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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을 밝히다-1강(19P)
[좋은수필]섬진강 참게 / 고윤자 섬진강 참게 / 고윤자 늦가을 섬진강에선 연어와 참게가 만난다. 연어는 북태평양에서 돌아와 강을 거슬러 오르고, 참게는 계곡에서 기어 나와 바다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서로 방향은 다르지만 이동하는 목적은 똑같다. 알을 낳기 위해서이다. 산란 후 자기가 태어났던 하천으로 돌아오는 연어는 포식자에게 잡아먹히거나 길을 잃고서 생을 마감한다. 바다 쪽으로 회유를 마친 참게는 부화 후에 대부분 폐사한다. 끝내 자신들의 숙명을 타 넘지 못하고 커다란 조력潮力이 그들을 이끌어 가는 것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하나가 타의적 죽음이라면 하나는 자기희생적 죽음이라고 할까. 막내 여동생이 돌아왔다. 새로운 세계에 둥지를 틀겠다고 남편과 함께 중국으로 떠난 후 삼 년 만의 귀국이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 때문에 형제..
[좋은수필]바위취가 엿들은 말 / 한경선 바위취가 엿들은 말 / 한경선 물낯이 맑아서 하늘이 앉았다. 바람도 피해 간 우물이 고요하다. 산속에 숨어 있어서 아직까지 남아 있는 우물이다. 얕은 우물은 속이 환히 보여서 편안하다.주르륵 두레박줄이 손바닥을 타고 내 안의 우물 속으로 미끄러진다. 유물처럼 남아 있는 우물을 두레박이 깨우자 출렁하며 잠을 깬다. 손바닥에 열기가 짧게 스칠 때쯤 텅 하고 두레박이 물에 닿는다. 그 순간 긴장하고 있다가 손을 힘을 주어 기억의 줄 끝을 붙잡는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 안에서 아찔한 두려움이 훅 끼친다. 어렸을 때 우물을 들여다보는 일은 무서웠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우물 끝에 설핏 비치는 하늘 조각은 어지럼증을 일으켰다.큰 정자나무 가지가 뻗은 곳쯤에 앞가르마 반듯하게 타서 쪽을 찐 큰고모가 ..
수필을 밝히다-1강
[좋은수필]청소 / 박재완 청소 / 박재완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각종 공사와 보수를 끝낸 빈집엔 치우고 닦아야 할 것들로 가득하다. 누구의 집인지도 모르는, 낯선 집. 걸레부터 빨아야 할까. 빗자루부터 들어야 할까.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막막하다. 청소는 누구나 하는 일이지만, 나 역시 늘 하는 일이지만 '청소'는 처음 하는 일이다.오십을 넘긴 맨손의 남자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아니, 일이야 있지만 결심과 실행이 쉽지 않다. 맨손의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야말로 맨손으로 하는 일들뿐이다. 일에 귀천이 없지만 삶의 관성은 그 일들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대단히 고귀한 일을 하면서 살았던 것도 아닌데, 오십 년의 관성은 아직도 자신을 끔찍이 아끼고 있다. 매일 밤 책상에서 마음먹은 일들이 다음 날 아침이면..
[좋은수필]들국화 / 정비석 들국화 / 정비석 가을은 서글픈 계절이다. 시들어가는 풀밭에 팔베개를 베고 누워서, 유리알처럼 파아랗게 갠 하늘을 고요히 우러러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까닭 없이 서글퍼지면서 눈시울이 눈물에 어리어지는 것은, 가을에만 느낄 수 있는 순수한 감정이다.섬돌 밑에서 밤을 새워가며 안타까이 울어대는 귀뚜라미의 구슬픈 울음소리며, 불을 끄고 누웠을 때에 창호지에 고요히 흘러넘치는 푸른 달빛이며, 산들바람이 문풍지를 울릴 때마다 우수수 나뭇잎 떨어지는 서글픈 소리며--- 가을빛과 가을 소리치고 어느 하나 서글프고 애달프지 아니한 것이 없다. 가을을 흔히 '열매의 계절'이니 '수확의 계절'이니 하지마는, 가을은 역시 서글프고 애달픈 계절인 것이다.깊은 밤에 귀뚜라미 소리에 놀라 잠을 깨었을 때, 그 무엇인지조차 모르..
수필을 밝히다-1강
[좋은수필]별이 내리네 / 김정화 별이 내리네 / 김정화 검다. 온통 검은 세상이다. 검은 나무들이 검은 숲을 만들고 검은 하늘이 검은 강물 위에 내려앉았다. 달마저 숨은 그믐밤, 강을 에워싼 맹그로브 숲의 바람도 잠이 들었다. 몇몇 여행자를 실은 나룻배 사공은 말없이 노를 저었다. 말레이 서쪽 반도 셀랑고르 강을 따라 반딧불이를 찾아가는 중이다.어릴 때 내가 살던 외딴집 근처 강 숲에는 지천으로 반딧불이가 많았다. 전깃불이 없는 시골집에 강가의 반딧불이가 모여들면 나는 잠도 잊은 채 꼬리에서 반뜩이던 조그만 등불을 눈이 시리도록 올려다보았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개똥별이라고 부르고 윗동네 조무래기들은 까랑이라고 했다. 어른들이 부르는 반디나 개똥벌레가 반딧불이라는 것도 알았지만 동네 광자 언니가 이름 붙인 땅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