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6554) 썸네일형 리스트형 [좋은수필]일회용 / 방민 일회용 / 방민 올레를 걷는다. 차도를 따라 걷다가 마을로 접어든다. 올 레는 마을로 난 길이 대부분인데 차도 옆에도 있어 가끔 자동차와 같이 쓰기도 한다. 길 옆에 시선을 붙잡는 게 있다. 다 가가 보니 플라스틱 생수병이 풀숲에서 고개를 내민다. 이곳에서 오래 누굴 기다렸는지 먼지 때가 끼었고 찌그러져 있다. 임에게 내쳐진 섬 색시마냥 애처로워 보인다. 고개를 얼른 돌리고 발길을 서두른다. 일회용이기에 저리 마구 버렸겠지 하는 생각이 배낭에 훌쩍 올라탄다. 잠시 무게를 느낀다. 가벼워질까 생각을 떼쳐 버리려 빨리 걸어 본다. 틈입한 상대는 쉽게 떠나려 하지 않는다. 달래서 보내기로 마음을 고쳐먹는다. 무녀의 춤사위 한 자락 펼치듯 생수병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본다. 어울려 한판 놀아볼거나 발짓마저 보태.. 수필을 밝히다(얼개 짜기) 『수필을 밝히다』저자 ; 신 현 식정가 ; 15.000할인가 ; 12.000원(배송)구입 문의 ; 신현식 010-3909-7939(문자 주시면 계좌 알려드리겠습니다.) [좋은수필]응시 / 박경철 응시 / 박경철 초가을 이맘때가 되면 봉정사를 찾는다. 안동에 사는 재미다. 주중에는 호젓한 저녁시간을 만들지 못해 아쉽지만, 토요일 오전이나 늦은 저녁 봉정사를 가면 사람 대신 바람이 마당을 쓴다.인적이 없는 산사는 적요하다. 은행잎을 훑어내린 바람이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을 스치고 지나가며 억겁의 세월을 일깨운다. 이른 아침이면 떨어진 낙엽에 제법 물기가 돌지만, 언제 태어났는지 모를 그 바람이 금세 습기를 말려버린다. 바람은 그들을 하나하나 떼어놓고 이리저리 희롱하며 보이지 않는 범의 수레바퀴를 돌린다.매표소를 지나 천천히 산길을 걸으면 예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낸다. 차를 타고 오르면 빽빽하게 하늘을 가린 소나무 숲에 눈길을 빼앗기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발로 몸.. [좋은수필]보리밥과 칼국수 / 최장순 보리밥과 칼국수 / 최장순 커피 향으로 우려낸 초저녁 입담이 옅어질 즈음 허기는 짙어졌다. 갑작스런 비는 어느새 눈으로 내리고 있었다.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우리는 코트와 점퍼의 후드로 대충 몸을 감쌌다. 적당히 기분 좋은 눈을 맞으며 도심의 불빛을 훑었다. 부끄럼 많은 골목이 수줍게 내미는 ‘수제 칼국수’가 눈길을 잡아끌었다. 따뜻한 바닥이 군불을 지핀 듯 정겹다. 앉은뱅이 식탁에 앉으며 서둘러 칼국수를 주문했다. 시장기부터 삭이라는 듯 먼저 식탁에 놓인 건 보리밥. 작은 공기의 보리밥에 열무김치와 고추장이 곁들여진 사이드 메뉴다. 칼국수가 나오기 전의 맛보기는 입맛을 돋우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예전 어느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시키면 약간의 쌀밥이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짜장면을 먹고 남은.. [좋은수필]옥잠화 / 석민자 옥잠화 / 석민자 "이 쪽지 내 보이고 약 주거든 받아와" 가을이었다. 밤도 제법 이슥한 시각이었다."싫어, 무서워서 안가.""내가 바래다 주께.""그러면 언니가 갔다 오면 될 걸 뭐 하러 나더러 가래.""이 손목시계 갖고 싶다고 그랬지. 이것 주께. 갔다 와."시계를 받아들고 나는 두 말없이 집을 나섰다. 까짓 무서운 것이 대수겠는가. 그 시절 중학교 일학년짜리에게 손목시계라면 꿈에도 그리던 물건이 아니던가. 그러나 보건소에선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심부름을 시킨 사람더러 마음을 고쳐먹으라는 전언과 함께."망할 뭐뭔들, 돈을 주겠다는데도 약을 안 팔겠다는 저의는 또 뭐야. 내일 당장 고발을 하고 말겠어."빈손으로 돌아왔으니 응당 시계는 돌려줘야겠거니 했었는데 나더러 가져도 좋다며 인심을 썼다.언니와는 .. 얼굴 / 노혜숙 얼굴 / 노혜숙 그는 빗속에 누워 있었다. 눈을 감은 듯 뜬 듯, 웃는 듯 마는 듯 묘한 표정이었다. 빗물이 얼굴에 스미면서 희미하던 이목구비의 윤곽이 선명하게 살아났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그는 어쩌다 목이 잘렸을까. 어떤 파란의 시절을 건너 '얼굴박물관'의 구경거리가 되었을까. 오래전 바이욘 사원에서 보았던 자야바르만 7세의 형상을 닮은 듯도 했다. 세월의 푸른 이끼를 화관처럼 둘러쓰고 있었다. 순탄치 않았을 생의 긴 여정, 고요하고 묵직할 뿐 비극의 기색이라곤 없어 보였다.내 눈가의 그늘을 읽은 듯 목 없는 부처가 침묵의 설법을 던졌다. '삶 너머 삶을 보라.' 한 줌 재가 되어버린 아버지가 떠올랐다. 입관 전 곱게 매만진 아버지의 얼굴은 평온했다. 다 놓아버린 사.. [좋은수필]나는 위선을 기꺼이 사용한다 / 이주리 나는 위선을 기꺼이 사용한다 / 이주리 사람은 불행한 상황, 불행한 관계에 놓여있을 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불행함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낙담주의자가 되거나, 자신은 행복하다고 끊임없이 최면을 걸고 아주 작은 순간의 작은 행복들을 고통에 대한 진통제로 삼아 자신의 의식 속에 행복의 균주를 심어 행복 세포를 배양해 가는 사람들이 있다.생각해 보니 모든 것을 남 탓하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세상에 대해 불만을 던지는 그 외의 분류도 있긴 하다. 극단적이 되면 결과적으로 첫 번째 사람은 자살로 삶을 마감하게 되고, 두 번째 사람은 다소 위선적으로 보이지만 대체적으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그럭저럭 살아가게 된다.실제로 나의 지인들은 몇 년 사이에 세 명이 자살의 방법을 택했다. 췌장암으로 향후 자신의 고통.. [좋은수필]막걸리와 국수 / 하정숙 막걸리와 국수 / 하정숙 새벽 빗소리에 잠을 깨고 나서 더 이상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삼촌의 모습이 흔적처럼 떠다니는 꿈을 꾼 탓이다. 덧든 잠을 이으려 뒤척여 보았지만 빗소리만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삼촌의 마지막 흔적을 뿌리던 날도 이렇게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앞차다고 집안에서 모두들 입을 댔다던 삼촌은 술병으로 돌아가셨다. 큰 키 때문에 구부정해 보이기까지 하는 삼촌 앞에는 양은 주전자가 늘 놓여 있었다.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 때였다. 술 주전자 심부름만큼은 남동생 둘의 몫이었는데 그날은 집에 나 혼자뿐이었다. 동생들을 찾던 삼촌은 빈 주전자를 흔들며 나를 다그치셨다. 주저하며 주전자를 내미는 내게 가게 아줌마는 단지 속의 막걸리를 젓지도 않은 채 바가지로 귀찮은 듯 퍼 담으며 외상값이 .. 이전 1 2 3 4 ··· 82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