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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폐교에서 / 김순희 폐교에서 / 김순희 기억의 첫 장은 골목에서 시작된다. 근대문화역사거리로 되살아난 골목에는 옛날을 떠올리는 사람들로 붐빈다.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걷다 보니 머릿속에서 스러져가던 풍경이 하나씩 깨어난다. 골목 끝에 추억을 파는 상점이 있어 쫀드기 하나 집어 든다. 쫄깃쫄깃한 옛 맛을 씹으며 언덕을 오르니 야트막한 동산 위에서 허름한 건물이 구룡포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다.잃을 것도 지킬 것도 없기에 폐교의 문은 항상 열려있다. 하릴없는 바람이 붙잡고 흔들어보는 국기 게양대를 바라보며 조회라도 하는 걸까. 운동장에는 작물들이 삐뚤빼뚤 줄을 맞추고 있다. 아이들의 수다는 다 어디로 날아갔는지 느티나무 위에서 참새들만 재잘거린다. 빈 책상이 점점 늘어 학교가 문들 닫기까지 참새는 출석부에 이름 한 줄 채우지 못..
주홍색 우산 / 김예경 주홍색 우산 / 김예경 오늘은 비가 와서 즐거운 날이다. "뭐 비가 와서 즐겁다고? 이 장마에?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여기저기에서 비웃음 소리가 들린다.흥분하지 마시라. 사실은 비가 와서 즐겁다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주홍색 우산을 쓸 수 있어 기분이 좋다는 말이니 꼬인 마음 푸시기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상황은 재미 삼아 만들어 본 글일 뿐 실상이 아니니 널리 이해해 주시기를.이 주홍색 우산은 원래는 큰딸이 사서 쓰던 것이다. 내가 몇 번을 예쁘다고 부러워했더니 마음 약한 딸이 그만 주고 간 것으로 값이 약간 비싼 그저 보통 우산이다. 원래 주홍색은 그 자체로 밝고 우아하지만 명도에 따라서는 좀 속되고 가벼워 보일 수 있다. 이 우산은 우선 순수한 주홍색이 마음에 드는데 너무 퍼지지 않은 모양새..
다크서클 / 정성화 다크서클 / 정성화 며칠 전부터 형광등이 켤 때마다 아슬아슬했다. 스위치를 올리면 한두 번 끔뻑거린 뒤에야 불이 들어왔다. 그러던 게 오늘은 아예 반응이 없다. 의자를 놓고 형광등을 떼어 보니 양쪽 끝이 거무스름하다. 백열등보다 느린 녀석이 제 긴 몸에 불을 당겨오려고 얼마나 애를 썼던지 '다크서클'이 짙다.이젠 불을 끌어오지 못하지만, 일하는 내내 뜨거웠을 형광등의 몸체를 잠시라도 선선한 곳에 눕혀준다. 내가 형광등의 다크서클을 예사로 봐 넘기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십 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남편이 두어 달 걸리는 항해를 마치고 돌아오면 나는 늘 그의 눈 밑부터 살폈다. 눈 밑이 맑고 깨끗할 때가 별로 없었다. 거무스름하거나 심할 때는 푸르죽죽하기까지 했다. 얼굴이 왜 이렇게 되었냐고 하면 "..
[좋은수필]흑점의 방 / 이인주 흑점의 방 / 이인주 새벽 두 시, 잠이 오지 않는다. 거실을 왔다 갔다 연애하는 처녀애처럼 마음 갈피를 잡지 못한다. 뜨거운 불숨을 품은 청춘도 진즉 지난 가슴에 무슨 바람 들 일이 있을까. 허나 남들이 이해하지 못할 세상앓이가 어디 한 둘인가. 가슴의 정곡을 뚫고 가는 화살이 바람의 내상을 남긴다. 다 타고 재만 남은 것처럼 보이는 불무덤을 파헤쳐 본다. 갸륵히도 살아있는 불씨가 있다. 놀랍다. 마지막 불씨일지도 모를 그것을 가슴에 품어 안고 행여 꺼질세라 조마조마한 마음을 다독여본다.세상은 내게 초록으로 도배된 방이었다가 활활 타오르는 단풍나무숲이었다가 심장을 굽는 철판이었다가 외로운 비행 끝에 불시착한 사막의 선인장이었다. 그런 새벽마다 나는 쓰러졌고 혼몽 속에 피어오르는 열꽃을 각성제처럼 삼키..
[좋은수필]그들의 동료애 / 엄현옥 그들의 동료애 / 엄현옥 휴대폰 진동음이 나른한 오후를 단번에 날렸다. 셋째 언니였다."너도 생각나지? 혼도니 미도모나이, 그 뜻을 오늘에야 알았지 뭐냐."평소의 차분함 대신 들뜬 음성이었다.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의 단서를 찾은 프로파일러를 방불케 했다.사연은 5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부모님 둘만의 대화 때 단골로 등장하던 일본어가 있었다. "혼도니! 미도모나이." 두 사람만의 언어 체계는 자식들이 근접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그쯤 되면 우리는 퇴각해야 할 시점이었다. 우리의 다양한 요구사항을 들은 후 일본 말이 끝나면 적절한 대안 조치가 내려졌다. "그래, 알았어." 또는 "낼 아침에 주마."가 대부분이었다.우리의 요구는 학교 준비물이거나 용돈 청구였다. 교생 실습 나온 국어 선생님 이야..
[좋은수필]검은 모자 / 설성제 검은 모자 / 설성제 해변에 모래산이 둥두렷했다. 모래 조각품 전시회가 끝난 후 모래들이 다음 꿈을 꾸고 있다. 성을 쌓고 두꺼비집을 지어도 곧 허물어지는 것이 모래인데 많은 재료 중 하필 모래를 도구로 삼은 조각가들의 작품을 이루고자 하는 투지가 대단하다. 바람 한 점, 물결 하나에도 스러지고 마는 작품을 위해 흘린 땀을 저 모래산은 아는 듯 바닷바람에 숨을 일렁인다. 청년들이 제법 눈에 띈다. 기다릴 부모님일랑 생각지도 않고 해변에 둘러앉아 목청껏 노래한다. 열심히 이야기한다. 청아한 웃음소리를 바다로 날리는가 하면 바락을 하며 젊음을 기승부린다.어디선가 환호가 들려온다. 소리를 더듬어 가보니 관객들이 둘러서 있다. 한 청년이 불로 쇼를 벌이는 중이다. 길쭉한 병 서너 개의 주둥이마다 불을 붙여놓고..
[좋은수필]1.5층 / 김창식 1.5층 / 김창식 건물은 1층도 2층도 아닌 어정쩡한 건물이었다. 처음부터 그 건물이 눈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해 질 녘 산책길에 슈퍼마켓에 들렀다가 눈에 익은 초록색 바탕의 노란 리본 로고와 위로 향하는 화살표 표지가 보여 무심코 옆 계단을 올랐다. 홀로 한 바퀴 휘둘러보고 옆쪽으로 트인 출구로 나오니 그냥 널찍한 평지였다. 다시 내려가는 계단이 나오거나. 엘리베이터 또는 에스컬레이터, 하다못해 아래로 향하는 비탈진 길이 나와아 햐지 않겠는가?이번엔 역순으로 쪽문을 열고 내부 홀로 가로질러 계단을 되짚어 내려왔다. 도로면에 잇닿은 평평한 땅이 나왔다. 높이는 달랐지만 계단을 올랐는데도 1층이었고 내려왔는데도 1층이었다. 길모퉁이에 비켜서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특별할 것도 없는 지역 농협 건물이..
[좋은수필]혹 / 박월수 혹 / 박월수 놈은 오랜 시간 내 안에 기거했다. 나는 녀석에게 들어와 살라고 말한 적 없다. 진즉에 쫓아내지 못한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작은 알갱이로 내 팔뚝에 똬리를 틀었던 까닭이다. 어느 날 문득 도드라진 무언가가 그다지 민감하지 않은 내 눈에 띄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눈길조차 피하고 무심한 척 버려두면 물사마귀처럼 사라질 줄 알았다.녀석은 집세도 안 내고 덥석 들어앉았지만 나쁜 놈은 아닌 것 같았다. 남의 살에 침범했는데도 통증이란 걸 데리고 있지 않았다. 그만하면 그리 미울 것도 없었다. 병원 가는 일이 죽기보다 귀찮은 맘도 한몫했다. 동거를 허락하기로 했다. 주인의 마음을 읽었으면 녀석도 납작 엎드려 있어야 했다. 하지만 눈치도 없이 야금야금 제 몸뚱일 키워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