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6550) 썸네일형 리스트형 [좋은수필]옥잠화 / 석민자 옥잠화 / 석민자 "이 쪽지 내 보이고 약 주거든 받아와" 가을이었다. 밤도 제법 이슥한 시각이었다."싫어, 무서워서 안가.""내가 바래다 주께.""그러면 언니가 갔다 오면 될 걸 뭐 하러 나더러 가래.""이 손목시계 갖고 싶다고 그랬지. 이것 주께. 갔다 와."시계를 받아들고 나는 두 말없이 집을 나섰다. 까짓 무서운 것이 대수겠는가. 그 시절 중학교 일학년짜리에게 손목시계라면 꿈에도 그리던 물건이 아니던가. 그러나 보건소에선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심부름을 시킨 사람더러 마음을 고쳐먹으라는 전언과 함께."망할 뭐뭔들, 돈을 주겠다는데도 약을 안 팔겠다는 저의는 또 뭐야. 내일 당장 고발을 하고 말겠어."빈손으로 돌아왔으니 응당 시계는 돌려줘야겠거니 했었는데 나더러 가져도 좋다며 인심을 썼다.언니와는 .. 얼굴 / 노혜숙 얼굴 / 노혜숙 그는 빗속에 누워 있었다. 눈을 감은 듯 뜬 듯, 웃는 듯 마는 듯 묘한 표정이었다. 빗물이 얼굴에 스미면서 희미하던 이목구비의 윤곽이 선명하게 살아났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그는 어쩌다 목이 잘렸을까. 어떤 파란의 시절을 건너 '얼굴박물관'의 구경거리가 되었을까. 오래전 바이욘 사원에서 보았던 자야바르만 7세의 형상을 닮은 듯도 했다. 세월의 푸른 이끼를 화관처럼 둘러쓰고 있었다. 순탄치 않았을 생의 긴 여정, 고요하고 묵직할 뿐 비극의 기색이라곤 없어 보였다.내 눈가의 그늘을 읽은 듯 목 없는 부처가 침묵의 설법을 던졌다. '삶 너머 삶을 보라.' 한 줌 재가 되어버린 아버지가 떠올랐다. 입관 전 곱게 매만진 아버지의 얼굴은 평온했다. 다 놓아버린 사.. [좋은수필]나는 위선을 기꺼이 사용한다 / 이주리 나는 위선을 기꺼이 사용한다 / 이주리 사람은 불행한 상황, 불행한 관계에 놓여있을 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불행함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낙담주의자가 되거나, 자신은 행복하다고 끊임없이 최면을 걸고 아주 작은 순간의 작은 행복들을 고통에 대한 진통제로 삼아 자신의 의식 속에 행복의 균주를 심어 행복 세포를 배양해 가는 사람들이 있다.생각해 보니 모든 것을 남 탓하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세상에 대해 불만을 던지는 그 외의 분류도 있긴 하다. 극단적이 되면 결과적으로 첫 번째 사람은 자살로 삶을 마감하게 되고, 두 번째 사람은 다소 위선적으로 보이지만 대체적으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그럭저럭 살아가게 된다.실제로 나의 지인들은 몇 년 사이에 세 명이 자살의 방법을 택했다. 췌장암으로 향후 자신의 고통.. [좋은수필]막걸리와 국수 / 하정숙 막걸리와 국수 / 하정숙 새벽 빗소리에 잠을 깨고 나서 더 이상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삼촌의 모습이 흔적처럼 떠다니는 꿈을 꾼 탓이다. 덧든 잠을 이으려 뒤척여 보았지만 빗소리만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삼촌의 마지막 흔적을 뿌리던 날도 이렇게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앞차다고 집안에서 모두들 입을 댔다던 삼촌은 술병으로 돌아가셨다. 큰 키 때문에 구부정해 보이기까지 하는 삼촌 앞에는 양은 주전자가 늘 놓여 있었다.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 때였다. 술 주전자 심부름만큼은 남동생 둘의 몫이었는데 그날은 집에 나 혼자뿐이었다. 동생들을 찾던 삼촌은 빈 주전자를 흔들며 나를 다그치셨다. 주저하며 주전자를 내미는 내게 가게 아줌마는 단지 속의 막걸리를 젓지도 않은 채 바가지로 귀찮은 듯 퍼 담으며 외상값이 .. [좋은수필]글과 몸과 해금 / 김훈 글과 몸과 해금 / 김훈 글을 쓸 때 내 마음속에는 국악의 장단이 일어선다. 일어선 장단이 흘러가면서 나는 한 글자씩 원고지 칸을 메울 수 있다. 이 리듬감이 없이는 나는 글을 쓸 신명이 나지 않는다. 내 몸속에서 리듬이 솟아나기를 기다리는 날들은 기약 없다. 그런 날 나는 때때로 술을 마시거나, 자전거를 타고 강가로 나간다.휘모리장단으로 글을 쓸 때, 내 사유는 급박하게 솟구치는 언어 위에 서려서, 연결되거나 또는 부러진다. 사유가 부러지고 다시 이어지는 대목마다 문장이 하나씩 들어선다. 이런 문장들은 대체로 짧고 다급하다. 문장은 조바심치면서, 앞선 문장을 들이박고 뒤따르는 문장을 끌어당긴다. 휘몰이로 몰고 나가는 문장은 거칠다. 나는 이런 문장을 한없이 쓰지는 못한다. 힘이 빠지면 내 문장은 중모.. [좋은수필]폐교에서 / 김순희 폐교에서 / 김순희 기억의 첫 장은 골목에서 시작된다. 근대문화역사거리로 되살아난 골목에는 옛날을 떠올리는 사람들로 붐빈다.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걷다 보니 머릿속에서 스러져가던 풍경이 하나씩 깨어난다. 골목 끝에 추억을 파는 상점이 있어 쫀드기 하나 집어 든다. 쫄깃쫄깃한 옛 맛을 씹으며 언덕을 오르니 야트막한 동산 위에서 허름한 건물이 구룡포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다.잃을 것도 지킬 것도 없기에 폐교의 문은 항상 열려있다. 하릴없는 바람이 붙잡고 흔들어보는 국기 게양대를 바라보며 조회라도 하는 걸까. 운동장에는 작물들이 삐뚤빼뚤 줄을 맞추고 있다. 아이들의 수다는 다 어디로 날아갔는지 느티나무 위에서 참새들만 재잘거린다. 빈 책상이 점점 늘어 학교가 문들 닫기까지 참새는 출석부에 이름 한 줄 채우지 못.. 주홍색 우산 / 김예경 주홍색 우산 / 김예경 오늘은 비가 와서 즐거운 날이다. "뭐 비가 와서 즐겁다고? 이 장마에?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여기저기에서 비웃음 소리가 들린다.흥분하지 마시라. 사실은 비가 와서 즐겁다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주홍색 우산을 쓸 수 있어 기분이 좋다는 말이니 꼬인 마음 푸시기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상황은 재미 삼아 만들어 본 글일 뿐 실상이 아니니 널리 이해해 주시기를.이 주홍색 우산은 원래는 큰딸이 사서 쓰던 것이다. 내가 몇 번을 예쁘다고 부러워했더니 마음 약한 딸이 그만 주고 간 것으로 값이 약간 비싼 그저 보통 우산이다. 원래 주홍색은 그 자체로 밝고 우아하지만 명도에 따라서는 좀 속되고 가벼워 보일 수 있다. 이 우산은 우선 순수한 주홍색이 마음에 드는데 너무 퍼지지 않은 모양새.. 다크서클 / 정성화 다크서클 / 정성화 며칠 전부터 형광등이 켤 때마다 아슬아슬했다. 스위치를 올리면 한두 번 끔뻑거린 뒤에야 불이 들어왔다. 그러던 게 오늘은 아예 반응이 없다. 의자를 놓고 형광등을 떼어 보니 양쪽 끝이 거무스름하다. 백열등보다 느린 녀석이 제 긴 몸에 불을 당겨오려고 얼마나 애를 썼던지 '다크서클'이 짙다.이젠 불을 끌어오지 못하지만, 일하는 내내 뜨거웠을 형광등의 몸체를 잠시라도 선선한 곳에 눕혀준다. 내가 형광등의 다크서클을 예사로 봐 넘기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십 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남편이 두어 달 걸리는 항해를 마치고 돌아오면 나는 늘 그의 눈 밑부터 살폈다. 눈 밑이 맑고 깨끗할 때가 별로 없었다. 거무스름하거나 심할 때는 푸르죽죽하기까지 했다. 얼굴이 왜 이렇게 되었냐고 하면 ".. 이전 1 2 3 4 ··· 81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