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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연꽃 만나러 가는 길 / 도월화 연꽃 만나러 가는 길 / 도월화  초록빛 양산을 펼쳐 줄게. 8월의 태양이 뜨거운 열기를 뿜을 때, 넓은 잎사귀로 서늘한 그림자를 만들려고 해. 하얗게 꽃 등을 피워 줄게. 연못이 흙탕물처럼 어두우면, 환하게 연 등을 밝혀주리.벽련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차가운 물속에서 나는 그 목소리가 따스하다. 이슬을 먹고 피어난 듯 순수하지만, 순진함에서 배어 나오는 어눌함조차 없는 고고함이 신비스럽다. 물기 머금은 눈빛은 보는 이에게 마음의 평온과 위안을 준다.매년 여름, 연꽃을 보러 가고 싶었다. 동양 최대라는 무안 연꽃 축제에 가보려고 벼르기만 하다가, 금세 꽃은 져버리고 때를 놓쳐왔다. 그저 일상 속에서 세월만 흘려보내다가 사라지는 것이 삶이런가. 오늘은 연꽃 만나러 가는 날. 먼 곳까지 가야 하는 큰 연꽃 ..
[좋은수필]소소한 발견 / 小珍 박기옥 소소한 발견 / 小珍 박기옥     이른 아침 산책길에 청소차를 만났다. ‘깨끗한 도시, 희망의 도시’라고 쓰인 그 차는 나의 바로 코앞에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밤새 모아놓은 쓰레기들을 수거하고 있었다. 악취가 코를 찔렀다. 이대로 가다가는 공원까지 청소차와 동행을 해야 할 형편이었다. 도망치듯 횡단보도를 건넜다. 아뿔싸, 이번에는 마주 오는 다른 청소차를 만나게 되었다. 지나가면 괜찮을 거라는 생각은 오산이었다. 그 길 또한 청소차가 막 작업을 끝내고 온 터였다. 쓰레기의 흔적으로 악취가 장난이 아니었다. 다른 나라의 경우는 어떨까. 대부분의 OECD 국가에서는 시민들이 출근하는 시각에 청소차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왜 하필 복잡한 출근 시간에 냄새나는 청소차가 작업하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법정..
[좋은수필]현장現場 / 맹난자 현장現場 / 맹난자  퇴근 후 무거운 걸음으로 아파트 마당에 들어섰다. 비온 뒤라서인지 화단의 나무 냄새도 좋고 나무 잎들은 한결 푸르다.꽃 진 라일락나무의 잎 새도 전보다 넓어졌고, 어느새 화무십일홍이 된 작약은 제 몸에 씨방을 한껏 부풀려 임산부 같은 배를 하고 있었다.생명을 잇기 위해 저들은 숭고한 임무를 완수하고 있는데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니, 이 여름에? 그런 자괴감이 안에서 피어올랐다.봉숭아의 통통한 씨방을 보면 터지기도 전에 손을 대고 싶어진다. 젓가락으로 통통한 배를 건드려 꺼내 먹던 은어나 명태의 알을 씹던 때도 감촉도 되살아난다. 입안에서 톡톡 터지는 쾌감을 즐기다가 흠칫 움츠러들도록 만 것은 한 생명체로서 부화되지 못하고 죽은 물고기를 씹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생명, 그것을..
[좋은수필]르느아르의 손 / 송복련 르느아르의 손 / 송복련  손을 보면 표정이 다양하다. 그 사람의 이력서처럼 삶을 짐작케 한다. 무용수가 허공에 그리는 손짓과 의자에 앉아 컴퓨터를 두드리며 사무를 보든지 호미와 낮을 들고 밭일을 하는 농부의 손은 다르지 않던가. 내가 감동받았던 손은 시스티나 성당에서 '아담의 창조'를 처음 보았을 때였다. 신비스러운 기운이 느껴지던 천정의 그림은 하늘나라인 양 둥실둥실 떠다니는 듯했고 아담이 뻗은 손을 향해 신의 손이 닿을 듯 말 듯 했다. 갓 태어난 아담에게 강한 생명의 에너지를 불어넣는 장면이다.얼마 전 한 예술가의 사진 속에 빠져든 일이 있다. 가느다란 화필을 들고 있는 화가의 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소매로 손목을 감싸 붓과 함께 묶은 손은 결박되어 뿌리가 드러난 나무처럼 울퉁불퉁하고 뒤틀..
[좋은수필]길 / 김희자 길 / 김희자  바람이 남도 길을 열어 준다. 먹장구름이 물러나는 하늘에서 봄볕이 내려와 반짝인다. 분분하게 떨어진 붉은 꽃에 마음이 머문다. 섬과 육지를 이어 주는 외길 위에 정겨운 사람들의 웃음으로 가득하다. 일상에서 벗어나 길을 나선 사람들처럼 닻을 내린 선박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바닷길을 열어 주던 등대는 곤하게 잠들어 있다. 어디에서 음악이 흐르는가 싶더니 그 음악에 맞추어 물줄기가 춤을 춘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한 둘 음악 분수대 앞에 모여든다. 오동나무 꽃이 하늘에 걸렸다. 오동나무가 많았다는 작은 섬에는 뭉텅뭉텅 진 동백이 붉은 자국들로 난자하다. 겨울이 혹독할수록 시련이 클수록 더 붉게 타는 동백이다누구에게나 자신을 내어 주는 길은 아름답다. 모든 길이 바다로 열린 죽포에서 유일하게 ..
[좋은수필]물속의 세 여인 / 고윤자 물속의 세 여인 / 고윤자    낮 열두 시 경이 가장 한가한 시간이다.이 시간엔 수영장에 거의 사람이 없다. 그런데 그 시간이라고 나 혼자만의 수영을 즐기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다른 두 사람이 더 있어서 그 시간대를 점유하는 세 사람이 되었다. 내가 있고, 다른 한 사람은 15도이고 다른 한 사람은 45도이다. 이 시간을 택한 이유는 그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남에게 숨기고 싶은, 구태여 펴 보이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있어서 일 것이다. 두 여인 모두 소아마비로, 걸을 때마다 옆으로 기울어지는 각도를 보며 내 마음속으로 지어준 이름이다. 모두 인물이 보통 이상이었고 집안도 꽤 부유해 보였다. 처음 이 두 사람을 수영장에서 만났을 때는 난 제법 우월감을 느꼈었다. 예쁜 수영복을 자..
[좋은수필]영장靈長인가, 천적天敵인가 / 최민자 영장靈長인가, 천적天敵인가 / 최민자  나는 방금 모기 한 마리를 처치했다. 인간의 침소를 허락 없이 들어왔을 뿐 아니라 언감생심 내 식구들의 피를 넘보기까지 한 죄이다. 가뜩이나 더위 때문에 잠을 설치고 있는데 느닷없이 웽~ 하는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공습경보가 울렸는데 잠이 올 리가 있겠는가. 후다닥 일어나서 불을 켜고 방문을 닫았다. 퇴로는 이미 차단되었으니 제 마우리 날썐돌이라 하여도 내 손아귀를 벗어날 수는 없다. 적을 섬멸하지 않고는 전투를 끝내지 않을 작정이니까.눈을 희번덕거리고 사방을 노려보며 탐색전을 펼친다. 커튼 언저리에 숨어 있는 그놈을 어렵지 않게 찾아내어 신문지를 몰아 쥐고 강타를 날려 본다. 일은 간단히 끝이 났다. 이런 때의 나는 누구보다 비정하다. 두 손바닥을 맞부딪치는 일..
[좋은수필]만우절 역설 / 박미정 만우절 역설 / 박미정     4월의 첫날 만우절이 다가오면 아련한 추억 한 자락이 미소를 짓게 한다. 오늘날 만우절은 주변 사람들에게 가벼운 장난이나 농담으로 웃을 수 있는 날로 인식되고 있다. 간혹 일부 사람들이 불이 났다느니, 사람이 다쳤다느니, 하는 거짓말로 119 대원들을 당황하게 하는 사례도 없지 않다. 서양에서는 만우절 장난에 속아 넘어간 사람을 '4월 바보' 또는 '푸아송 다브릴(poisson d'avrill)'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4월의 물고기'라는 뜻으로 고등어가 4월에 많이 잡혀 만우절에 속는 사람을 '4월의 물고기'라는 설도 있다. 어쩌면 지난 시절 나 역시 4월의 바보는 아니었을까. 젊은 날, 나는 책을 좋아하여 도서관을 수시로 들락거렸다. 그와의 첫 만남도 그곳이었다. 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