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5936) 썸네일형 리스트형 [좋은수필]새벽 한 조각 / 민명자 새벽 한 조각 / 민명자 새벽 네 시, 컴퓨터를 켠다. 불빛 따라 모기 한 마리가 날아 들어와 모니터 화면에 앉았다가 앵~ 소리를 내며 공중을 선회한다. 천리를 가지 못할 이 작은 물것은 제가 앉은 자리, 날아오르는 자리가 세상 전부인 줄 알지 않을까.아파트 밖에서는 갖가지 소리들이 뭇 존재의 움직임을 알려준다. 삐~익 삐리리릭, 잠들지 못한 새 한 마리가 날카로운 장단음을 내며 정적을 가른다. 그 소리에 잠에서 깼는가. 왜왜왜왜 왜~, 홀연한 매미 울음이 물음표로 들린다. 큰길에서 자동차가 쌩쌩 달리는 소리, 누군가 술에 취해 아파트 앞을 지나며 고래고래 부르는 노랫소리가 13층 꼭대기까지 올라와 메아리처럼 허공을 맴돌다 흩어진다. 고요한 새벽에 들리는 소리는 유달리 가깝고 크다. 마치 "나 살아 있.. [좋은수필]여전히 간절해서 아프다 / 조헌 여전히 간절해서 아프다 / 조헌 사랑은 이별을 하기 전까지는 그 깊이를 알지 못한다. 사랑의 기쁨은 둘이 나눌 수 있지만, 이별의 고통은 각자 넘어야 하는 험악한 산이다. 함께 하는 삶과는 다르게 죽음이 누구에게나 개별적인 것처럼.군 입대 영장을 받고 며칠 후,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뜻밖의 이별 통보. 멍하니 듣던 나는 그만 천지가 무너졌다. 아직도 온 마음이 그녀를 찾고 있는데 틈도 주지 않고 떠난 박절한 뒷모습. 불면의 밤은 날카로운 비수로 나를 난도질하고, 끝내 이기지 못한 허기虛飢에 물 만 밥을 꾸역꾸역 입에 넣으며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숨었던 그리움은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을 저몄다. 세월은 나를 얼마나 도와줄 수 있을까? 정지된 듯 꼼짝도 하지 않는 시간에 나를 그냥 던져두었다.대학 1.. [좋은수필]다듬이 방망이 / 윤태근 다듬이 방망이 / 윤태근 엄마의 다듬이질은 저녁상을 물리고 한참 지나 졸음이 찾아올 때쯤 시작한다. 풀 먹인 당목 이불호청이 너무 말라 뻣뻣하다고 놋대접에 맑은 물을 준비한다. 할머니와 맞잡고 팽팽히 당기다가 입으로 푸우~ 안개같이 뿜어낸다. 주름을 대강 편 후 개켜 밟다듬이를 시작한다.심심하다. 눈을 비비며 떼를 써 본다.“으응, 재밌는 옛날 얘기이~”“이야기 너무 바치면 가난뱅이 된다. 어서 자거라.”그러면서도 할머니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이웃 마을 돌이 아버지가 밤늦도록 술 마시고 집으로 오다가, 동구 밖에서 도깨비 만나 새벽까지 씨름하고 넋이 빠졌다는 이야기. 뒷간 몽당귀신 이야기. 서낭당 앞 모퉁이에 산다는 처녀귀신, 달걀귀신 이야기. 늙은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어린 신랑을 구하려고 호.. [좋은수필]불을 꺼야 빛나는 것들 / 금강 스님 불을 꺼야 빛나는 것들 / 금강 스님 산사의 가을밤은 제법 쌀쌀하다. 두꺼운 옷을 꺼내 입고는 밤 숲길을 걷는다. 이번 가을은 비가 많이 내리고 흐린 날이 많아 별빛을 만나기 어려웠다. 모처럼 맑은 날의 밤을 기다렸다. 나무들은 벌써부터 겨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음 세대를 위한 열매를 땅에 내어놓고, 애써 봄부터 꺼내어 단단하게 만들었던 나뭇잎들과도 붉은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밝게 빛나는 별빛과 청명함이 깃든 가을밤 숲길의 적요 속으로 걸어 들어가니 참 좋다.마당에 나가 하늘을 보는데 별빛이 흐리다. 몇 해 전 숭례문이 방화로 스러진 후에 국가지정문화재의 건축물은 방범·방화 시설을 단단히 보완했다. 마당 곳곳에 방범등을 켜 놓으니 절집에도 밤이 환하다. 일본 호시노무라에서 본 별빛이 가장 아름.. [좋은수필]심심하지 않게 / 김종완 심심하지 않게 / 김종완 조계사 만발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다닌 지 근 일 년쯤 되어간다. 세상사 가장 중요한 문제가 먹는 것일진대, 부처님의 가피를 새록새록 실감한다. 자원봉사자들로 운영되는 식당인지라 가격(이천 원)에 비해 질이 매우 우수하다. 좋은 쌀로 밥을 짓고 신선한 야채로 바로 요리를 하는데 인공조미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맵고 짜지 않아 자극적이지 않고 된장은 직접 담근 것이라 옛날 맛 그대로다. 욕심 같아서는 매일 이용하고 싶은데 사실은 그럴 수가 없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손님들이 있어 주변 식당에서 매식한다. 식당 음식이라는 게 아무리 식당을 바꾸고 메뉴를 바꿔보아도 곧 질리고 말아 차라리 단사표음(簞食瓢飮)하고 싶을 때도 있다. 인공감미료 탓일 게다. 그런데 조계사 만발식당은 질.. [좋은수필]사과는 어디로 갔을까 / 민명자 사과는 어디로 갔을까 / 민명자 사과 옆에 왜 해골을 그려 넣었을까. 풀 세잔의 「해골이 있는 정물」을 본다. 화석처럼 굳어 있던 다락방 풍경이 겹친다. 그 사과들은 어디로 갔을까.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자리에 누워있던 어머니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어. 며칠 사이에 갑자기 병색이 깊어졌었어. 어머니에게 드리려고 산 사과를 머리맡에 던져 놓았지. 사과는 한동안 다락방에 있었어.' 사과에 대한 기억은 딱 거기까지다. 흑백화면은 다락방에서 정지된 채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을 앞둔 시기였다. 학교에선 수학여행은 말 그대로 수업의 연장이라고 했지만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여행지는 경주 불국사, 기차를 탈 기회도 거의 없었을 때이니 기차여행에 대한 설렘과 친구.. [좋은수필]내 빛깔 / 유병근 내 빛깔 / 유병근 제비꽃을 보다가 민들레를 본다. 제비꽃을 볼 때는 오종종한 작은 쪽빛이 마음에 들었다. 민들레도 돌담 아래 자리를 잡고 노랗게 햇빛을 받아먹는다. 돌담 발치에 피는 꽃은 바람막이가 된 돌담에 등을 기댄다.장미처럼 넝쿨을 뻗어나가는 꽃은 가시를 몸에 단다. 함부로 몸에 손을 대지 말라는 으름장이 가시에 있다. 꽃이 탐스럽다고 꺾을 경우 뾰족한 가시로 상대를 괴롭힌다. 숙녀의 날카로운 하이힐 굽도 장미꽃 줄기에 매달린 가시나 다름없는 일종의 무기 아닌가. 날카로운 굽은 또각또각 소리를 하는 걸음걸이의 멋만은 아니다.제비꽃은 피는데 제비는 오지 않는다. 예전에는 전깃줄에 나란히 앉아 쉬던 수백 수천 마리나 되는 무리였다. 오지 않는 제비를 그리워하는 제비꽃인지도 모른다.제비꽃에겐 돌담이 .. [좋은수필]길을 잃은 길잡이 / 김기석 길을 잃은 길잡이 / 김기석 벌써 오래전의 일이다. 군목으로 임관하기 위해 훈련을 받던 시절 독도법(讀圖法) 훈련을 받았다. 나침반 하나와 등고선이 있는 지도 한 장을 들고 제시된 좌표를 찾아가는 훈련이었다. 등고선의 밀도에 따라 산세는 완만하기도 했고 가파르기도 했다. 지도로 보는 세상과 지형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게 여간 재미있는 게 아니었다. 등고선만 보아도 그 계곡의 모양이 떠오르고, 그곳에 자라는 식물의 종류를 짐작할 수 있고, 새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교관들의 설레발이 얼마나 신선했던가. 훈련을 마치고 집결지에 모였을 때 적당히 요령을 피운 동료들은 라면집에서 고단한 몸을 쉬고 있었다. 우리가 온종일 찾아 헤매던 좌표에 대한 해답은 라면집 메뉴판 뒤에 적혀 있었던 것이다. 요.. 이전 1 2 3 4 5 6 7 8 ··· 74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