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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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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복숭아씨 / 박혜자 복숭아씨 / 박혜자 과일가게 주인이 맛 보라며 복숭아 한쪽을 준다. 토실토실 살이 올라 단 냄새를 물씬 풍기던 복숭아는 살을 다 발라내자 씨만 남았다. 주인이 복숭아씨를 휴지통에 던지고는 복숭아 한 개를 또 깎는다. 복숭아씨가 맨몸으로 휴지통에 웅크리고 있다.평생 땅 한 뙈기 가져 본 적이 없는 아버지 이름으로 땅이 생겼다. 비가 와야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산 아래의 천수답이었다. 천수답이 생긴 후로 아버지는 더욱 일에 매달렸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농작물은 토실토실 살이 올라가는데 아버지의 몸은 마른 장작처럼 말라갔다.복숭아 알이 주먹만큼 커지고 매미소리가 요란하게 울어대던 날 아버지를 만나러 병원에 갔다. 터널 앞에서 내린다는 것을 그만 터널을 지나서 내리고 말았다. 무엇이든 때가 있다. 아버지가..
[좋은수필]유월 / 반숙자 유월 / 반숙자 한 해도 반 고비에 들어섰다. 정월부터 오월까지가 무에서 유를 파종하는 시기라면 유월은 결실을 시작하는 일 년의 후반기에 해당한다.올 유월이 나에게 새롭게 다가온다. 조금 높은 지대인 농막에서 내려다보면 초록, 초록의 향연이 안정감 있게 펼쳐진다. 봄의 새순이 나풀거리며 하늘에서 내려오듯 신선하고 환희롭다면 유월의 새순은 뿌리로부터 든든한 양분을 빨아올려 성장하려는 나무의 깃발이다. 호들갑스럽지 않고 산만하지 않다. 바로 앞 과수원에서는 열매 솎기가 끝난 사과나무에 새순이 일제히 올라와서 초록바다가 된다. 새순은 곧게 올라온다. 아래 논에는 지금 세 포기씩 심은 볏모가 새끼치기에 바쁘다. 거기서 내뿜는 초록빛은 바로 생명이고 밥줄이다. ​이 나이에 잃었던 유월을 다시 찾는다. 열두 살 ..
[좋은수필]빗방울 전주곡 / 구활 빗방울 전주곡 / 구활 비가 오는 날이면 쇼팽의 전주곡 15번 '빗방울'을 듣는다. 날씨가 흐린 날에도 '어서 비가 오라'고 그 음악을 듣는다. 그 곡을 듣고 있으면 마음에서부터 비가 내린다. 참 좋다. 비가 오면 조금은 쓸쓸하지만 비가 전해 주는 슬픔이 때로는 따뜻한 위안이 될 때가 있다. 그래서 좋다.쇼팽의 '빗방울'을 듣고 있으면 슬픈 일도 없는데 피아노 건반 위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가 괜히 나를 슬프게 한다. 그럴 때면 빗물이 타고 내리는 유리창 앞에 선다. 눈도 흐려지고 마음도 흐려져 슬픔은 더욱 커진다. 이별의 아픔을 앓는 사람처럼 외롭고 처량하다. 슬플 때는 유리창처럼 울어야 한다.'빗방울'을 들을 때 미다 두 이미지가 겹친다. 하나는 쇼팽이며 나머지 하나는 나 자신이다. 스물여덟의 쇼팽..
[좋은수필]사초 / 강현자 사초 / 강현자 아버지 산소엔 가뭄으로 인해 군데군데 빈 잔디 위로 한숨만 풀풀 날렸다. 아버지가 공들여 지킨 흔적처럼 그나마 남아있는 잔디도 겨우 마른 풀빛을 머금고 있었다. 90년 만에 닥친 가뭄을 아버지도 아셨을까. 아버지는 바람도 달구어 재워놓고 잔디까지 다 태울 기세로 매일 내리쬐는 불볕을 핑계 삼아 자식들을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외롭다는 듯 잡초들을 봉분의 키만큼 키워놓고 계셨고, 자주 찾아뵙지 못한 나의 불효의 길이만큼 자란 잡초들이 아버지의 쓸쓸함을 대신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투정이 사랑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의 사랑 표현은 매서운 불호령이 전부였다. 귀가하는 아버지를 맞이할 때 가족들 중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불호령이 났고, 또 그때마다 아버지..
[좋은수필]고도 / 송명화 고도 / 송명화 방학이 다가오면 교사들은 생활지도에 더욱 관심을 쏟는다. 올해는 예년에 없던 항목이 하나 더 늘었다. 아이들에게 엘리베이터를 혼자 타지 말라고 당부한 것이다. 유괴나 성폭행이 걱정되어 부모들이나 교사들은 아이들이 눈앞에 보이지 않는 시간 내내 좌불안석이다. 간곡하게 지도를 하고 하교 시켰다. 텅 빈 교실에 혼자 앉아 곰곰이 생각하니 씁쓸하기 이를 데 없다.우리 조상들은 집안 어른들뿐만 아니라 동네 어른들의 가르침에 힘입어 행동거지를 바로잡았다. 어른이라면 누구나 자기 아이, 남의 아이 할 것 없이 가르치고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 대대로 내려온 우리 민족의 사고방식이었다. 잘못된 행동을 하면 동네 어른들이 나서서 치죄하기도 하고, 좋은 일이 있으면 동네잔치를 벌여 ..
[좋은수필]부석사浮石寺 / 배단영 부석사浮石寺 / 배단영 오후 내내 하늘이 흐리더니 문을 나설 때는 이미 빗방울이 굵어져 있었다. 마른 땅은 빗방울을 훑고 지나가자 흙냄새가 진동한다. 제법 웅덩이마다 비가 차이고 바짓단은 비에 젖은 채 시간이 지나갈수록 무겁게 느껴졌다.주위를 몇 번이나 헤매고서야 그녀가 사는 집이 위치한 골목길로 들어섰다. 돌담과 기와의 처마가 일정하게 연결되어 있어 찾고자 하는 집을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이 층으로 연결된 계단을 보고서야 그 집을 찾을 수가 있었다. 계단에는 밑으로 흐르지 못한 물들이 제법 고여 있었다. 계단을 오르자 이층집 위에는 낡은 옥탑방이 비에 젖은 채 웅크리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을 서너 번 불렀지만, 빗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녹 쓴 파이프에 매달려 있던 빨랫줄이 바람에 흔들리..
[좋은수필]축항 사람들 / 김철순 축항 사람들 / 김철순 해 지난 파래가 흰 꽃처럼 나풀거린다. 셔터가 한 컷을 건져 올릴 때마다 겨울 바다는 시샘하듯 내 종아리로 짠물을 퍼 던진다. 성큼 뒷걸음으로 물러서다 빠지직 밟히는 소리에 내려다보니 반들거리는 홍합무리가 방파제를 오지게 붙잡고 있다.한때 형산강과 송도 바다가 만나는 곳에 방파제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축항이라 불렀다. 그 위로 횟집이 하나, 둘 들어서면서 붉고 푸른 천막촌이 이어졌다. 해수면과 같은 천막촌은 물 위에 떠 있는 수상가옥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싱싱한 회 맛도 볼 겸, 좁은 축항 길을 누비며 이 색다른 풍경을 즐겼다. 축항은 파도와 싸우는 바다 사람들 쉼터이고 철강 공단 노동자가 푸념을 늘어놓으면 재충전을 하는 자리이기도 했다.햇살이 좋은 아침이면 자주 축항을 찾..
[수필]대책 없는 병 / 신현식 대책 없는 병 / 신현식 오늘도 한바탕 소란이 있었다. 그 여파로 집안은 종일토록 냉기가 감돌았다. 신 선생 부부는 근래 들어 자주 다투는 편이다. 그럴 나이도 한참이나 지났건만 티격태격한다.신 선생은 수필 강사다. 도서관에서 글쓰기 강좌를 열고 있다. 그것도 이십여 년을 하고 있으니 꽤 오랫동안 하고 있다. 오십 조금 넘어서 시작했으니, 인생 후반은 거의 선생 노릇 하는 셈이다. 그러니 언행言行이 몸에 밸 수밖에 없기도 하다.신 선생 부부도 여느 집처럼 시답잖은 것으로 다툼이 시작된다. 김 여사가 무심코 던진 말에 신 선생이 꼬투리를 잡거나 대꾸를 하여 확산되곤 한다. 가만히 있으면 될 것을 괜한 간섭을 하여 기름에 불을 붙이는 격이다.김 여사는 성질이 급한 편이다. 말이 마음보다 한 걸음 앞서 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