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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댓돌 / 우광미 댓돌 / 우광미 그곳은 성전의 들머리다. 저마다 순례길 같은 일상에서 지고 온 남루들을 벗어놓는다. 하루치의 자잘한 삶의 편린들을 정화시킨 후 비로소 맨발을 방으로 들인다. 또 날이 새면 어김없이 새로운 다짐을 찍으면서 나선다.돌은 연장이 되기도 하고 염원을 담아 얹으면 탑이 되기도 한다. 성벽의 돌처럼 우러러봐야 할 정도로 높이 쌓은 것도 있고, 보일 듯 말 듯 나지막이 집 담장으로 둘러진 경우도 있다. 그 쓰임새가 다양하나, 집채를 오르내리도록 만든 계단인 댓돌은 유난히 살갑다.비상하는 새들도 머무르며 쉼표를 찍듯이, 생각이 흐트러질 때엔 시골집에 와서 댓돌을 바라본다. 칼에 베인 시간처럼 빈집의 공허가 창백하다. 내 시간의 긴 침도 모 닳은 댓돌 위에 멈춰 있다. 각이 서 매사 반듯하던 젊은 날..
[좋은수필]존재와 이름 / 목성균 존재와 이름 / 목성균 모든 존재에는 이름이 있다. 사람의 발길에 짓밟히는 길섶의 질경이에서부터 여름 황혼녘에 먼지처럼 나는 하루살이와 같은 미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물은 물론, 크고 작은 수많은 산봉우리, 사람이 살지 않는 외로운 섬들, 깊은 밤하늘의 별 떨기와 같은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삼라만상에는 이름이 있다.하물며 사람임에랴. 그런데 사람에게 이름이 없다니-! 나는 젊어서 사방사업 현장 주임 노릇을 한 적이 있다. 민둥산에 수풀과 나무를 심는 일인데 인근 두메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일을 했다. 그 출력 인부의 노임을 주기 위해서 사역 부를 작성할 때 주민등록증을 대조하면서 이름 없는 사람을 더러 발견했다.남자의 경우에는 이름이 없는 사람은 없지만 여자들, 특히 나이 든 노인에게서 이름이 없는 사람..
[좋은수필]수탉의 도전 / 이인숙 수탉의 도전 / 이인숙 수탉이 철조망 틈새 끼인 날갯죽지를 빼느라 발버둥을 친다. 눈망울을 껌뻑이고 붉은 볏을 움찔거리는 모습이 힘겨운가 보다. 틈새가 비좁아 수탉이 탈출하기엔 불가능해 보이건만, 포기할 수 없다는 몸부림이다. 탈출을 향한 집념이 팔월의 태양 볕보다 뜨겁다. 급기야 부리로 땅을 쪼아대며 용을 쓴다. 수탉의 몸짓에서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오기마저 느껴진다.드디어 탈출이다. 수탉이 날개를 펴고 텃밭으로 쏜살같이 내달린다. 철조망 아래 땅을 파헤쳐 틈새로 탈출을 성공한 것이다. 닭이 머리가 나쁘다는 말도 옛말인 것 같다. 철망과 땅의 틈새를 파헤치면 구멍이 생기는 걸 어찌 알았을까. 수탉은 볏을 꼿꼿이 세우고 개선장군처럼 풀밭을 활보하고 있다. 그 모습은 더없이 늠름하다. 수탉의 탈출은 한 번..
[좋은수필]황동나비경첩 / 이상수 황동나비경첩 / 이상수 화초장 위에 황동나비가 고요히 앉아있다. 흡밀吸密이라도 하듯 미동이 없다. 철심鐵心이 박힌 나비의 반쪽은 몸판에, 다른 쪽은 문짝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문을 여닫을 때마다 황금빛 날개가 팔랑거린다.친정 안방에 놓인 화초장은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왔다. 두 칸짜리 문판에 단아하게 매화가 그려져 있고 황동나비 세 마리가 돋을새김 되어있다. 안쪽엔 해충의 침입을 막으려 한지를 덧발랐다. 위 칸엔 모시적삼을 비롯해 두루마기와 유건이 걸리고, 아래 칸엔 치마저고리며 처녀 때 손수 수놓은 베갯잇이 포개져 있다.친정 부모님이 부부의 연을 맺은 것은 육십 년 전이었다. 열다섯에 가장이 되어 책임감 강한 아버지와 놀기 좋아하던 철없는 막내딸 어머니는 초례청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엔 으레 ..
[좋은수필]나의 수필 쓰기 / 서숙 나의 수필 쓰기 / 서숙(자폐적 글쓰기와 문지방 넘기) 단번에 알아먹는 글은 매력이 없다. 어디선가 본 듯한 흔히 접하는 이야기의 나열이나 고뇌도 반성도 없이 지루한 글을 읽는 것은 시간 낭비다. 뭔가 참신한 시각과 접근이 내게 와닿아야 한다. 그렇지만 말초적이고 정련되지 않은 정서와 가벼운 치기, 지나친 파격은 반갑지 않다. 작위적인 '글을 위한 글'은 외면한다. 사유의 틀은 정연하고 문장은 깔끔하여 우아한 분위기를 지닌 글이 좋다. 나에게 독서는 심심파적의 대상이 아니다.지적 희열이 성찰과 깨달음을 동반하여 법열이라 할 만한 경지에 이르는 것은 나에게 즐거운 유희다. 정서적 뭉클함을 통해 고양되고 승화하는 느낌 속에 푹 잠길 때 행복하다. 드물게는 뒤흔들어대는 강력함 속에 내 전 존재를 가두어 ..
[좋은수필]등명여모(燈明如母) / 이정화 등명여모(燈明如母) / 이정화 등대는 구도자를 닮았다. 백 년을 하루같이 오롯이 지켜 서서 보시의 불을 밝힌다. 희뿌연 해무 속에서 어른거리는 불빛만이 들고나는 배들에게 생명의 길을 인도한다. 등대에게는 구도의 길이 숙명과도 같았다. 바다는 팽팽한 부력으로 배를 밀어 올린다. 바람이 일으킨 파도는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길고 짧은 용틀임을 한다. 얼마나 많은 배들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잠재우는 그 바다 아래로 침잠해 들었을까. 한없이 가볍고 부드러운 물이라지만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을수록 무거운 벽이 되어 버린다. 거친 세상처럼 짓눌려 온다. 모든 것을 삼킨다 해도 티 하나 나지 않을 바다이다. 그 거친 바다를 내다보며 가랑잎 같은 배들을 불러 모아 품어 주는 등대는 바다와 맞서지 않았다. 희미해져 가는 ..
[좋은수필]풍로초 2 / 정성화 풍로초 2 / 정성화 동생이 전화를 했다. 엄마가 요즘 말하는 것도 귀찮아하고, 매일 챙겨 보던 TV 드라마도 재미없다고 하며 그저 멍하니 창밖을 내다본다고 했다. 폐 질환으로 십 년 넘게 입 · 퇴원을 반복했으니 그럴 만하다고 이해하면서도 한숨이 나왔다.맛있는 음식이나 좋은 옷을 사드리고, 신나는 노래 테이프를 틀어드려도 엄마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감정이란 걸 죄다 내다 버린 것 같기도 했고 모두 잃어버린 것 같기도 했다. 사는 게 귀찮다고 했다. 위로하는 차원에서 달달한 믹스커피를 한 잔 타 드렸더니, 몸에 좋지 않은 걸 권한다며 타박하셨다. 아주 심각한 상태는 아닌 듯했다.내가 중학생일 때까지도 엄마는 좁은 마당 한 편에 분꽃과 채송화를 심었고 종종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꽃을 들여다보곤 ..
[좋은수필]삼일운동의 완성 / 김보미 삼일운동의 완성 / 김보미 엄마는 일을 나가시기 전, 항상 수제비 반죽을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두셨다. 들고 나는 시간이 제각각인 가족들이 반죽만 뜯어 우르르 끓여 먹도록 하신 것이다. 도저히 섞일 것 같지 않은 물과 가루는 딱딱한 부스러기를 만들어내며 겨루다 종내에는 말랑거리는 덩어리가 되곤 했다.나는 그 과정을 숨도 쉬지 않고 바라보았다. 내 굽은 손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그 신기한 광경은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마술쇼 같았다. 날 때부터 사지가 뒤틀린 지체장애인으로 태어난 나는 엄마처럼 밀가루 반죽을 만들 수 없었다. 그래서 밀가루 대신 책을 집어 들었다.글이 내 마음에 부딪쳐와 하나가 될 수 없을 것처럼 엉기다가 마침내 내 영혼과 연결되어 덩어리지는 과정이 좋았다. 그 순간엔 나도 엄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