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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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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가로등 / 박목월 가로등 / 박목월   가로등이 좋아지는 것은 역시 겨울철이다. 함박눈이 쏟아지는 밤에 설레이는 눈발 속에서 우러러보는 등불. 그것은 우리의 눈길이 닿을 수 있는 동경憧憬의 알맞은 위치에 외롭게 켜 있는 꿈의 등불이다. 그 등불이 켜진 가로등 기둥에 호젓이 기대어 가없는 명상에 잠시 잠겨보는 고독한 모습 ─ 그것은 젊은 날의 눈물겨운 나의 모습이다.그러나 요즈음은 눈 오는 밤 가로등에 기대 보는 그런 ‘고독한 낭만’조차 잊은 지 오래이다. 그것은 내가 나이 든 탓만이 아닐 것이다. 인간이란 나이가 들수록 고독해지는 것이며, 그래서 눈이 오는 밤은 한결 유감有感해질 수도 있는 일이다. 다만 내가 고독한 낭만을 못 가지는 것은 세태의 탓이다. 해방 후로 우리는 밤의 낭만을 잃어버렸다. 그 포근한 밤의 지형 없..
[좋은수필]거처(居處) / 김은주 거처(居處) / 김은주  *님이 거처를 옮겼다는 전갈이 있어 밤길을 나섰다.모진 추위를 견딘 매화가 제 몸을 연 봄날, 분분한 그 꽃잎, 미처 보지도 못한 채 님은 기별 없이 먼 길을 떠났다. 오대산 쯔데기골 산중 거처에 아직 잔설이 채 녹지도 않았을 터인데, 등을 받쳐주던 대나무 평상과 지팡이마저도 버리고 어디로 가신 것인지, 도대체 간 곳을 모르니 마지막 길목이라도 지키고 싶어 나선 길이다. 보고 싶어, 너무나 보고 싶어 나선 길인데 생전의 그 모습이 그저 아련하기만 하다. 갈수록 어둠은 깊고 길은 멀다. 한밤의 기침마저도 귀한 손님 맞듯 맞으신 님, 쿡쿡 새벽 정적을 열었을 님의 기침 소리가 내 가슴을 부리로 쫓는다. 눈이 녹고 산골 오두막에 봄이 오듯이 님도 다시 돌아오면 좋으련만 허공에 발 뻗은..
[좋은수필]몸짓 / 김응숙 몸짓 / 김응숙  그해 1월, 우리 집 단칸방에 달력 하나가 걸렸다. 손끝에 스치기만 해도 우수수 시멘트 가루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벽에 발라진 얇은 벽지에는 희미한 회색 꽃무늬가 엇갈리며 그려져 있었다. 그 벽지에 빈대 자국 같은 붉은 녹물을 남기며 박힌 못에 기다란 열두 장의 달력이 걸린 것이다. 보통은 국회의원의 얼굴이 동그랗게 실린 벽보 같은 커다란 한 장짜리 달력이었지만, 어쩌다 색색의 한복을 입은 여인들이 절을 하거나 그네를 타거나 하는 달력이 걸리기도 했다. 운이 좋은 해는 아랫동네 쌀가게에서 주는 하루에 한 장씩 뜯어내는 일일 달력이 걸리기도 했는데, 그런 해는 노상 그 가게에서 외상으로 쌀을 가져오던 어머니가 설을 맞아 어쩌다 그 외상값을 다 갚았던 해였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해 ..
[좋은수필]거미 / 노혜숙 거미 / 노혜숙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아니, 내가 일방적으로 쳐다보았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언제부터 녀석이 거기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녀석의 등장으로 모처럼 즐기려던 오수의 꿈을 놓치고 말았다.저 정도 안정감이면 다따가 뚝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녀석의 기력이 쇠하거나 방심하여 떨어지는 경우도 예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그 위치에서 직선으로 떨어진다면 충돌 지점은 누워있는 나의 코나 입술 언저리가 될 것이었다. 생각만으로도 콧등이 근질거렸다.녀석은 도대체 어디로 들어온 것인가. 제아무리 고공비행에 능하다 할지라도 아파트 13층은 결코 만만한 높이가 아니다. 게다가 베란다의 촘촘한 방충망을 뚫고 들어온 걸 보면 꽤나 용의주도한 놈일지 모른다. ​어쩌면 집단의 구속이 싫어..
[좋은수필]헤르메스의 그릇 / 반숙자 헤르메스의 그릇 / 반숙자  다리와 다리 사이에 열일곱 살 애기 초경 같은 빛깔이 어른댄다. 누가 장난삼아 색종이를 끼워뒀나 싶어서 가까이 다가갔다. 겹겹의 잎 사이 안쪽 한 장이 그 빛깔을 푹 덮고 있다. 볼펜 끝으로 잎을 들춘 순간 아! 숨 막히는 황홀. 누가 볼세라 얼른 잎을 도로 덮어주는데 가슴이 뛴다. 처음이다.​ 밖에는 눈보라 치고 영하 십사 도의 혹한에 거실에 들여놓은 화초들은 철모르고 푸르러 커피를 마실 때면 커피잔을 들고 군자란 앞으로 갔다.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 군자란이 내 집에 온 지 달포가 지나도록 잎들은 단순한 ​구도로 어제가 오늘인 듯 변화가 없었다. 새침떼기다. 그런데, 그런데…. 나는 지금 가슴에서 다리까지 떨려 구부정하게 걸어서 소파에 앉았다.열두 서너 살쯤인가. 송판때기..
[좋은수필]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 김국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 김국자  점심을 먹고 오수午睡를 즐기다 맑은 새소리에 정신이 들어 창밖을 보니 겨울 햇살이 반짝이고 있다. 나는 숄을 두르고 뜰로 나선다. 싸늘한 공기가 코끝을 스치며 지나간다. 깃털이 하얀 새가 옆집 나무숲을 들락거리며 바쁜 날갯짓을 하다가 쏜살같이 앞집 정원으로 숨어버린다. 어찌나 잽싼 동작인지 잠에서 깬 내 눈으로는 쫓아가기조차 힘들다. 조금 전 무슨 꿈을 꾸었는지 생각이 아득해진다. 어딘지 먼 곳을 다녀온 것 같기도 하고 꽃이 핀 들판을 헤매다 온 것 같기도 하고….뜰은 비참하리만큼 얼어붙어 있다. 모든 생명이 언 땅속으로 숨어 버렸다. 할미꽃 순의 흰 솜털만 흙 속에 묻혀 조금 보인다. 그 옆에 자리 잡고 있던 도라지, 매발톱은 흔적조차 없이 땅속으로 사라졌다. ..
[좋은수필]벼랑을 품은 바다 / 김응숙 벼랑을 품은 바다 / 김응숙  가슴에 벼랑을 품은 이는 동해바다로 갈 일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툭 끊어지고, 그 아스라한 끝점에 한 발을 디딘 사람, 하루와 하루의 틈 사이로 까마득한 바닥이 보이는 사람은 말이다. 가서 그 푸르고 푸른 물결 앞에 주저앉을 일이다. 한사코 몰려오는 파도가 당신을 적시도록 그저 자신을 내어줘 볼 일이다.동해바다의 파도는 뿌리가 깊다. 심해에서 자라난 해초처럼 너울거리다 무릎을 세우며 달려 나와 포말을 터트린다. 터트리는 순간 물 거룸으로 흩어지는 하얀 불꽃이다. 되돌이표로 가득한 악보라도 뿌리에 새겨져 있는 것일까. 소멸로 이어지는 끝없는 불꽃 너머로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바다가 하늘에 닿아 있다. ​동해 바다가 푸른 것은 수심이 깊기 때문이다. 평균 수심이 1700m에 ..
[좋은수필]다섯 섬인지 여섯 섬인지 / 유병근 다섯 섬인지 여섯 섬인지 / 유병근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바로 눈앞의 오륙도를 입에 담는다. 섬이 다섯이라느니 여섯이라느니 고개를 이쪽 혹은 저쪽으로 갸웃거리며 헤아리기도 한다.남구 용호동 장자산의 남서 끝자락 해안에 매달린 오륙도는 이마에 부딪칠 듯 훤하다. 성큼 건너뛰면 금방 방패섬에 닿을 듯하다. 육지에서 가까운 섬부터 헤아려 방패섬 솔섬 수리섬 송곳섬 굴섬 그리고 등대섬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다. 기억이란 때로 빛이 바래지는 법이라며 그때 노트에 적었었다.장자산이 미처 말하지 못한 속내를 말줄임표처럼 띄엄띄엄 찍어둔 것이 섬이 되었을 것이다. 섬 이름에서 그 말줄임표가 무슨 내용인지를 대강 짐작할 수도 있어 보인다.오륙도가 잘 나오게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잡는 관람객이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