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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공생 / 이상규 공생 / 이상규 신문을 읽는 새벽 화장실은 나의 은밀한 공간이다. 인기척 없는 어둠 속 불빛 아래 상큼한 잉크 냄새가 종이 위에 삶의 모습을 펼친다.어느 날 아침 쪼그려 앉아 신문을 넘기는데 흰 타일 바닥에 뭔가 꼼지락거리는 것이 보였다. 작은 벌레였다. 순간 피부가 근질근질했다. 구석진 바닥에 납작 엎드려 기어가고 있는 놈은 길이가 1.5센티쯤 되는 노래기 종류였다. 서두르지도 않지만 그렇게 느림보도 아니었다. 읽던 신문지를 접어들고 내려치려다 멈췄다. 어떻게 하나 좀 두고 보고 싶어졌다.녀석은 '걸리버 여행기'의 거인이 바로 앞에서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나는 날려가지 않을 정도로 입바람을 살짝 불어보았다. 순간 놈은 멈칫하더니 살기를 느꼈는지 양쪽 더듬이를 쫑긋하면서 ..
[좋은수필]해질녘 / 김창식 해질녘 / 김창식 해질녘이면 집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가곤 한다. 공원이라야 복지시설에 면한 작은 쉼터 같은 곳이다. 할아버지 세 분이 벤치에 앉아 서산에 걸린 해를 바라본다. 초점 없이 퀭한 눈의 노인들 사이에 오가는 말은 없고 각자 생각에 잠긴 듯 정물화처럼 앉아만 있다.'푸릇' 소리가 나며 나뭇잎이 떨어져 내린다. 새는 하늘로 날아오르고 흔들리는 나뭇가지만이 떠나간 새의 흔적을 말해준다. 공원은 다시 정적에 잠긴다. 눈을 들어 새의 비행을 따라간다. 해질녘이면 유난히 새가 자주 눈에 띄는 것이 신기하다. 귀소본능이 있어서일 것이다. 새라고 사람과 다를 바 무엇이랴. 밤이 오려 하니 새들도 지친 날개를 쉴 터전을 찾는 것이리라.해거름의 신비는 '섞임(混)'에서도 비롯한다. 낮과 밤, 해와 달, 별..
[좋은수필]단어의 무게 / 민명자 단어의 무게 / 민명자 # 고프다며칠을 몸살감기로 꼬박 앓았다. 손발 꼼짝 못하고 죽을 듯이 누워있어 보기는 처음이다. 남편 혼자 밥을 챙겨 먹었다. 내게 무엇이 먹고 싶으냐고 묻고, 이런저런 음식을 해주거나 사다 주었지만, 음식 생각만 해도 입덧을 하듯 속이 울렁거렸다. 보리차로만 연명하기를 며칠, 어느 아침에 내 몸이 ‘배가 고프다’는 신호를 어렴풋이 보내왔다.고프다. 아, 살아나는 거구나. 식욕은 숭고한 거구나. 그렇다면 형이하학적 욕구나 욕망이란 단어에 보냈던 경멸은 거둬들여야 한다. 정신은 고고한 것이고 육신은 비천한 것이라 여겼던 형이상학적 욕망이야말로 얼마나 어쭙잖고 편협한 오만이었던가. 먹을 것이 없어 ‘고프다’를 채우지 못하면 인간만이 지킬 수 있는 존엄성도 허물어진다. ‘고프다’엔 생..
[좋은수필]월드 이발소 / 이재훈 월드 이발소 / 이재훈 우리 동네 입구에는 허름한 이발소가 하나 있다. 출입문 위에는 란 조그만 함석 간판이 삐딱하다. 처음 나도 그 ‘월드’란 단어가 거슬렸다. 한옥을 개조한 이발소의 규모나 외양에 비해 너무 과장되었다는 생각 때문이었으리라. 페인트는 언제 칠했는지 곳곳이 녹물 자국으로 얼룩져 있고 문짝은 아귀가 안 맞아 쥐가 드나들 것 같다.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는 이발소 표시등만이 이발하러 들어오라고 손짓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이 동네로 이사 오면서부터 이곳에서 이발을 한다. 처음 왔을 때 생각이 난다. 문을 열자 나를 맞은 건 싸구려 향수 냄새와 비누냄새였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지린내 같은 세월의 냄새가 그 밑에 숨어 있었다.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희뿌연 거울 위에 걸려 있는 두 개..
수필을 밝히다-머리말(4)
[좋은수필]버리며 사는 나날 / 권남희 버리며 사는 나날 / 권남희 낙엽을 몰고 오는 바람은 역시 낙엽 빛깔이다. 그런 울적한 낙엽 빛의 바람이 내게로 스며들어 가슴을 헤집을 때면 나는 빈 들에 선 나무가 된다. 가지 끝에 매달린 갈잎의 떨림으로 몸을 가눌 수가 없어진다. 다람쥐 쳇바퀴처럼 갇힌 일상의 반복과 가져도 가져도 성 차지 않는 욕망으로 마음이 뒤흔들리는 날은 으레 그렇다. 그럴 때면 나는 버릇처럼 손때 묻은 지난날 소지품들을 끌어내 놓곤 소중하게 매만지기도 하고 속절없이 버리기도 하며 마음을 달래곤 한다. 한참 동안을 그러노라면 흐트러진 마음이 채곡채곡 개켜지기도 하고 곰삭은 감정의 찌꺼기들이 걸러지기도 하니까.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취할 것은 다부지게 끌어안을 줄 아는 현명, 그게 현대인의 지혜라던가…….사람은 항상 마음..
[좋은수필]아버지 마당에 푸른 달빛이 / 유호영 아버지 마당에 푸른 달빛이 / 유호영 마을 사람들은 우리를 '꼼꼼히네'라고 불렀다. 윗마을 아랫마을 사람들 모두 그렇게 불렀다. 바깥양반이 부지런하고 빈틈없어 우리 집 마당에선 풀 한 포기도 자라지 못한다고들 했다.아버지는 지나치게 완벽주의자였다. 짚단을 묶을 때만 해도 그랬다. 한 단 한 단 단단하게 묶어 그 밑동을 땅에 탁탁 내리치셨다. 그러면 짚 밑동이 밀가루 국수 다발처럼 가지런해졌다. 그렇게 묶은 짚단을 차곡차곡 마당에 쌓았다. 지붕 높이까지 네모반듯하게 쌓아 올린 후 아버지는 사다리를 타고 천천히 내려오셨다. 그러고는 흐뭇한 표정으로 낟가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는 마당에 떨어진 지푸라기를 쓸어 모으셨다.나뭇단을 쌓을 때는 더 정교했다. 나무 밑동을 두 줄로 맞대어 안쪽으로 들어가게 하고 가..
[좋은수필]하늘과 물 / 김열규 하늘과 물 / 김열규 ‘우리 둘은 하늘과 땅 사이다.’이 말에는 두 사람은 앙앙거리는 원수끼리다. 도저히 서로 통할 수 없는 사이를 두고는 흔히들, ‘하늘과 땅 사이’라고들 한다. 일반 언어생활에서는 그런 게 하늘과 땅이 서로 그 지경이니 물이라고 하늘과 단짝일 수는 없다.한데 자연에서는 하늘과 땅이 상통하듯이 하늘과 물 또한 서로 소통하고 있다. 아니 단짝이기도 하다.하늘의 푸른빛은 절로 바다며 강 그리고 호수의 물살에 비쳐진다. 첫새벽의 노을은 온 바다를 붉게 타오르게 한다. 야밤에 옹달샘에 어리는 달은 그리운 이의 얼굴을 닮는다. 달이 차고 기울고 함에 따라서 바닷물은 썰물이 되곤 한다. 하늘과 물, 물과 하늘은 그렇게 여간한 단짝이 아니다.그러기에 신화에서도 하늘과 물은 서로 달콤하게 궁합을 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