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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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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직박구리 / 강도운 직박구리 / 강도운 평소에는 전혀 마음에 와닿지 않던 것이 뜬금없이 찾아와 뇌리에 깊이 새겨지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런 때엔 나는 생각지 못한 소득이라도 얻은 양 희열에 싸이게 된다. 이번에는 직박구리가 그런 의미로 다가와 내 안에 둥지를 마련했다.직박구리 한 마리가 벚나무 가지 위에 앉아 있다. 연신 두리번거리는 것을 보니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퍽이나 신기한 모양이다. 녀석이 세상을 향해 반짝이는 눈빛을 보내듯 나 또한 눈을 들어 녀석을 찬찬히 살펴본다. 칙칙한 잿빛을 띤 어두운 몸 색깔이며 하늘을 향해 곤두서 있는 머리털까지, 왠지 만개한 벚꽃과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다. 더군다나 봄이 오면 노란 새순과 꽃잎을 주로 따 먹으니, 여리고 예쁜 것을 골라 먹는 식성에 비해 생김새는 전혀 딴판이다."삐..
[좋은수필]노릇노릇하게 / 이미영 노릇노릇하게 / 이미영 명절이면 유독 그렇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괜찮아’라고 주문을 걸어보지만 약발은 신통치 못하다. 어머니는 거실에서 다른 일을 하다가도 “아이고” 탄식 같은 추임새를 넣고는 제자리 뺑뺑이를 돌다가 겨우 일어선다. 아픈 다리를 끌듯이 걸어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다.노릇노릇하게 바삭바삭하게 하라고 말씀하시면서 해놓은 음식들을 뒤적인다. 마음에 들지 않은 놈들을 골라 다시 하기를 바라는 표정을 지으면 금세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고, 괜찮지가 않게 된다. 가만 생각해 보니 처음에는 그렇지가 않았다.결혼 후 첫 명절을 맞아 큰댁으로 음식 장만을 도우러 갔다. 사람들도 낯설고 일도 어설픈 내게 사촌 형님들은 자상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럴 때마다 큰 어머니가 와서 똑같은 말씀을 덧붙였다...
[좋은수필]자리에 앉다 / 맹난자 자리에 앉다 / 맹난자 무자년 제야除夜, 침잠되는 마음을 붙들고 고요히 자리에 앉는다. 생의 궁극적인 물음이 저 우주의 끝에 닿는다.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가고 오는 것은 무엇이며, 보고 듣는 그것은 대체 또 무엇인가? 무엇이 보는가? 눈이 보는가, 눈 뒤의 안식眼識이 보는가. 안으로 참구해 들어간다.손바닥을 힘껏 마주쳤다. 딱! 이렇게 보는 것이 아닐까? '눈과 그것을 보게 하는 능력, 존재자와 존재의 간격도 없이 딱! 이렇게 봅니다.' 답을 써 본다. 욕망 덩어리, 에고인 내가 보는 것이다. 4차원의 어떤 신령한 능력이 3차원의 나를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3차원인 그대로의 선험先驗에 물들지 않은 내가 보는 것이 아닐까?그동안 4차원은 좋고 3차원은 열등하다고 생각한 내 자신이 거기에 ..
[좋은수필]매화는 얼어야 핀다 / 손광성 매화는 얼어야 핀다 / 손광성 오랜 세월 두고 매화만큼 사랑을 받아 온 꽃도 달리 더 없을 듯싶다. 시인치고 매화를 읊지 않은이 없고, 화가치고 매화 몇 점 남기지 않는 이 드물다.사랑을 받으면 부르는 이름 또한 그만큼 많아지는 것일까. 매화는 달리 부르는 이름이 없다. 청우淸友니 청객淸客이라 하기도 하고, 일지춘一枝春, 또는 은일사隱逸士라고도 한다. 모두가 그 맑고 깨끗한 품성을 기려 이르는 말이다. 게다가 엄동설한에도 훼절함이 없는 고아한 청결. 해서 매화는 소나무와 함께 세한삼우歲寒三友에 넣기도 한다.진나라 때이다. 한때 문학이 성하자 매화가 늘 만개했다고 한다. 그러다 문학이 쇠퇴하자 매화도 따라서 피기를 멈추었다고 한다. 그 후부터 문학을 사랑하는 꽃나무라 하여 호문목好文木이라 부르기도 한다...
[좋은수필]2월의 소리 / 정목일 2월의 소리 / 정목일 2월은 기수旗手 뒤에 서 있는 키 작은 사람같이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있는 듯 없는 듯하고 얼굴의 윤곽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팔삭둥이처럼 무언지 좀 부족한 듯이 느껴진다. 햇빛을 환히 받는 웃음띤 얼굴이 아니고, 응달에 얼굴을 숙이고 있는 못난 사람 같다. 제 몫을 챙기지 못하고 왜소한 인상을 지니고 있어 왠지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한다.1월은 대망과 희망 속에 위세가 등등하다. 새출발의 나팔 소리가 울리고 깃발이 나부낀다. 연하장과 축복 속에서 새 각오와 기대로 흥분이 인다.2월이 되면 흥분은 가라앉고 초발심은 시들해진다. 한해살이는 이미 시작되었으므로 세월이 가면 한 해가 지나갈 것이다. 2월은 어정쩡하고 특징도 없다. 3월이면 새봄이 시작된다. 봄을 통해 탄생을 경험하..
[수필]참으로 인간적인 / 신현식 참으로 인간적인 / 신현식 - 중에서- 초겨울이었다. 강의를 마치고 지상철에 올랐다. 종점이어서 빈자리가 많았다. 전동차 안에는 승객 두 명이 한창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시간이 되자 전동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출발하면 그만둘 줄 알았던 그들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이야기는 대체로 한 명이 하고 동료는 대꾸를 하는 형태였다. 연세가 조금 있으신 그들은 약간의 취기가 보였다. 그래서인지 목소리의 톤이 사뭇 높았다. 보아하니 시제時祭에 참석했다가 음복을 하신 것이리라.그들의 이야기는 시제에서 다투었던 내용이었다. 시제를 주관하는 집례執禮의 옳지 못함을 따졌다. 평소에 잘 참석하지도 않던 일족이 오랜만에 그럴듯한 옷차림에 고급 승용차를 타고 오자, 그에게 종헌終獻을 허락하여 자기가 술을 따라 ..
[좋은수필]아버지의 군불 / 이상은 아버지의 군불 / 이상은 설을 쇠러 섣달그믐날 고향 집에 갔다. 아버지가 마른 소나무 토막을 깔고 아궁이 앞에 앉아 계셨다. 다가가 나란히 앉았다. 고향 집의 저녁 해는 아래채 지붕 위로 진다. 해가 아래채 지붕에 걸리면 아버지는 빈 쇠죽솥에 물을 채운다. 모르긴 해도 30년 아니, 40년도 더 된 아버지의 오래된 일과다. 이제 소를 키우지 않지만, 이는 멈추지 않는 아버지의 일상이다. 두어 달 전에 아버지께 이제 소는 왜 키우지 않느냐고 여쭈었다. 내가 이제 기운이 부치니 그만 남의 집으로 보내주었다며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웃으셨다. 그리고는 짐승도 한솥밥을 오래 먹다 보면 정이 들게 마련이니 더 이상 정을 주지 말아야 한다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지만 저녁때만 되면 마음 둘 데가 없는지 여물 대..
[좋은수필]사랑나무 / 김순동 사랑나무 / 김순동  가을의 은해사銀海寺는 짝지은 등산객들로 붐빈다. 일주문을 지나 소나무 숲을 지나노라면 햇빛을 서로 많이 받으려고 키 재기하는 틈새로 빠져드는 햇빛이 은빛 바다처럼 눈부시다. 수많은 외침을 겪으면서도 손상되지 않은 채 지금껏 묵묵히 앉아 있는 백흥암 극락전의 모습은 부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인지 안정감을 준다.운부암으로 오르는 길옆에는 사랑나무가 있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춘다. 둥치가 비슷한 아름드리 두 나무가 사랑을 속삭이는 듯하다. 왼쪽 나무의 허리쯤에서 나온 가지 중앙 부위가 오른쪽 나무 둥치에 붙어 한 몸을 이룬다. 마치 왼쪽 남자가 팔을 뻗어 여자의 허리를 껴안고 있는 모습이다. 거기다가 접목된 부분은 여인의 얼굴 모양으로 둥글게 부풀어 올라 보는 사람마다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