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6543) 썸네일형 리스트형 다크서클 / 정성화 다크서클 / 정성화 며칠 전부터 형광등이 켤 때마다 아슬아슬했다. 스위치를 올리면 한두 번 끔뻑거린 뒤에야 불이 들어왔다. 그러던 게 오늘은 아예 반응이 없다. 의자를 놓고 형광등을 떼어 보니 양쪽 끝이 거무스름하다. 백열등보다 느린 녀석이 제 긴 몸에 불을 당겨오려고 얼마나 애를 썼던지 '다크서클'이 짙다.이젠 불을 끌어오지 못하지만, 일하는 내내 뜨거웠을 형광등의 몸체를 잠시라도 선선한 곳에 눕혀준다. 내가 형광등의 다크서클을 예사로 봐 넘기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십 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남편이 두어 달 걸리는 항해를 마치고 돌아오면 나는 늘 그의 눈 밑부터 살폈다. 눈 밑이 맑고 깨끗할 때가 별로 없었다. 거무스름하거나 심할 때는 푸르죽죽하기까지 했다. 얼굴이 왜 이렇게 되었냐고 하면 ".. [좋은수필]흑점의 방 / 이인주 흑점의 방 / 이인주 새벽 두 시, 잠이 오지 않는다. 거실을 왔다 갔다 연애하는 처녀애처럼 마음 갈피를 잡지 못한다. 뜨거운 불숨을 품은 청춘도 진즉 지난 가슴에 무슨 바람 들 일이 있을까. 허나 남들이 이해하지 못할 세상앓이가 어디 한 둘인가. 가슴의 정곡을 뚫고 가는 화살이 바람의 내상을 남긴다. 다 타고 재만 남은 것처럼 보이는 불무덤을 파헤쳐 본다. 갸륵히도 살아있는 불씨가 있다. 놀랍다. 마지막 불씨일지도 모를 그것을 가슴에 품어 안고 행여 꺼질세라 조마조마한 마음을 다독여본다.세상은 내게 초록으로 도배된 방이었다가 활활 타오르는 단풍나무숲이었다가 심장을 굽는 철판이었다가 외로운 비행 끝에 불시착한 사막의 선인장이었다. 그런 새벽마다 나는 쓰러졌고 혼몽 속에 피어오르는 열꽃을 각성제처럼 삼키.. [좋은수필]그들의 동료애 / 엄현옥 그들의 동료애 / 엄현옥 휴대폰 진동음이 나른한 오후를 단번에 날렸다. 셋째 언니였다."너도 생각나지? 혼도니 미도모나이, 그 뜻을 오늘에야 알았지 뭐냐."평소의 차분함 대신 들뜬 음성이었다.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의 단서를 찾은 프로파일러를 방불케 했다.사연은 5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부모님 둘만의 대화 때 단골로 등장하던 일본어가 있었다. "혼도니! 미도모나이." 두 사람만의 언어 체계는 자식들이 근접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그쯤 되면 우리는 퇴각해야 할 시점이었다. 우리의 다양한 요구사항을 들은 후 일본 말이 끝나면 적절한 대안 조치가 내려졌다. "그래, 알았어." 또는 "낼 아침에 주마."가 대부분이었다.우리의 요구는 학교 준비물이거나 용돈 청구였다. 교생 실습 나온 국어 선생님 이야.. [좋은수필]검은 모자 / 설성제 검은 모자 / 설성제 해변에 모래산이 둥두렷했다. 모래 조각품 전시회가 끝난 후 모래들이 다음 꿈을 꾸고 있다. 성을 쌓고 두꺼비집을 지어도 곧 허물어지는 것이 모래인데 많은 재료 중 하필 모래를 도구로 삼은 조각가들의 작품을 이루고자 하는 투지가 대단하다. 바람 한 점, 물결 하나에도 스러지고 마는 작품을 위해 흘린 땀을 저 모래산은 아는 듯 바닷바람에 숨을 일렁인다. 청년들이 제법 눈에 띈다. 기다릴 부모님일랑 생각지도 않고 해변에 둘러앉아 목청껏 노래한다. 열심히 이야기한다. 청아한 웃음소리를 바다로 날리는가 하면 바락을 하며 젊음을 기승부린다.어디선가 환호가 들려온다. 소리를 더듬어 가보니 관객들이 둘러서 있다. 한 청년이 불로 쇼를 벌이는 중이다. 길쭉한 병 서너 개의 주둥이마다 불을 붙여놓고.. [좋은수필]1.5층 / 김창식 1.5층 / 김창식 건물은 1층도 2층도 아닌 어정쩡한 건물이었다. 처음부터 그 건물이 눈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해 질 녘 산책길에 슈퍼마켓에 들렀다가 눈에 익은 초록색 바탕의 노란 리본 로고와 위로 향하는 화살표 표지가 보여 무심코 옆 계단을 올랐다. 홀로 한 바퀴 휘둘러보고 옆쪽으로 트인 출구로 나오니 그냥 널찍한 평지였다. 다시 내려가는 계단이 나오거나. 엘리베이터 또는 에스컬레이터, 하다못해 아래로 향하는 비탈진 길이 나와아 햐지 않겠는가?이번엔 역순으로 쪽문을 열고 내부 홀로 가로질러 계단을 되짚어 내려왔다. 도로면에 잇닿은 평평한 땅이 나왔다. 높이는 달랐지만 계단을 올랐는데도 1층이었고 내려왔는데도 1층이었다. 길모퉁이에 비켜서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특별할 것도 없는 지역 농협 건물이.. [좋은수필]혹 / 박월수 혹 / 박월수 놈은 오랜 시간 내 안에 기거했다. 나는 녀석에게 들어와 살라고 말한 적 없다. 진즉에 쫓아내지 못한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작은 알갱이로 내 팔뚝에 똬리를 틀었던 까닭이다. 어느 날 문득 도드라진 무언가가 그다지 민감하지 않은 내 눈에 띄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눈길조차 피하고 무심한 척 버려두면 물사마귀처럼 사라질 줄 알았다.녀석은 집세도 안 내고 덥석 들어앉았지만 나쁜 놈은 아닌 것 같았다. 남의 살에 침범했는데도 통증이란 걸 데리고 있지 않았다. 그만하면 그리 미울 것도 없었다. 병원 가는 일이 죽기보다 귀찮은 맘도 한몫했다. 동거를 허락하기로 했다. 주인의 마음을 읽었으면 녀석도 납작 엎드려 있어야 했다. 하지만 눈치도 없이 야금야금 제 몸뚱일 키워갔다.. [좋은수필]따뜻한 외로움/ 류창희 따뜻한 외로움/ 류창희를 읽고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겨울 햇살 같은 아쉬운 시간이 있었다.검은 뿔테안경을 끼고 의 여자 주인공처럼 지성인 다운 연애를 하고 싶었다. 가당키나 한 이야기인가. 영화를 보던 그 당시 나는 절박했다. 취직이 우선이었다. 주산학원에서 손놀림은 빨랐으나 당최 숫자에 약한 나는 고통스러웠다. 설상가상으로 폐에 하얀 찔레꽃이 만발하여 붉은 찔레 열매를 토해냈다. 나에게 지성知性은 낭만이었다. 책이라도 실컷 읽을 수만 있다면 하얀 눈밭에서 뒹굴며 연애하다 죽어도 좋을 성싶었다. 영화 속 여주인공은 도서관 사서였다. 그때 나는 사서를 꿈꿨다.이덕무 그도 규장각奎章閣의 사서였다. 세상에 나만큼 복받은 사람이 또 있을까? 길음동 육교 밑의 작은 책방을 드나들며 몰래 한쪽씩 책을 읽.. [좋은수필]나의 시적인 엄마 / 김현숙 나의 시적인 엄마 / 김현숙 일주일에 한 번 엄마가 오시는 날이다. 처음엔 한 달에 두 번만 오겠다 하셨지만 요즘은 수요 장날에 맞춰 꼬박꼬박 다녀가신다. 시장 구경도 하시고, 반찬거리도 장만하시고, 딸내미한테 글 쓰는 것도 배우고, 엄마 말씀대로 안 올 이유가 없는 날이 되어버렸다.지난 4월 처음 오셨을 때를 돌아보면, 우선 문 열고 들어오시며 '숙아' 하고 부르는 일은 없어졌다. 그렇다고 선생님이라 불러주시지도 않는다. 또 의자 안쪽까지 등허리를 깊게 묻을 만치 자리도 편하게 잡으셨다. 하지만 쪽파며, 연근이 당신 공부할 동안 골까 봐 노심초사하는 마음만은 여전하시다. 잠시라도 냉장고에 넣어두자 하면 꼭 이러신다. '이게 뭐라고 전기 써가며 공을 들이냐'고. 당신 발아래다 모셔놓고 한 번씩 들여다보.. 이전 1 2 3 4 ··· 81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