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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을 밝히다-글쓰기 본색
[좋은수필]어머니의 지팡이 / 박금아 어머니의 지팡이 / 박금아 “인자부터는 엄마 혼자서 다 하세욧!”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을 다녀온 셋째의 말투가 심상치 않았다. ‘어머니는 늘 옳다’는 것은 우리 칠 남매 모두가 인정하는 진리였다. 어머니 뜻을 따르자면 힘이 들어도 지나고 보면 다 잘한 일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떼꾸러기가 되었다.요즘 들어 어머니의 고집은 도를 넘을 정도였다. 완강하기가 신념처럼 굳건해서 최근에 판정받은 치매가 너무 빠르게 진행되는 것이 아닌가, 걱정되었다. 자식들과는 함께 살지 않겠다, 죽는 날까지 삼천포를 떠나지 않겠다, 지팡이는 짚지 않겠다, 등등이었다. 다른 것들이야 당장 탈 날 일이 아니지만, 지팡이가 문제였다.계단을 오르다가 다리를 헛디디는 사고가 났다. 치료가 끝나자 의사는 지팡이를 권했다. 의사 말은 ‘말씀..
[좋은수필]어린 날의 초상 / 문혜영 어린 날의 초상 / 문혜영 우리 가족은 이북에서 살다가 1·4후퇴 때 월남하였습니다. 피난 오면서 아버지를 잃고 또 오빠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니, 남은 사람은 어머니와 올망졸망한 우리 네 자매뿐이었습니다.사선을 넘으면서 목숨 하나 부지하기도 어려웠던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빈 주먹으로 어느 도시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그곳의 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셨기 때문입니다.방 한 칸 마련할 수조차 없었던 우리의 처지를 생각했음인지 학교에서는 관사에서 살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말이 관사지 방이 둘, 부엌이 둘 있는 작은 일본식 집이었습니다. 그나마 방 하나는 숙직실로 사용했기 때문에 우리는 방 하나만을 차지하고 살았습니다.나는 지금도 그 집이 눈에 선합니다. 방과 후면 어..
[좋은수필]들국화 / 정비석 들국화 / 정비석 가을은 서글픈 계절이다. 시들어가는 풀밭에 팔베개를 베고 누워서, 유리알처럼 파아랗게 갠 하늘을 고요히 우러러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까닭 없이 서글퍼지면서 눈시울이 눈물에 어리어지는 것은, 가을에만 느낄 수 있는 순수한 감정이다.섬돌 밑에서 밤을 새워가며 안타까이 울어대는 귀뚜라미의 구슬픈 울음소리며, 불을 끄고 누웠을 때에 창호지에 고요히 흘러넘치는 푸른 달빛이며, 산들바람이 문풍지를 울릴 때마다 우수수 나뭇잎 떨어지는 서글픈 소리며--- 가을빛과 가을 소리치고 어느 하나 서글프고 애달프지 아니한 것이 없다. 가을을 흔히 '열매의 계절'이니 '수확의 계절'이니 하지마는, 가을은 역시 서글프고 애달픈 계절인 것이다.깊은 밤에 귀뚜라미 소리에 놀라 잠을 깨었을 때, 그 무엇인지조차 모르..
[좋은수필]초가을 / 윤오영 초가을 / 윤오영 초가을은 사십 고개를 접어든 조용 나직한 여인의 눈매와 같다. 인생은 사십부터라는 말이 있거니와 사십은 실상 인생의 초가을이다. 그리고 가장 예민하게 나타나는 것이 여인의 눈매가 아닌가 한다. 십 대의 소녀를 봄의 푸른 싹과 같다면 이십 대는 꽃봉오리다. 웃음도 많고 부끄러움도 많은 곱고 아름다운 꽃이다. 삼십 대가 되면 작열한 향기를 피우며 떨어지려는 정열의 꽃이랄까. 오뉴월 염천의 수은주와 같이 상승할 줄만 아는 불꽃이다. 그러나 사십 고개에 들어서면 어느덧 눈가에 싸늘한 침착성이 나타나며 진주 같은 눈에는 슬기로운 이슬까지 돈다. 인생을 음미하고 생활을 다시 한번 가다듬으려는 지성의 의지와 알뜰한 부지런에 틀이 잡혀갈 때 그의 눈매에는 엷은 애수가 깃든다. 오십에 서리가 앉아 육..
수필을 밝히다-차례
[좋은수필]억새의 이미지 / 목성균 억새의 이미지 / 목성균 가을걷이가 끝난 빈 들녘은 농부의 열망이 이삭처럼 널려 있기 때문인지 막 저녁 밥상이 들어간 부엌같이 끓이고 자친 온기가 남아 있다. 억새는 그 고즈넉할 뿐 쓸쓸하지는 않은 시절의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들꽃이다.억새꽃은 석양을 등지고 서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 그래서 그 자리가 억새의 자리처럼 당연스럽다.저녁 바람 이는 동구 밖 산모퉁이를 돌아들다가 표표히 나부끼는 하얀 억새꽃을 보면 나는 깜짝 놀라서 걸음을 멈춘다. 저무는 역광에 윤택한 빛깔을 유감없이 들어내는 억새의 도열이 나를 사열관처럼 맞이하기 때문이다. 아, 이 무슨 과분한 열병식인가! 나는 곧 제병관의 인도를 받으며 등장할 사열관을 앞질러 잘못 들어선 열병식장의 남루한 귀환병처럼 돌아서고 싶은데 억새들이 입을 ..
[좋은수필]밤을 주우며 / 김만년 밤을 주우며 / 김만년 이맘때의 숲은 풍성하다. 열매들은 실팍하게 살이 오르고 다람쥐들은 겨울 양식을 모으느라 분주하다. 툭툭, 시간의 여백을 타고 알밤들이 떨어진다. 몇 알은 개울로 굴러가고 몇 알은 여뀌 풀 틈새로 숨는다. 나는 밤의 행방을 쫓아 풀섶으로 몸을 낮춘다. 반지르르 윤기나는 놈은 금방 출타한 알밤이다. 어쩌다가 삼 형제 밤이라도 만나면 횡재를 한 기분이다. 성급하게 떨어진 밤송이들도 더러 눈에 띈다. 아직 설 여물었는지 밤은 두피를 바짝 밀착시키고 완강하게 버틴다. 밤송이가 손마디를 따끔따끔 찌른다. 가시를 세우는 폼이 둘째 녀석의 모습과 흡사하다."여보 우리도 반려견이나 한 마리 키울까. 반려견은 꼬리치는 맛이라도 있잖아."얼마 전 퇴근 무렵 아내가 나에게 불쑥 던진 말이다. 평소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