은수필]배경, 타인의 취향 / 고경서 배경, 타인의 취향 / 고경서 꽃이 만발한 들녘이다. 다갈색 어둠이 한 쌍의 남녀를 껴안는다. 상기된 여자의 맨발이 깎아지른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다. 근육질 몸매의 남자가 긴 머리카락 속에 감추어진 여자의 풍만한 어깨를 포근히 감싼다. 눈을 지그시 감은 여자를 향해 고개 숙인 남자의 황금빛 망토에서 거침없는 사랑이 쏟아져 내리는 듯하다. 그들의 입맞춤을 축복이라도 하는 양 점점이 뿌려진 별무리조차 들떠 보인다. 화가 쿠스타프 클림트의《키스》라는 작품이다.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다. 그 누구도 의식하지 않은 행동에, 대담하면서도 관능적인 사랑의 행위에 일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별들도 야음을 틈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는데…. 저렇듯 선정적인 몸짓으로 유혹할 것이 아니지 않는가. 불쑥 그림 .. 이전 1 2 3 4 5 6 7 8 ··· 12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