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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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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어느 오후의 평화 / 정희승 어느 오후의 평화 / 정희승 대화할 때 서로 암묵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대상이나 사물은 보통 문장에서 생략한다. 정황으로 알 수 있다면 주어나 목적어는 굳이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고 애써 완전한 문장으로 말을 계속하면 오히려 대화가 껄끄러워진다. 우리말의 중요한 특징이다. 점심을 먹다가 아내가 묻는다. "부쳤어요?" 역시 문장의 주요 성분을 생략한다. 말하지 않아도 내가 미루어 짐작할 거란 의미이다. 아내가 묻는 내용을 반듯한 문장으로 재구성해 보면, '오늘 군에 있는 큰애에게 소포를 부쳤어요?'쯤 되겠다. 오늘이나 큰애, 소포 등은 서로 묵인하는 것이므로 굳이 들먹일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결국 궁금한, '부쳤어요?'라는 동사만 남겨 놓는다. 덧없이 사라지는 행위, 즉 부치는 것을 직접 보지 못했으..
[좋은수필]아래층 계단의 말 / 이경은 아래층 계단의 말 / 이경은 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다시 눈을 감고 생각에 빠진다. '아, 오늘 낮에 그 사람이 이렇게 말했을 때, 내가 이렇게 대답해야 했는데. 바보같이 겨우 그런 어리숙한 대꾸를 하다니. 그리고 왜 또 그렇게 버벅거렸는지…. 도대체 그 많은 말들은 다 어딜 간 거야?" 나는 밤새 이렇게 말해보고, 저렇게 말을 가져다 이어대었다. 깔끔하고 멋지게 응수를 할 수 있었는데, 하고 생각하니 잠은 점점 더 사라져갔다. 그런 날은 밤을 하얗게 새었다. 어려서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이런 일들이 많았다.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특히 언쟁을 벌이거나 토론을 할 때에 가슴속의 말을 제대로 못해 답답했다. 어떤 사람은 말이 느려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는 오히려 말이 빨라 그럴 때가 많았다. 가..
[좋은수필]낡은 구두 / 류영택 낡은 구두 / 류영택 창녕 댁 대문을 들어서면 감나무에 묶인 철사 줄이 마당을 가로질러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빨랫줄을 따라가다 보면 마당중간쯤에 붕긋 솟아오른 장대가 줄을 떠받치고 서 있고, 장대를 중심으로 옷이 널려있었다. 그 집 옷가지들은 우리 집 빨랫줄에 널린 것과 달리 하나 같이 무명치마와 몸빼바지 뿐이었다. 고부간, 두 여자만 살고 있으니 남자 옷이 없는 게 당연한 일이겠지만 왠지 가슴이 허전해왔던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어 그랬던 것 같다. 빨랫줄을 떠받치고 있는 장대와 그 집 안방 문은 마주하고 있었다. 장대에 한 손을 잡고 서서 축담을 바라보면 댓돌이 보이고 댓돌 위에는 남자구두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새 구두도 아니고 기름기가 빠진 낡은 구두를 멀찍이서 바라다보면 내 눈에는 아버지가 신..
[좋은수필]수필의 가치 / 정목일 수필의 가치 / 정목일 수필이 자기의 삶과 철학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문학이라 해서 진실성을 폭로나 노출이라는 의미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수필의 진실성은 독자를 위해서가 아니며, 더군다나 작가 자신을 위해 있지도 않다. 진실성은 수필을 위해서, 나아가 그 자체의 미덕을 위해서 존재한다. 얄팍한 인기를 끌기 위하여 노출을 솔직성으로 잘못 이해한다면 그는 수필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나르시시즘적 글쓰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문학은 결코 삶보다 우위에 있을 수 없다. 인생이 있고 문학이 있으며, 수필가가 있고 수필이 있다. 작품이란 삶의 반영에 불과하다. 그래서 진지한 삶의 외곽에 안주한 사람들이 함부로 쏟아내는 노출화된 수필에 문학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래서 수필에 무한한 자유를 허용하면..
[좋은수필]무명작가의 죽음 / 박범수 무명작가의 죽음 / 박범수 예식이 있어 서울행 전철을 타고 시청역에 내렸다. 덕수궁 대한문 앞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구호를 외치는 군중들이 보인다. 탄핵 무효와 법치주의 수호를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무리 속에는 나이가 들어 보이는 군복 차림의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표정은 무겁고 진지하다. 《동아일보》사옥을 지나 광화문에 가까이 가자 적폐 청산을 주장하는 촛불시위대가 보인다. 단상에서는 경쾌한 음악과 구호가 흘러나온다. 축제 같다. 더 좋은 민주주의와 사회개혁을 요구하는 깃발과 팻말이 보인다. 젊은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밝고 역동적이다. 그들을 지나쳐 예식장이 있는 건물로 향한다. 두 무리의 풍경과 구호로 머리는 점점 혼란스러워진다. 결혼식 내내, 자유로운 토론이 불가능해 보이는 두 무리의 모습이 ..
[좋은수필]수필의 효용성 / 정목일 수필의 효용성 / 정목일 행복은 물질보다도 마음에 있다. ‘부자 되는 법’과 함께 ‘마음을 다스리는 법’에 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어느 한쪽만으로 치우칠 수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 공부’에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수필 공부’도 좋은 방법이 아닌가 한다. 수필을 ‘독백獨白의 문학’이라고 한다. 독백은 자신의 마음을 모두 비워버린 경지를 말한다. 마음을 비우면 맑고 편안해진다. 마음속에 거울을 하나 달아두어서 자신의 영혼을 비춰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의 거울을 잘 닦아두어야 한다. 이기利己라는 먼지, 집착이라는 때, 욕심이라는 얼룩을 잘 닦아내야 한다. 마음속에 샘을 하나 파두어서 샘물로 마음을 씻어내야 한다. 조금만 방심하면 티끌과 먼지가 쌓이게 된다. 불경佛經에서 말한 ‘욕..
[좋은수필]조율 / 유현주 조율 / 유현주 TV채널을 돌리다‘국악한마당’과 마주쳤다. 비취 빛 한복을 입은 여자가 창을 하고 한편에 두루마기 차림의 남자가 장구를 치고 있다. 장구는 소리를 밀었다 당기고 때때로 튕겨주며 가락과 조화를 이룬다. 화면을 응시하다 나도 모르게 흐름 따라 손가락 장단을 맞추고 있다. 이런 시간과 마주하면 한때 저 자리를 지키신 적이 있던 아버지가 떠오른다. 마치 수십 년 후에 찾아 낸 일기장을 보는 듯 소중한 기억도 살아난다. 그 중에 지금도 시골집 안방 선반에 놓여 있는 장구를 만들던 때는 더없이 특별하다. 내 바탕이며 정서의 원류가 된 날들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본업은 농사꾼이지만 표면적인 것이었다. 누가 뭐래도 당신께서 평생 업으로 여긴 것은 시조창(時調唱)이었고 동반 되는 것이 장구였다. 농번기에..
[좋은수필]상쾌한 굿 바이 / 박경대 상쾌한 굿 바이 / 박경대 신기한 일이었다. 여름이 막바지로 접어들었으나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마침내 나로부터 떠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십여 년을 같이 지냈지만 섭섭하거나 애틋한 감정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히려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남자들이 모이면 빠지지 않는 것이 군대 이야기다. 그처럼 그곳에서의 생활은 평생토록 잊어지지 않는 사연들이 많다. 오랜 세월동안 이어진 질긴 인연의 그를 처음 만난 곳도 바로 군대에서였다. 삼 년의 군대생활 중 열 달 가량을 기동타격대에서 근무하였다. 하루에 한두 시간 훈련을 한 뒤에는 책도 읽고 TV를 보는 등 비교적 자유롭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런 생활이 구속 받기를 싫어하는 나의 성격과 딱 들어맞아 의무적인 두 달의 근무기간을 끝내고도 연장근무를 신청하..