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6581) 썸네일형 리스트형 [좋은수필]그림자 / 노혜숙 그림자 / 노혜숙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거실 벽에 그림자를 만들고 지나간다. 길가의 벚나무가 베란다 유리창을 뚫고 벽에 부딪치면서 허리가 꺾인다. 잔가지들이 태풍에 휩쓸리듯 한쪽으로 누웠다가 서서히 일어난다. 밤의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사물들이 동시에 일어나 춤을 추듯 흔들리다 스러진다.햇볕 좋은 낮엔 거실 바닥에 그림자 벽화가 펼쳐진다. 사물들이 빛의 이동에 따라 제 그림자를 바꿔 가는 모습은 흥미롭다. 대체로 그것들은 실물과 닮아 있게 마련이지만 때론 실물보다 더 예술적으로 변형되기도 한다. 그림자에 저마다 이름을 붙여준다. 사물에 한정된 이름의 의미망을 벗어버리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 흥미진진한 상상의 세계를 즐길 수 있다.그림자 하면 아련하게 떠오르는 기억 속 삽화가 있다. 들길 한가운데 .. 수필을 밝히다-차례 [좋은수필]응시(凝視) / 최원현 응시(凝視) / 최원현 k 교수가 e메일로 동영상을 하나 보내왔다. 제목이 감동의 동영상이라 되어 있다. 궁금했다. 얼마나 감동적이기에 감동이란 수식어까지 붙였을까.파일을 열었다. 젊은 청년이 화면에 나온다. 노래를 부르는 무대다. 그런데 노래를 하기 전에 심사위원이 질문을 한다. 그의 대답이 놀랍다. 아니 너무 슬프고 안타까워 들을 수가 없다. 요즘 같은 때에도 저렇게 어려움을 겪고 산 젊은이가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심사위원도 방청석의 사람들도 나도 그의 아픔 절망 슬픔에 전염이 되어 눈물을 쏟았다. 정작 그는 울지 않는데 그를 보는 모두는 하나같이 울고 있다. 그가 노래를 한다. 첫 일성이 터지는 순간 사람들은 경악하고 전율한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은 폭포수처럼 감동의 눈물을 .. [좋은수필]책장 앞에서 / 최민자 책장 앞에서 / 최민자 도킨스와 하라리, 베르베르와 이정모가 사이좋게 어깨를 밀착하고 있다. 사이좋게? 인지는 사실 모르겠다. 시비를 걸거나 영역 다툼을 하지 않고 시종 점잖게 어우러져 있으니 나쁜 사이는 아닌 것 같달 뿐.책들은 과묵하다. 포개 있어도 붙어 서 있어도 일생 서로 말을 걸지 않는다. 책들은 다 수줍음을 탄다. 자리를 바꿔 달라 보채지도 않고 어디로 데려가 달라 꼬리치지도 않는다. 즉각적인 피드백을 양산하는 다중 미디어들이 창궐하는 시끌시끌한 시대에 이렇듯 수동적이고 내성적인 매체들이 한정된 공간을 점유하고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니, 이사할 때마다 읽지도 않는 책들을 끌고 와 별다른 고민 없이 벽면 하나를 통째 내주는 내 허영심 덕분일 것이다. 세상은 넓고 읽을 책은 많아서 한번 읽은 책.. 수필을 밝히다-차례 [좋은수필]순댓국은 그리움이다 / 조일희 순댓국은 그리움이다 / 조일희 마음이 스산하고 몸이 오슬오슬 한기라도 들라치면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바로 순댓국이다. 편안할 때는 무심히 지내다가도 사는 게 팍팍할 때면 불쑥 그리워지는 친정엄마처럼 고단하거나 서글플 때면 뜨끈한 순댓국 한 그릇이 간절해진다. 평소 식당의 청결이나 분위기를 따지는 편이다. 그런 내가 순댓국집만큼은 삐걱거리는 나무 문짝을 열고 들어가는 허름한 식당을 부러 찾아간다. 세월의 더께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앉은뱅이 상에서 먹는 국밥은 한 끼 밥이 아니다. 보약 한 첩이다. 땀까지 뻘뻘 흘리며 한 그릇 비우고 나면 가라앉았던 기분이 되살아나고 맥없이 처져 있던 몸에 생기가 도니 말이다. 순댓국을 처음 먹은 건 고등학교 때이다. 등교 시간에 쫓기던 나는 뺑 돌아가야 하는 넓은 길보.. [좋은수필]공(空)터 / 김선화 공(空)터 / 김선화 공터는 사사 시철 말을 걸어온다. 걸음한 사람의 감정 변화 따라 고요하거나 활기차거나 음산하기까지 하다. 그림을 감상할 때 느끼는 여백같이 빼곡히 들어차지 않고 빈자리를 내준다. 그래서 문학으로 치면 시詩와 닮아 있다. 무어라 한 마디 툭 던지고 상상을 자아내는 행간처럼 시시콜콜 갑갑하게 굴지 않는다. 사람에 비유하면 말수 적고 품 넓은 지기知己이다.내가 공터란 말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주경야독의 꿈을 안고 객지생활을 막 시작한 해의 늦가을이었다. 그때 내 나이 열일곱이었는데 1976년 서울은 산업 열풍으로 몹시 분주했다. 신당동에 있던 소규모 봉제공장은 외가로 아저씨뻘 되는 분이 경영하고 있었다.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시작한 그 길엔 나보다 몇 살씩이나 어린 꼬마들이 먼저 자리.. [좋은수필]지공거사의 염치 수칙 / 손봉호 지공거사의 염치 수칙 / 손봉호 동갑내기 친구 몇이 자신들을 '지공거사'라 부른다 했다. '지하철 공짜로 타는 백수 남자'란 뜻이다. 무임승차가 겸연쩍은 어떤 노인이 만들어 낸 것 같다. 우습기도 하지만 조금 서글프기도 한 별명이다. 무임승차가 부끄럽지만 그래도 자존심은 남아 있어서 '건달'이라 하지 않고 '거사'라 한 것 같다.어쨌든 나도 지공거사가 된 지 15년이 넘었다. 70살 까지는 공짜 표 받기가 쑥스러워 돈을 내고 타는 일이 많았지만, 경로카드가 나온 후부터는 후안무치가 되고 말았다. 10여 년이나 공짜로 타다 보니 이런저런 버릇도 생기고 나름대로 행동수칙도 갖게 되었다. 언제부턴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두 가지 지하철 승차수칙을 지키기로 했다. 경로석 구역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과 자리에 앉지.. 이전 1 2 3 4 ··· 82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