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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6

[좋은수필]내 빛깔 / 유병근

내 빛깔 / 유병근

 

 

제비꽃을 보다가 민들레를 본다. 제비꽃을 볼 때는 오종종한 작은 쪽빛이 마음에 들었다. 민들레도 돌담 아래 자리를 잡고 노랗게 햇빛을 받아먹는다. 돌담 발치에 피는 꽃은 바람막이가 된 돌담에 등을 기댄다.

장미처럼 넝쿨을 뻗어나가는 꽃은 가시를 몸에 단다. 함부로 몸에 손을 대지 말라는 으름장이 가시에 있다. 꽃이 탐스럽다고 꺾을 경우 뾰족한 가시로 상대를 괴롭힌다. 숙녀의 날카로운 하이힐 굽도 장미꽃 줄기에 매달린 가시나 다름없는 일종의 무기 아닌가. 날카로운 굽은 또각또각 소리를 하는 걸음걸이의 멋만은 아니다.

제비꽃은 피는데 제비는 오지 않는다. 예전에는 전깃줄에 나란히 앉아 쉬던 수백 수천 마리나 되는 무리였다. 오지 않는 제비를 그리워하는 제비꽃인지도 모른다.

제비꽃에겐 돌담이 현주소다. 민들레는 돌담 아래가 마음에 차지 않아 낙하산 같은 씨앗 봉지가 되어 더 넓은 낯선 곳으로 날아간다. 개척자 정신을 갖는 민들레다. 그러나 제비꽃은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제 자리에서 지킴이 노릇을 한다. ​

제비꽃처럼 한 지역에서만 뿌리를 뻗어 사는 사람이 있다. 민들레처럼 더 멀고 넓은 지역으로 가서 터를 잡는 사람도 있다. 그런 점 제비꽃은 보수적인데 민들레는 진보 성향이라고 할까. 보수와 진보가 서로 어울려 살듯 돌담 아래 제비꽃이 피고 민들레도 피어 자란다.

마음이 어수선한 날은 돌담 아래에서 제비꽃을 보고 민들레 꽃을 본다. 마음이 금방 제비꽃 편이 되었다가 민들레 꽃 편이 되었다가 한다. 이를테면 보수파가 되었다가 진보파가 되었다가 하는 나를 본다. 이건 아무래도 기회주의자나 다름없는 정신이다.

간에 붙고 쓸개에 붙어 알랑거리다가 기어이는 간에서 쫓겨나고 쓸개에도 붙어 있지 못하고 밀려나 가는 인사를 보는 경우도 있다. 지조가 없는 인사의 종착역은 신용불량이란 도장을 등에 쾅 찍힌다. 어느 사회에서도 구제받지 못하는 딱한 처지가 된다.

돌담 아래 서 있는 나는 금방 또 제비꽃의 쪽빛에 눈을 판다. 민들레 꽃의 노란 빛깔이 탐스러워 손으로 쓰다듬기도 한다. 나는 또 내 또래에서 혹 왕따 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너 자신을 알라고 세상​은 말하는데 나는 모르는 것이 지나치게 많다. 이 글의 길이 어떻게 풀려나갈지 우선 모른다. 멀리 생각할 것도 없다. 글에도 종착역이 있기 마련인데 나는 글의 종착역을 모르고 헤매는 때가 비일비재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산다. 흔히 하는 말로 사니까 산다는 힘없는 말이나 속으로 내뱉는다. 나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 멀리 던져버리고 싶은 때가 수시로 있다. 그렇다고 강물에는 던지지 말아야겠다. 농담이지만 누가 말했다. 가령 한강물에 무더기로 빠지면 가장 먼저 건져야 하는 인사가 있다고 한다. 강물을 흐리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세상에는 착한 척하면서 은근히 세상을 흐리게 하는 무리가 있는 것 같다.

나는 또 나를 본다. 눈 코 귀 어느 것 하나 성한 것이 없어 보이는 종합병원 신세다. 이런 주제에 글을 쓰다니 수필에 부끄러운 일이다. 때로는 쓰지 아니하고는 배길 수 없다. 이 또한 고질병이다. 그런 주제에 나는 나에게 솔직하고자 쓴다고 감히 말한다. ​

흐리던 날이 밝아온다. 밝은 마음으로 살아야겠다. 제비꽃은 쪽빛으로 아름답고 민들레는 금빛으로 아름답다. 터무니없는 욕심이지만 나도 내 빛깔 하나 가지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