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6587) 썸네일형 리스트형 [좋은수필]들국화 / 정비석 들국화 / 정비석 가을은 서글픈 계절이다. 시들어가는 풀밭에 팔베개를 베고 누워서, 유리알처럼 파아랗게 갠 하늘을 고요히 우러러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까닭 없이 서글퍼지면서 눈시울이 눈물에 어리어지는 것은, 가을에만 느낄 수 있는 순수한 감정이다.섬돌 밑에서 밤을 새워가며 안타까이 울어대는 귀뚜라미의 구슬픈 울음소리며, 불을 끄고 누웠을 때에 창호지에 고요히 흘러넘치는 푸른 달빛이며, 산들바람이 문풍지를 울릴 때마다 우수수 나뭇잎 떨어지는 서글픈 소리며--- 가을빛과 가을 소리치고 어느 하나 서글프고 애달프지 아니한 것이 없다. 가을을 흔히 '열매의 계절'이니 '수확의 계절'이니 하지마는, 가을은 역시 서글프고 애달픈 계절인 것이다.깊은 밤에 귀뚜라미 소리에 놀라 잠을 깨었을 때, 그 무엇인지조차 모르.. [좋은수필]초가을 / 윤오영 초가을 / 윤오영 초가을은 사십 고개를 접어든 조용 나직한 여인의 눈매와 같다. 인생은 사십부터라는 말이 있거니와 사십은 실상 인생의 초가을이다. 그리고 가장 예민하게 나타나는 것이 여인의 눈매가 아닌가 한다. 십 대의 소녀를 봄의 푸른 싹과 같다면 이십 대는 꽃봉오리다. 웃음도 많고 부끄러움도 많은 곱고 아름다운 꽃이다. 삼십 대가 되면 작열한 향기를 피우며 떨어지려는 정열의 꽃이랄까. 오뉴월 염천의 수은주와 같이 상승할 줄만 아는 불꽃이다. 그러나 사십 고개에 들어서면 어느덧 눈가에 싸늘한 침착성이 나타나며 진주 같은 눈에는 슬기로운 이슬까지 돈다. 인생을 음미하고 생활을 다시 한번 가다듬으려는 지성의 의지와 알뜰한 부지런에 틀이 잡혀갈 때 그의 눈매에는 엷은 애수가 깃든다. 오십에 서리가 앉아 육.. 수필을 밝히다-차례 [좋은수필]억새의 이미지 / 목성균 억새의 이미지 / 목성균 가을걷이가 끝난 빈 들녘은 농부의 열망이 이삭처럼 널려 있기 때문인지 막 저녁 밥상이 들어간 부엌같이 끓이고 자친 온기가 남아 있다. 억새는 그 고즈넉할 뿐 쓸쓸하지는 않은 시절의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들꽃이다.억새꽃은 석양을 등지고 서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 그래서 그 자리가 억새의 자리처럼 당연스럽다.저녁 바람 이는 동구 밖 산모퉁이를 돌아들다가 표표히 나부끼는 하얀 억새꽃을 보면 나는 깜짝 놀라서 걸음을 멈춘다. 저무는 역광에 윤택한 빛깔을 유감없이 들어내는 억새의 도열이 나를 사열관처럼 맞이하기 때문이다. 아, 이 무슨 과분한 열병식인가! 나는 곧 제병관의 인도를 받으며 등장할 사열관을 앞질러 잘못 들어선 열병식장의 남루한 귀환병처럼 돌아서고 싶은데 억새들이 입을 .. [좋은수필]밤을 주우며 / 김만년 밤을 주우며 / 김만년 이맘때의 숲은 풍성하다. 열매들은 실팍하게 살이 오르고 다람쥐들은 겨울 양식을 모으느라 분주하다. 툭툭, 시간의 여백을 타고 알밤들이 떨어진다. 몇 알은 개울로 굴러가고 몇 알은 여뀌 풀 틈새로 숨는다. 나는 밤의 행방을 쫓아 풀섶으로 몸을 낮춘다. 반지르르 윤기나는 놈은 금방 출타한 알밤이다. 어쩌다가 삼 형제 밤이라도 만나면 횡재를 한 기분이다. 성급하게 떨어진 밤송이들도 더러 눈에 띈다. 아직 설 여물었는지 밤은 두피를 바짝 밀착시키고 완강하게 버틴다. 밤송이가 손마디를 따끔따끔 찌른다. 가시를 세우는 폼이 둘째 녀석의 모습과 흡사하다."여보 우리도 반려견이나 한 마리 키울까. 반려견은 꼬리치는 맛이라도 있잖아."얼마 전 퇴근 무렵 아내가 나에게 불쑥 던진 말이다. 평소에 .. 수필을 밝히다-차례 『수필을 밝히다』저자 ; 신 현 식정가 ; 15.000할인가 ; 12.000원(배송)구입 문의 ; 신현식 010-3909-7939(문자 주시면 계좌 알려드리겠습니다.) [좋은수필]단어의 무게 / 민명자 단어의 무게 / 민명자 # 고프다며칠을 몸살감기로 꼬박 앓았다. 손발 꼼짝 못하고 죽을 듯이 누워있어 보기는 처음이다. 남편 혼자 밥을 챙겨 먹었다. 내게 무엇이 먹고 싶으냐고 묻고, 이런저런 음식을 해주거나 사다 주었지만, 음식 생각만 해도 입덧을 하듯 속이 울렁거렸다. 보리차로만 연명하기를 며칠, 어느 아침에 내 몸이 ‘배가 고프다’는 신호를 어렴풋이 보내왔다.고프다. 아, 살아나는 거구나. 식욕은 숭고한 거구나. 그렇다면 형이하학적 욕구나 욕망이란 단어에 보냈던 경멸은 거둬들여야 한다. 정신은 고고한 것이고 육신은 비천한 것이라 여겼던 형이상학적 욕망이야말로 얼마나 어쭙잖고 편협한 오만이었던가. 먹을 것이 없어 ‘고프다’를 채우지 못하면 인간만이 지킬 수 있는 존엄성도 허물어진다. ‘고프다’엔 생.. [좋은수필]그림자 / 노혜숙 그림자 / 노혜숙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거실 벽에 그림자를 만들고 지나간다. 길가의 벚나무가 베란다 유리창을 뚫고 벽에 부딪치면서 허리가 꺾인다. 잔가지들이 태풍에 휩쓸리듯 한쪽으로 누웠다가 서서히 일어난다. 밤의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사물들이 동시에 일어나 춤을 추듯 흔들리다 스러진다.햇볕 좋은 낮엔 거실 바닥에 그림자 벽화가 펼쳐진다. 사물들이 빛의 이동에 따라 제 그림자를 바꿔 가는 모습은 흥미롭다. 대체로 그것들은 실물과 닮아 있게 마련이지만 때론 실물보다 더 예술적으로 변형되기도 한다. 그림자에 저마다 이름을 붙여준다. 사물에 한정된 이름의 의미망을 벗어버리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 흥미진진한 상상의 세계를 즐길 수 있다.그림자 하면 아련하게 떠오르는 기억 속 삽화가 있다. 들길 한가운데 .. 이전 1 2 3 4 ··· 82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