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6

[좋은수필]부석사浮石寺 / 배단영

부석사浮石寺 / 배단영

 

 

오후 내내 하늘이 흐리더니 문을 나설 때는 이미 빗방울이 굵어져 있었다. 마른 땅은 빗방울을 훑고 지나가자 흙냄새가 진동한다. 제법 웅덩이마다 비가 차이고 바짓단은 비에 젖은 채 시간이 지나갈수록 무겁게 느껴졌다.

주위를 몇 번이나 헤매고서야 그녀가 사는 집이 위치한 골목길로 들어섰다. 돌담과 기와의 처마가 일정하게 연결되어 있어 찾고자 하는 집을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이 층으로 연결된 계단을 보고서야 그 집을 찾을 수가 있었다. 계단에는 밑으로 흐르지 못한 물들이 제법 고여 있었다. 계단을 오르자 이층집 위에는 낡은 옥탑방이 비에 젖은 채 웅크리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을 서너 번 불렀지만, 빗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녹 쓴 파이프에 매달려 있던 빨랫줄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줄이 내는 소리가 피리 소리 같기도 하고 아이 울음소리 같기도 해서 을씨년스러웠다. 비에 젖은 문을 밀어젖히자 컴컴한 어둠이 고래의 뱃속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고 갑작스런 정전처럼 어두워 아무것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문지방을 겨우 넘어서 한참을 서 있자 사물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멘트 바닥에는 낡은 싱크대가 있고 그 위에는 말라비틀어진 행주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방문을 열자 사람 냄새보다 곰팡내가 왈칵 안겨들었다. 맞은편 벽 가까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는 것이 그녀이리라. 바짓단에서도 접은 우산에서도 빗물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에게 그 남자는 첫사랑이었다. 남자가 채용 시험을 오랫동안 준비할 때 아무 말 없이​ 그의 뒤를 지켜준 것은 그녀였다. 그녀는 피붙이 없이 살아왔던 외로움 때문에 그에게 늘 무엇을 해주어도 부족하다고 했다. 그 남자만이 그녀의 세상이었다. 그녀 스스로 그를 표현할 때는 늘 '자신의 전부'라고 했었다.

언젠가 그녀와 식사를 할 때 임신 삼 개월이라며 행복해서 눈물이 날 것 같다고 했다. 혼자 살아온 그녀가 배우자를 만나 평생을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마음속으로 그녀의 행복이 오래오래 가기를 기도했었다.

나를 찾는 그녀를 다시 만난 곳은 산부인과였다. 그녀가 있다는 병실의 손잡이를 잡고 돌릴까 말까를 한참 고민했다.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던 그녀의 소문이 발이 되어 내게 전해질 때는 가슴 아픈 이야기뿐이었다. 굳이 나를 찾지 않고 버티던 그녀를 찾아 나선 것이 그녀에게 위안이 될지도 의문스러웠다.

남편의 폭력으로 세 번의 유산을 했다는 병원 직원의 말이 나를 병실 앞에서 괴로워하게 만들었다. 그녀를 보면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조금은 난감하고 괴로운 마음이 들었다. 들어간 병실에는 그녀를 덥고 있던 이불의 끝자락이 그녀의 흐느낌​ 만큼이나 들썩였다. 그녀의 병실 침대 옆 작은 테이블 위에는 약봉지가 그녀처럼 구겨진 채 놓여 있었다. 일어나 앉은 그녀의 부은 얼굴은 몇 년 전 행복해하던 그녀의 모습을 상상 수도 없게끔 하였다.

부석사로 가는 길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실컷 울었다는 듯이 이불을 밀치고 일어나 푸석한 얼굴로 부석사에 가고 싶다고 했다. 젊은 그녀가 이렇게 털고 일어나 준 것이 고마워 아무 말 없이 길동무로 따라나섰다.

오르는 길목엔 젖은 연초록의 잎들이 비에 젖어 싱싱해 보였고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사과들이 빗속에서도 달짝지근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내린 비로 사과밭 앞에는 작은 도랑이 생겨 물은 무심히 흐르고 있었고 빗물은​ 흘러갈 뿐 본래의 것을 변화시키지는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와 내가 우산을 쓴 채 오르막을 거쳐 천왕문을 지났다. 천천히 걸어도 그녀는 힘들어 보인다. 삶의 모든 희망을 상실한 채 모든 것을 두 손에서 내려놓은 것처럼 텅 비어 버린 표정이다. 지금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있다고 그녀는 느낌으로 내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를 괴롭히는 것이 그의 마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인지, 그로 인한 슬픔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 때문인지 나는 알 길이 없다. 그에게 모든 것을 주었는데 돌아온 것은 고통뿐인 지금, 그녀는 어떤 마음일까. 지금 그녀가 그에게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느낀다면 그녀는 성불成佛할지도 모를 일이다.

타인에게 마음을 다 주지도 못하고, 이해타산利害打算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는 것은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느껴진다. ​그녀가 부석사를 오르며 스스로 마음을 다독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자문자답하다 긴 계단 앞에 서서 숨을 고른다.

"선묘가 의상을 위해 목숨을 바쳐 용이 되었다면 의상 대사는 그녀를 사랑했을까. 사랑하지 않았을까?" 뜬금없는 소리에 그녀를 바라본다. 아마도 이해理解를 바라지 않고 한 남자에게 목숨 걸고 사랑한 것이 스스로 선묘와 자신이 비슷하다고 생각한 것처럼 느껴졌다. 선묘와 의상대사와의 사랑 이야기는 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부석사에 남아 있을지 궁금해졌다. 사랑하는 이의 안전을 염려하여 죽음을 선택할 수 있었던 선묘의 행동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어리석은 이를 일깨우고자 하더라도 긴 세월 속에 묻혀 사라진 것에 로맨틱한 이야기 한 토막을 덧붙인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자신을 생각하지도 않고 단지 누군가에게 몽땅 주기만 한 것이 사랑이라면 받는 누군가는 얼마나 부담스러울 것인가.' 혼자 생각에 젖어 계단을 오르자 목어와 북이 소리 내어 울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생겨나서 괴롭고, 존재해서 괴롭다. 나는 저 목어와 북을 쳐서 모든 것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다. 아니 나 자신만이라도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기를 바라며 내 속의 북을 울리고 싶다.

내린 비로 웅덩이 가득 물이 차인 곳에 연꽃이 환하게 피어 있다. 연꽃 가까이 손을 가져가던 그녀가 무슨 생각에서 일까.

"기다려 볼래, 그러다 보면 그의 마음이 다시 나에게 돌아올지도 몰라." 가늘디 가는 바람 소리같이 그녀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간다. 의상을 사랑했던 선묘가 용으로 변해 사모하는 임을 위해 드러누워 있다는 대웅전 계단 어느 곳에도 그들은 존재하지 않고, 멈추었던 비는 다시 내려 세상을 적시고 있었다. 무량수전 기와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큰 강을 이룰 것처럼 느껴졌다.

대웅전 뒤 곁엔 땅에조차 내려앉지 못하는 큰 바위가 있으니 선묘의 사랑이 의상대사의 가슴을 사랑으로 감화시키지 못하여 아직도 좌불안석坐不安席인가?​

돌아오는 길에 그녀가 혼잣소리로 중얼거린다.

"사는 것이 부석浮石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